2018년 5월 17일 목요일

[범용기 제2권] (87) 돌아와 보니 – 기장총회에서

[범용기 제2권] (87) 돌아와 보니 – 기장총회에서


조선출은 그 정도로 가만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좌담에 능숙하다.

그의 고향인 경상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리고 사건의 전체를 ‘지방색’이란 ‘싸이드라인’으로 조명(照明)했다.

“첫 설립자 김대현 장로도 경상도다. 지금 설립자 김영철도 물론 경상도 출신이다. 법인재단도 경상도의 진정률 일가에서 나왔다. 그런데 ‘캠퍼스’는 함경도, 평안도 일색이다. 나 하나만이 경상도 출신인데 그게 눈에 가시 같아서 온갖 모략으로 나를 쫓아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성’(理性)이고 ‘의리’도 없다. 지방감정이 판치게 된다.

창녕의 배성근, 밀양의 윤술룡 등등이 ‘선봉장’으로 나섰다. 총회 산하의 경상도 일대를 유세했다. 총회의 ‘기류’는 그들 켠에 섰다고 자부하게 됐다.

그들은 총회에 제소했다. 이 사건 처리를 위해 총회 장소에서 한신 ‘전체이사회’가 모였다. 조선출 대신에 내가 피고인이 됐다.

나는 이 ‘사건’이 총회에 상정될 것을 예측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초지종’의 전말을 상세하게 진술한 백서(白書) 비슷한 것을 미리 초안하여 등사업자에게 등사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상당한 부피의 ‘팜프레트’로 제본됐다. 총회원들에게 배부하려면 몇백부 찍어야 했다.

나는 그것을 전체 이사원에게 한책씩 나누어 줬다. “이것이 내 진술서요. 이것을 읽으면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될 것이오. 나더러 읽으라면 읽겠소” 했다.

“읽어주시오” 한다.

그래서 낭독했다.

윤술룡은 걸고 든다. “왜 이렇게 중대한 사건을 당초부터 전체 이사회에 내놓지 않고 몇 사람 안되는 실행이사회에서만 쥐고 있었오!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었단 말이오.”

“그때 학장은 함태영이었으니까. ‘함’ 옹에게 물어보시지요. 나는 교육 책임만 맡았으니 사실, 내게는 답변해드릴 권한도 없오. 할수 있겠오. 나는 학사보고나 하면 그만일 것이오. 그러나 그 분이 연로하고 언어나 행동이 부자유하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진술한 것뿐이오. 전체 이사회 소집 책임은 더 따지지 말아 주시면 좋겠오.” 했다.

그들은 결국 총회에 제소하기로 했다.

그 총회는 ‘기장’으로서는 중요한 총회였다.

김세열, 조승제, 이남규 등이 초안한 기장 “헌법”이 제출될 것이고, 김재준, 전경연, 박봉랑, 김정준, 서남동 등이 초안한 ‘기장’ 신조와 권징조례와 의례준칙이 제출되는 총회였던 것이다.

나는 우울하고 격분했다. 신앙고백과 신학적 이해(理解)를 기초로 한 동지적 친교, 즉 코이노니아 위에 서야 할 ‘기장’이 지방감정, 교권욕 등등에 지배되어 분쟁을 일으킨다는 것이 슬퍼졌다.

그럴 경우에 나는 ‘은퇴’한다. 조용히 산 속에 숨기도 하고 탈속한 신선같이 명승고적을 순례하기도 한다. ‘공자’보다도 노자(老子)를, 관우(關羽), 장비(張飛)보다도 도연명(陶淵明)을 택한다.

나는 전남 광주에 내 허물없는 친구 백영흠을 찾아갔다. 그는 ‘기장’의 친구지만, 교회로서는 ‘기장총회’와는 관계없는 ‘자기류’의 독립교회를 갖고 있었다. 소탈한 성격의 재사였다.

나는 그리로 갔다. 내 향방은 상철에게만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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