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18일 화요일

[범용기 제6권] (1637) 크리스찬의 역사

[범용기 제6권] (1637) 크리스찬의 역사[마태 16:13-23, 마가 8:27-30, 누가 9:27-31]

예수께서 갈릴리 지방에서의 3년 선교를 마치시고 이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과 죽음으로 그의 전생애와 전생명을 폭탄같이 던져 터뜨리려는 무렵이었습니다.

예수의 3년 생애에서 제자들의 교육은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사업 중 하나였습니다. 세 가지 사업이란 것은 ① 인간을 질병에서 해방시키는 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몸과 마음의 병을 고쳐 그 사람을 질병의 쇠사슬에서 자유하게 하는 일입니다. 요새 소위 “Healing Mission”이었습니다. ② 하느님 나라가 땅 위에 임하였다는 천국 복음의 선포였습니다. 이것은 영어로 Proclamation입니다.

지금까지는 하느님 나라는 하늘에만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땅이 하늘을 쳐다보며 거기로 올라가기를 원하는 인생이었습니다. 예수 탄생 설화에서도 동방박사들이 하늘의 별을 보고 예수 나신 것을 점쳤다고 했습니다. 독자들에게도 하늘의 천군천사가 예수 탄생을 알렸다는 것입니다.

이 질서는 “하늘에서 풀면 땅에서도 풀린다”는 질서인 것입니다. ③ 예수께서는 12제자를 택하여 밤낮 같이 있게 하시고 데리고 다니면서 자기의 하는 일을 보게 하시며 가르치는 “말씀”을 듣게 하시고, 때로는 그것을 풀이하여 알아듣게 하시고 또 둘씩 둘씩 짝지어 전도하러 보내심으로 훈련시키기도 하셨습니다. 이것은 후계자 또는 교직자를 위한 교육사업이었습니다.

3년 동안 이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기한도 몇주일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제자들을 데리고 수학여행을 떠났습니다.

왜 수학여행이 필요했을까요? ① 우선은 제자들의 기분을 새롭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다 자란 어른들도 어디로 견학간다면 무슨 우주여행이나 떠나는 것 같이 가슴이 설렙니다. 제자들도 모두 어른들이었습니다만, 가슴이 부풀었을 것입니다. ② 유다나 갈릴리 지방에서는 예수가 어딘가 나타났다면 당장에 수백명, 수천명이 모여들어서 음식 잡수실 겨를도 없게 됩니다. 밤에 어느 가정에 초대받아 주무신다면 거기에도 모여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초대해준 그 집 주인과 특별한 친교를 가져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만을 조용히 상대하여 제자들만에게 물어보고 일러줘야할 비밀을 얘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③ 그리고 예수님은 평생동안 예루살렘과 갈릴리 사이를 왔다갔다 했을 뿐이었습니다. 그 중간 지대에 있는 사마리아에도 들르기는 했습니다만,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른 것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좀 멀찌감치, 유다나 갈릴리 지방이 아닌, 시리아, 가이사랴 지방, 두로와 시돈 지방에까지 가 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베이루트’ 지방이 되겠습니다. 거기는 그때 페니키아라는 딴 나라였고 레바논, 헬몬 등 높은 산이 바로 뒤에 솟아 있는 인상적인 고장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고장을 택한 것은 병고침이나 복음전파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새로 말한다면 일종의 Vacation으로 떠난 것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귀절은 이 여행 도중에 가이사랴 지방 빌립보에 이르렀을 때 기록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졸업시험삼아 문제 하나를 내놓았습니다. 그 시험제목은 “너희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을 유도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하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남의 얘기, 남에 관한 얘기, 남들이 하는 얘기는 대수롭잖게 퍼뜨립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고 말문을 열게 하기 위해 이런 유도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솔직하고 단순하고 충동적인 베드로가 선뜻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세례 요한이라고도 하고 예레미야라고도 하고 선지자 중의하나라고도 합니다”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란 말은 헤롯당측에서 새어나온 “까십”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두려워 떨면서도 세례 요한을 토옥 속에서 끌어내어 목을 자른 헤롯은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 더 무섭게 복수나 하지 않을까 싶어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란 사람이 나타나 기적과 이사로 백성의 명망을 모으고 수천명 군중이 옹호하여 간 데마다 거리를 메꾼다니 이것이 다시 산 세례 요한이 아닌가 하여 두려워했던 것이겠습니다.

