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17일 목요일

[범용기 제2권] (86) 돌아와 보니 – 조선출 사건

[범용기 제2권] (86) 돌아와 보니 – 조선출 사건


1959년 – 조선출은 내가 보낸 3만불을 자기 재량대로 주물러 중간이익을 낚아 볼 생각이 났던 것 같다.

그는 ‘과잉 의욕’과 ‘시행 착오’를 동시에 갖고 있는 경리 책임자였다. 함태영도 조선출이 하고 있는 일을 모르고 있었다.

사실, 재단과 재정관계는 함태영이 책임진다고 했고 그의 직속 부하로 조선출을 교감으로 임명했으니만큼, 교육책임만 지게 된 나에게는 그런 재산관계는 나의 직접 책임부서일 수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조선출은 함태영 학장과도 의논한바 없이, 어떤 협잡꾼 거간들에게 말려들어 그 돈을 몽땅 잃어버리게 됐다.

그 사연이란 – 대략 이런 것이었다.

“부산 수입창고에 ‘애자’, 즉 전선주에 쓰는 속칭 ‘뚱단지’라는 물건이 가득 차 있다. 전쟁중에 전주와 전선이 모두 파괴되어 그 시설은 온전히 다시 해야 하게 됐다. 그러면 ‘애자’는 몇갑절 고가로 팔 수 있다. 부산 수입창고의 애자를 지금 염가로 사면 ‘일확천금’은 ‘땅집고 헤엄’이다. 그 3만불은 몇 달 안에 몇십만불로 붓는다. 매매수속은 우리가 책임지고 해준다.”

이것이 거간꾼들의 달콤한 유혹이었다.

두꺼비 배때기처럼 부풀은 조선출의 ‘허욕’은 그의 이성을 넘어섰다. 그는 고스란히 그 지성적인 협잡꾼에게 포로가 됐다.

조선출은 그들에게 착수금으로 2천 6백만원인가를 줬다고 한다. 된다 된다 하면서 좀 더 좀 더 돈만 요구한다.

부산에 애자가 있는지, 없는지 점검도 본 일도 없이 조선출은 그들만 맏고 그들에게 끌려 간다.

소문이 퍼지고 여론이 분분하다.

김종대는 분개했다. 함태영도 난처하게 됐다. 김춘배는 조선출을 옹호하고 나섰다.

내가 캐나다에서 돌아오기 전에 벌써 이 일은 발단 돼 있었다. 돌아와 보니 그 모양이었다. 실행 이사회가 아마도 수십번 모였을 것이다.

김춘배는 함태영 직계다. 재단과 재정관리는 실권학장인 함태영의 총괄하에 있다. 조선출은 함태영의 실권행사를 위해 함태영이 세운 ‘교감’이다. 그러므로 조선출이 저지른 일은 그 책임이 함태영에게 돌아간다. 그러니 김춘배가 조선출을 옹호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 드러난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것은 ‘시행착오’지 ‘범죄’는 아니라는 방향으로 전개시키려 했다.

그런데 금전문제, 특히 공금관계에 있어서는 그런 ‘선의’가 통하지 않는다.

한신 실행이사 가운데는 캐나다 선교사 두 분이 끼어 있었다. 그들은 “법대로 합시다”한다.

조선출 자신의 최후진술을 듣기로 했다. 조선출은 울면서 호소한다.

“내가 학교를 위해서 한 일인데 일이 빗나가서 뜻한대로 안된 것입니다. 내 사생활에는 한 푼도 쓴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허물이 없달 수는 없습니다. 책임지고 교감직을 사면합니다.”

이사회에서는 세 가지 의견이 갈라져 있었다.① 사면할 필요 없다. ‘문제’로 다루지 말자. 김춘배 그룹의 태도였다.② 손해액을 변상하고 사면하라. 공금은 조선출의 사재가 아니다. 선교사측 이사들의 태도다.③ 사면하고 완전 퇴진하라. 손해액은 ‘변상’을 원칙으로 하되 능력 생기는대로 갚아가라. 부산창고에 애자가 있다고 했으니 변상능력이 아주 없달 수는 없겠다. - 이것은 조선출을 동정하는 지방 이사들 중 몇 사람의 태도였다.

결국, 조선출은 당장 사면하게 하고 변상은 점차적으로 한다는데서 낙착됐다.

그러나 김춘배는 계속 반발했다.

선교사 측에서도 그에 못잖게 강경하다.

공금처리에 어떤 ‘인정’을 개입시켜서는 안 된다. 법정에 고소할 밖에 없다고 선교사들은 말한다. 김춘배는 “마음대로 해 보라”는 “냉소”로 일관했다. 민사소송이란 거창한 비용이 드는 대시에 판결은 “부지하세월”이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에 성북서 형사과에서 내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들이 “원고”가 되어 형사재판에 건다. 우선 “공금횡령죄”로 조선출에게 구속영장이 나왔다. 조선출은 고랑을 차게 됐다.

그때에사 김춘배는 당황해졌다.

조선출은 학교에서 완전 퇴진하고 손해된 금액은 보상한다는데 동의했다. 그리고 성북서에는 “우리끼리서 잘 해결했으니 형사고소를 취하해 달라”고 했다.

결국 학교에서는 3만불을 떼우고 이럭저럭 창피만 당한 셈이었다.

성북서에서의 형사소송은 취하됐다.

그러나 나의 캐나다 선교부에 대한 면목은 부끄럼과 민망함만 남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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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자 사건]은 제46회 총회 회의록
[부록 제1호] 한국신학대학 경리조사 처리에 관한 건 ☞ 44쪽 이하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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