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19일 수요일

[범용기 제6권] (1638) 가정이라는 공동체

[범용기 제6권] (1638) 가정이라는 공동체[여호수아 24:14-18, 마태 7:24-27]

성서에서는 “집”이란 말이 1876회나 쓰여졌으니만큼 가장 중요한 단어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겠습니다. 성서에서는 “집”(House)이란 말과 “가정”(Home)이란 말과를 거의 같은 뜻으로 통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Home”이란 말까지 합하면 약 2천번 나옵니다. 오늘 우리 “크리스찬 가정”을 주제로 예배하는 모임에서 이 “단어”부터 해명되야 하겠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인류학적으로 본다면 “가정의 형태”가 상당히 다양한 과정을 거쳐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 거의 제약 없는 동거제 등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남자가 남자만으로 온전하지 못하고 여자가 여자만으로 온전하지 못하다는 “본성” 때문에 남과 여가 같이 살아야 하고 또 자녀를 낳아 기르고 싶다는 본능적인 욕구에도 응해야 하고, 낳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길러야 하고 기르려면 먹이고 입히고 보호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크리스찬이고 아니고 간에 “인간”인 한, “가정”은 갖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특별나게 “크리스찬 가정”이라고 꼬집어 내세울 필요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점에 대해서 몇가지 지적해 보려 합니다.

[1] 일부일처제도로 못박아 놓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른 교훈에 있어서든 주로 원리원칙을 가르치는 데 그쳤습니다만, 이 “혼인”이란 사건에서는 아주 율법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태초에 하느님이 일남일녀로 창조하시고 둘이 합하여 한 ‘몸’(Flesh, 살)이 되게 하셨으니 하느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남일녀가 결혼에 의하여 “한몸” 된다는 것을 법규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몸된 두 인간이 사는 보금자리가 가정이라 하겠습니다.

[2] 그들이 사는 보금자리, “집”이란 것은 자연질서나 사회질서의 산물이기 전에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직결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크리스찬 가정은, 그러므로, 그 성립의 원초부터 그 “기반”이 종교적입니다. 하느님이 짝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찬 가정은 하느님을 모신 집입니다. 남편과 아내, 그리고 그 위에 제3의 높은 차원인 하느님을 정점으로 한 삼각형적인 공동체란 말입니다.

②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성경 요한일서 4:7에 다시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모신 집인 “크리스찬 홈”도 사랑의 공동체여야 하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라 하겠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여 새 가정을 이루게 되는 동기와 과정은 “사랑”의 친교에서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단어는 영어에서는 Love란 말 하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만, 헬라어에서는 Eros와 Agape의 두 낱말이 있다고 합니다. 한국말로서는 “남”과 “여”의 사랑을 “연애”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개화운동 이후에 유행된 말이고 그 전에는 “상사”라고 했던 “실연”은 “상사병”이라고 했습니다. “상사”란 것은 “서로 생각한다”는 뜻이고 “상사병”이란 것은 서로 생각하면서도 서로 사귈 기회가 마땅치 않아서 병이 난 것을 의미합니다.

“서로 생각한다”는 것은 둘이 다 상대방으로 사모한단 말입니다. “연애”란 말보다 훨씬 젊잖은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연애”란 것은 서로 생각해주고, 서로 보고 싶고, 같이 지내고 싶고, 서로 도와주고 싶고, 그래서 돕고 도움받고 해도 괴롭다거나 무슨 댓가를 기대하는 것도 아닌, 그저 기쁘고 행복한 경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지나 이성보다도 감정의 분야에 속한다 하겠습니다. 이유를 따지기 전에 벌써 좋아하는 것입니다. “I Like him”입니다. 이 감정(Passion)이 두 주체를 한몸되게 하는 뜨거움입니다. 그래서 “가정”이 탄생합니다.

그러나 “가정”은 “낭만”보다도 Real합니다. 처음의 뜨거운 감정이 그대로 지속하거나 상승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현실은 일면, 냉혹한 데가 있습니다. 그래서 “첫사랑”이 동요되기도 하고 서로 의구심을 품기도 하고, 냉각되기도 하고, 또 냉각된 것 같이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면서도 그런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이 일종의 “위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계기로 사랑의 바탕을 Eros에서 Agape에로 높여야 합니다.

Eros는 상대방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심정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Agape는 상대방에게 나를 주고 싶은 심정에서 표시됩니다. 그것은 인격적 결단을 요합니다. 이성과 의지가 감성을 규제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정화합니다.

이것은 훨씬 더 높은 차원의, “크리스찬 사랑”입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내가 짊어지고 그와 화해하고 그와의 사랑의 샘터를 발굴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속죄 사랑에로 부부으 사랑을 승화시키려는 갸륵한 노력입니다. 사랑을 Spontanious한 데서 Personal한 데로 Achieve 시키는 것이 크리스찬 가정의 특색이고 생명이며 영광입니다.

③ 가정구성의 형태도 다양하였습니다. 대가족제도, 중가족제도, 핵가족제도에로 이동해 왔습니다. 지금의 소위 서구문명 사회에서는 “핵가족” 제도가 통용되고 있습니다.

대가족제도란 것은 온 “가문”, 적어도 5대쯤의 가족이 한 집에서 살던 시대를 말합니다. 농경시대에는 통토를 넓게 가진 사람이 “부자” 구실을 했습니다. 황무지를 개적하면 제 땅이 됩니다. 황무지 개척에는 일꾼이 많아야 합니다.