예수를 예레미야가 아닌가 하는 풍문은 “메시야”가 나타나기 전에 예레미야가 다시 와서 길잡이가 된다는 전설이 유대인 사회에 퍼져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선지자 중의 하나”일 것이라는 말은, 선지자들 중에는 기적으로 병고친 분도 있고 죽은 애기를 살린 일도 있고 용감하게 권력자 앞에서 잘못을 지적하는 분도 있었기에, 예수도 그런 분중의 하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메시야”는 아니지만 보통 인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개혁파 유대교에서 예수를, 이방인을 위한 선지자로 정립한 것과 비슷하다 하겠습니다.

예컨대, 예수가 약속의 메시야,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이만큼 유도했으니 이제는 본격적인 질문에 들어갈 준비는 끝난 셈입니다. 예수님은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역시 베드로가 재빨리 대답합니다. 그 대답의 내용도 문자적으로는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 기록이 꼭같지 않습니다. 제일 먼저 쓰여졌다는 마가복음에서는 “당신은 그리스도십니다”로 되었고, 누가복음에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십니다”로 되었고, 제일 늦게 쓰여졌다는 마태복음에는 “당신은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느님 아들이십니다”로 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수식자가 더 붙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공통분모는 “그리스도”란 것입니다. 예수는 세례 요한의 재현이나 예레미야 또는 선지자의 한 사람이 아니라, 그 자신이 “구세주” 즉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예수가 듣고 싶은 것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우리도 3년, 4년, 또는 그보다 더 오래 교회에 나오고 설교를 듣고 예배에 참석하고 헌금 바치고 봉사도 했습니다. 그 동안에 때로는 예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묻습니다.

“당신은 명철한 사상가입니다”, “당신은 소리없이 사회를 근본에서 개혁시키는 사회개혁자입니다”, “당신은 천재적인 Psychiatrist입니다”, “당신은 천재적인 교육자이십니다”, “무엇보다도 당신은 천재적인 종교가입니다” 등등 다채로운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그리스도 신자”로 등록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예수 편에 선 사람들 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예수 당시에도 수천명이 예수를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는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제자”라고 생각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비유로 가르치고 천국소식을 말하고 했습니다만, 그들에게 후사를 맡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숨은 포부를 공개하지도 않았습니다.

여기서 예수라는 이름은 고유명사로서 다른 사람들과 혼동되지 않게 하기 위해 붙인 이름입니다. 우리의 성명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란 것은 이름이 아니라, “직함”, 즉 “타이틀”입니다. 예수라는 인간이 “메시야”, “그리스도”, “만왕의 왕, 만주의 주”시다 하는 직위를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가 그리스도시다”하고 고백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교”가 탄생합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을 “크리스찬”, 즉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어쨌든, 베드로는 이 졸업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베드로가 12사도를 대표했다는 의미에서 이것은 모든 사도의 같은 고백이 됩니다. 예수의 질문도 “너희는…”이오 “너는…”이 아니었습니다.

이 신앙고백을 들은 예수님은 흐뭇했습니다. 아주 기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닏.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너는 복이 있다. 네게 이렇게 알게 한 것은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다.” 여기서 “혈육”이란 것은 “자연인”을 의미합니다. “나도 네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 즉 ‘반석’이다. 내가 내 교회를 이 ‘반석’ 위에 세울 터인데, 죽음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네게 하늘나라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오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선언입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요점이 있습니다. ① 베드로를 터전으로 교회를 세운다는 것, ② 이제부터는 땅이 하늘을 지배한다는 것, ③ 베드로는 땅과 하늘의 Keyman이 된다는 것. 베드로는 12사도를 대표한 것이므로 이것을 “사도전승”이라고 합니다.

“공관복음”에서 “교회”란 말은 여기 한 군데 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교회시대 이후에 교회의 권위를 보장하기 위하여 덧붙인 것이라는 비판학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강림 당시에, 성령의 열매로 교회란 공동체가 생겨졌다는 것은 교회가 인위적이 아니고 “영”의 생명체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를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가 세상에 계실 때에는 “교회”가 없었고 또 “교회”를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직접 인간을 상대했습니다. 그러나 12사도의 그룹은 그리스도를 핵심으로 한 사도들의 신앙공동체였기 때문에 그것이 성장함에 따라 교회라는 신앙공동체의 “핵”이 되었습니다. 그러니만큼 그리스도가 “교회”를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당연한 진실이었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 배태돼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각도에서 본다면 교회의 터전인 베드로가 역사의 Keyman임과 동시에 교회도 그러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서 “땅”이란 것은 역사의 “고장”을 의미합니다.

로마 카톨릭교회에서는 베드로라는 특정인물에게 예수께서 “천국열쇠”를 주어 천국열쇠는 로마 감독인 베드로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죽으면 그 천국열쇠도 그 후계감독에게 전승됩니다. 그래서 대에 대를 이어 로마법왕에게 천국열쇠가 쥐어진다고 했습니다. 법왕은 세상에서 그리스도 대행자니 만큼 그의 허락없이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법왕의 이런 권위를 시인하는 카톨릭교회만이 “교회”요, 신교는 “분열자”의 도당이라고 단정했습니다.

교회 바깥(권위)에는 구원이 없다. 신교는 교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신교에는 구원이 없다. 그래서 무자비한 “신교” 토벌이 감행되었습니다. 그 오랜 역사에는 up and down이 있었습니다만, 대체로는 그런 독선적 노선을 걸었습니다. 공산당 초기에는 그들이 자기들 “이데올로기”를 절대화하여 사상단일화를 위한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했습니다. 그들은 그 System을 로마 카톨릭에서 배웠다고 합니다. (West)

그러나 제2차 대전 후 요한 23세 법왕은 카톨릭을 용감하게 근대화했습니다. “신교”도 “교회”로 공인하고 “신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그 후부터 개신교와 카톨릭은 가능한 최선의 협력과 화해를 추진시키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의 신교와 카톨릭이 혼연일체가 되어 인간화와 인간해방을 위한 역사운동에 고락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직위중심으로 Keyman의 자격을 규정지으려는 것이 카톨릭의 입장인 것 같습니다. 법왕의 직위에까지 오르려면 신앙과 행위에도 그만큼 탁월한 공적이 있어야 하겠습니다만, 아무리 “독신자”요 “성자”라 하더라도 그들이 법왕과 동등으로 Keyman이 될 수는 없습니다.

좀 외람됩니다만, 이 “Keyman”의 기록에 대하여 나는 내 나름대로 해석해 보렵니다.

예수께서 이 약속을 공언한 것은 베드로와 그밖에 사도들이 예수의 인격과 사업에 대하여 바른 이해를 증인삼아 했기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주는 그리스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이것이 그들의 신앙고백이었고 예수는 그 신앙고백이 하두 신기하고 고마워서 나도 너희에게 말한다 하고 예의 교회와 천국열쇠 얘기를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의 핵심은 바른 신앙고백이요 베드로라는 자연인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교회의 “반석”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고장, 어느 인간이든간에 그런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신앙인이 교회의 토대가 되고 그 위에 교회가 서는 것이란 말입니다.

바른 양심을 갖고 이런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벌써 성령의 감화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자연인으로서는 그런 고백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설립만이 아니라, 그 운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적인 신앙고백자가 아닌 어떤 혈육의 욕심 또는 자기의 감정적 반발이 계기가 된 교회건설은 교회의 본질을 상실한 인위적인 사회집단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중에 그 교회로 갱신되는 것은 그 교회를 맡는 선한 목자나, 양심적인 신앙인이 모여들어 바르게 봉사했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고백에 따르는 것은 고난입니다. 영광이 있다 해도 “수난의 영광”입니다.

베드로는 그런 것까지 미리 생각하고 이렇게 고백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 때부터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마태 16:2-23). 베드로는 깜짝 놀라 “그건 안될 말씀이라”고 만류했습니다. 예수는 “사탄아 물러가라!”고 무섭게 책망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앙고백은 “샤마니즘”적인 접신술이나 기복사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각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다시 천국열쇠 얘기로 돌아갑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난을 각오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참 신앙인이라면 그런 사람, 그런 교회인에게 천국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Nominal Christian은 “고난”에서 “탈락”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참는다”는 것은 소극적입니다. “끝까지 악령과 싸우는 자는 승리한다”고 하면 더 좋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참 그리스찬입니다.

그들의 역사는 Keyman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짜 Keyman 구실을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어디 좀 반성해 봅시다. 예수가 말씀하신 Keyman은 하늘과 땅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특권을 가진 Keyman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옹졸합니다.

흔히 보는 대로는 정권잡은 자, 경제권 잡은 자, 무력가진 자, 살인장치를 가장 많이 만들어 쌓아놓은 자가 역사의 운명을 좌우하는 Keyman인 것 같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에게 하늘의 영광을 열어주지 못합니다. 그들은 인간에게 “하느님 형상”을 회복시키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을 짓밟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도 모르고 사랑과 평화의 사도도 아닙니다. 인권의 사도도 아닙니다. 그들의 본심을 투시한다면 자기 이익과 자기 집단 이익을 위해서는 전 세계역사를 자기 “밥통” 속에 쑤셔넣어 제 살과 피가 되게 하려는 악마적인 살벌한 “장치인간”(로버트)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과언이 아닐까 싶어집니다.