따라서 한 집에 가족이 집단으로 기거해야 합니다. 그런 경우에 결혼은 어떤 다른 가문의 여자가 상대방인 다른 가문의 남자와 결혼하여 그 남자의 가문에 한 ‘멤버’로 들어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혼과 함께 그 여자는 그 남자의 가문 사람이 되어 그 가문의 “체제인”이 됩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에서가 아니라, 두 가문의 어른끼리서의 합의에 의하여 결혼이 선포되든 것입니다. 결혼 당사자는 자기 아내될 여자나 자기 남편될 남자를 만나보거나 사귀는 일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저 하라는 데로 하는 것 뿐입니다. 어쨌든 일단 결혼하면 그것은 절대적이어서 이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자의 본가집 가문에서는 Membership이 제거됐고 여자의 시집 가문에서도 “소속”이 말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혼”은 두 가문에 함께 가문으로서의 위신을 추락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개성이 강한 남자는 자기 아내가 맘에 들지 않으면, 결혼자 이외의 다른 여자와 불법으로 사귑니다. 여성계에서 그래도 사랑의 자유를 가진 계층은 기생사회였습니다. 기생은 아름다움과 지성과 예술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좀 잘났다는 남자들이 결혼자 이외의 여성과 사귀려면 기생과의 사랑으로 흘러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국 민속사회에서 거이 유일한 연애 Story인 춘향전도 “기생”을 소재로 전개되었고, “황진이” 얘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부ㆍ귀층에서의 “축첩”은 “상식”으로 허용되었었기에 문제 밖이었습니다.

④ 그런데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교회가 서로, 교회 안에서 남녀동등이 실현되고, 일부일처제도가 엄수되고 축첩이나 남자의 방탕이 전적으로 엄금되어 가정이 정화된 것은 그야말로 근본적인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현대 핵가족제도에서의 -

가정구성의 멤버에는 부부와 함께 그 직계가족이 들어 있습니다.

이제 한 가지 크리스찬 가정의 중대 문제는 자녀교육 문제입니다. 아무리 핵가족이라 하더라도 아들과 딸, 합하여 둘이나 셋은 갖고 싶어합니다.

여기서 나는 일반적인 가정교육을 얘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자신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민한 크리스찬 가정에서 주의해야 할 몇 가지는 참고로 얘기해 보려고 하겠습니다.

[1] “나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 북미주에 왔는데 아이들 자라는 꼴을 보니 나는 실패자요!”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보기에는 그가 너무 속단하는 것 같았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니는 십대 소년소녀들은 인간됨의 과정에서 가장 물결 센 삶의 단계요, 그것이 삶의 완성이가 아니기 때문에, 실망은 금물입니다.

[2] 부모가 자기 나름대로 어떤 “자녀형”을 만들어 갖고 자녀를 그 틀에 맞추려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나라 이조시대의 잘못이 주로 거기 있었습니다. 전체적인 환경이 다르고, 시대가 다르고, 자라는 세대의 의욕도 다릅니다. 그런데 기성세대는 이미 의식이 굳어져서 적응을 잘 못하지만 자녀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민감하고 적응성도 강합니다. 자녀들에게는 그들의 삶의 Style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자연스럽습니다. 부모는 십분 양해하고 다만 큰 과오가 없도록 간접적으로 선도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선한 운동에 동참하도록 격려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겠습니다.

[3] 한국 가정에서는 자녀에 대하여 너무 조심성이 많지 않은가 싶습니다. Overprotection은 아이들 용기를 좌절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 쉽습니다.

[4] 자녀들에 대하여 “바른 말 고운 말”을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욕설과 저주는 금물입니다.

[5] 결국 이민사회 자녀들은 이민한 그 나라의 시민으로 살 것입니다. 따라서 “異人種”(이인종)과의 결혼도 점점 많아질 것입니다. 그것이 정상태라 생각하고 그 방향에서 건설적으로 상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무원칙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오리엔탈”이든, 백인이든, 흑인이든, 아메리카 인디언이든, Cosmopolitan이든 간에 우리가 우리 자녀들에게, 미래를 맡길 사람으로 기대한다면 그들이 어떤 인간상으로 발전 성장해야 할 것인가는 미리 설정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박사가 되게 하자, 의사가 되게 하자, 무슨 기술자가 되게 하자 하고 기대를 걸어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적성검사”를 거쳐서 당사자가 결정할 것이요, 부모가 강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보다도 먼저 “인간다운 인간”으로 그 품격을 키워야 합니다. 자녀들은 귀엽지만 부모의 노리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하고 당당하게 내세울 인간형을 표준으로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크리스찬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가 그 “원형”입니다. 그는 “사람의 아들” - 참 인간임과 동시에 참 하느님 아들이었고 지금도 그를 “추월”했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니체도, 맑스도, 히틀러, 스탈린도 추월할 줄 알았지만 그 만큼 더 뒤떨어졌습니다. “그리스도형”이 우리와 우리 자녀들 교육의 표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정에는 그리스도 제단이 상설되고 그의 의지가 지배하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맘문을 열고, 우리 가정 문을 열고, 그를 맞이하면 그는 우리 맘속에, 우리 자녀들 맘속에, 우리가정 생활 속에 자유로 들어와 우리를 그의 형상으로 재창조하실 것입니다.

[6] 그런데 그는 우리 개인이나 가정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회, 전세계에 구원의 주로 임재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를 모신 가정은 저절로 사회관심, 나라관심, 세계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 중 누가아프면 내가 아프지 않더냐? 누가 넘어지면 내가 애태우지 않더냐?” 했습니다.

크리스찬 가정은 “My Home” 주의에 농성하고 평안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옮겨와 사는 나라와 조국의 이남과 이북에, 그리고 전세계에 열린 “My Home”인 것입니다.

1979년 5월 6일
토론토 한인 연합교회 가정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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