그런데 참 크리스찬은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먼저 구합니다. 역사 안에서 개인 자유와 사회 정의와 세계 평화를 희구합니다. 인간 치유, 인간 존엄, 자유 애호 등을 구현하려고 십자군이 되어 싸우는 부대입니다.

이런 소수자는 세상에는 약자입니다. 강자에게 능욕과 고난을 억울하게 당하면서도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잘못을 깨우쳐 바로 잡으려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성령으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양심에 깨끗함을 주어 한 점 부끄럼 없이 고난 중에 즐거워하게 합니다. 바울의 말과 같이 패배자 같으나 승리자요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하고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들입니다.

초대교회 300년의 수난시대에, 특히 로마에 있는 신자들은 땅 위에서 살 수 없어 백척깊이 땅 속에 꼬불꼬불 땅굴을 파고 거기서 예배하고 기도하고 성찬을 나누며 그리스도 오시는 새벽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의 간절하고 강인한 신앙고백이 지금도 그 카타콤에 감돌고 있습니다.

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구교로 선포함에 따라, 그 당시 서구문명의 전지역이랄 수 있는 지중해를 복판에 두고 둘러 있는 모든 나라가 기독교국가 즉 “크리스텐돔”이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세계적인 새종교가 되어 세대와 세대의 변천을 넘어 미래의 세계에까지 그 위대한 “비전”을 비취며 생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크리스텐돔”이 자본주의, 공산주의 등 “무신유물”의 세속물결에 밀려, 그리스도의 맛을 잃어갑니다. 예외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대세는 그렇게 됐습니다. “마몬”이 하느님 노릇을 합니다. 횡포한 독재자가 하느님의 자리를 메꿨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됐습니까? 역사의 Keyman인 기독교 신자가 올바르게 그 특권을 사용할 줄 몰랐거나 사용하지 않았거나 스스로를 업신여겨 도전보다도 굴종을 택했거나 한 데에 그 중요 원인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된 것입니다. 그만큼 심판도 엄할 것입니다.

사회와 교회에서 소외된 대중이 교회문을 두드리며 “그리스도를 교회당 안에 유폐시키지 말고 우리 무연중생이라는 ‘민중’에게도 보내달라”고 부르짖어도 그들은 귀담아 들어주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너희같은 더러운 인간들에게 가실 분이 아니라고 거절합니다. 그는 “만왕의 왕”, “귀하신 몸”인데 어찌 감히 그런 외람된 소리를 하느냐고 그들 면전에서 문을 덜컥 닫아버립니다. 문을 잠그고 엄숙한 그리고 아름다운 예배를 드립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국가의 교회 모습입니다. 물론 여기서도 예외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급변하는 세계 대세가 격랑같이 수평선 위에 몰려오는데도 조개껍질 속에 둔갑한 패류들처럼 교회당 안에 도사리고 앉아 우리는 Fundamental이다 하며 아랫목에 보료깥고 장죽을 두들기며 “애햄”하던 양반행세만 하려는 교인이나 교회는 역사의 Keyman일 수가 없습니다.

열쇠가진 사람은 역사의 주인인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재빠르게 문을 열어야 할 때 열고 닫아야 할 때 닫아야 합니다.

우리가 한국의 소위 순수문학파 사람들처럼 순수교회를 지킨답시고, 모든 교인들이 직장과 교회당 사이를 맴돌면서 사회와 역사의 요청에 응하지 않는다면 일시 편할지는 몰라도 “사명”과 “소망”은 없습니다.

역사의 Keyman이라는 크리스찬이 자기 임무를 이탈할 때에는 크리스찬 아닌 세속인이 자기들 생각대로 역사의 열쇠를 뺏아 가질 것입니다.

현재 공산진영이 전세계의 절반 이상을 지배하게 된 것은 그 좋은 예의 하나라 하겠습니다. 한국에서도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회가 한국 역사의 권회에서 교회주의적으로 교회 안에만 농성해왔기 때문에 나라를 상실하기도 하고 나라가 다시 주어졌는데도 강대국들의 꼭두각시가 되고 독재자의 발등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Keyman이 시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3선개헌 때에도 교회는 유구무언으로 잠잠했습니다.

Keyman의 특권은 책임을 동반합니다.

크리스찬은 무정부주의자나 허무주의자가 아닙니다.

정치, 경제, 교육, 문화, 국제관계 등등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비판하며 결단하며, 도전하며 응답하며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고백입니다. “본직”이요, “여가”가 아닙니다. 선교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그것은 광대한 선교의 고장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1979년 2월 11일
토론토 연합교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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