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4일 목요일

[범용기 제5권] (27) 北美留記(북미유기) 第七年(제7년) 1980 – 장한 어머니

[범용기 제5권] (27) 北美留記(북미유기) 第七年(제7년) 1980 – 장한 어머니

5월 10일(토) - 토론토 한인회에서 주최한 ‘장한 어머니’ 표창식이 있었다. ‘인철’은 한인회 이사로서 ‘장한 어머니’ 추천위원회 위원장이었다.

우리 ‘할머니’와 그 밖에 몇 분이 추천되었다. 전체 회의에서 두 분이 뽑혔다. 우리 ‘할머니’도 둘 중 끼어서 당선됐다. 그래서 오늘 표창식과 축하잔치가 한인회관에서 열린다는 것이다.

‘상패’를 타고 축하연에서 터키치킨 디너를 먹고 사진도 여러장 찍었다. 인철ㆍ혜원은 물론이고 경용 식구도 참석해서 즐겼다.

연합교회 여신우회에서 할머니 여러분이 즐겁게 동참했다. 식이 끝나고 인철ㆍ혜원이 자기 집에서 가정적으로 축하연을 차렸다. 경용과 그 식구들도 동참했다.

5월 12일(일) - ‘어머니’ 주일로 연합교회에서 예배가 진행됐다.

김찬국 교수 동생 김화일 집사가 ‘장한 어머니’로 표창받은 ‘아내’와 어머니날 예배를 집례한 여신우회 간부들을 Brampton 자택에 초청하여 축하 디너를 차렸다.

나도 아내덕이랄 수는 없겠지만 같이 초청받아 하루저녁 즐겁게 지냈다. 아닌게 아니라, 아내의 마음은 깊다. 백두산 ‘천지’(天地)같이 깊어 재기 어렵다. 말은 없어도 생각은 있다. 학문은 없어도 경우는 바르다.

내가 열여덟살, 장가간 며칠 후에 내 외사촌 누님이 자기 앞에 나를 외따로 불러놓고 당부했다. “네 아내는 인물이 크다. 네가 얕보고 괄시하면 죄가 될거다. 젊잖게 대접해라……!”

역시 결혼 초기의일이다. 이건 꿈 얘기니까 싫없달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하느님이 꿈을 통하여 예표를 보여주시는 일도 평생에 몇 번은 있다고 믿는다. 그런 종류의 꿈은 언제까지나 잊어지지 않는다.

그 꿈은 이런 것이었다.

“창꼴집 앞에는 버드나무 숲이 배꾹 서 있다. 그 사이로 꽤 큰 물골이 흐른다. 물골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홍수에 밀려오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 사이로 막은 시내가 부딪치고, 뛰어넘고, 얕아지고, 깊어지고, 바위들과 싸우며 흘러가는 것이다.

나는 말을 타고 그 험한 바위 물골을 길인냥 거슬러 올라간다. 갓 시집온 신부인 아내가 말머리 옆에서 고삐를 잡고 조심조심 말을 이끈다. 견마드는 것이었다. 가는 우리집이 어딜가? 이 물골을 건너 저쪽언덕 절벽 3분지 2쯤 높이에 옆으로 뚫린 동굴이 보인다. ‘저게 우리 살집이오’, 꿈은 ‘우리집’이라는 동굴까지 못가고 깨였다.”

그후 그는 서울, 동경, 미국 등에 소위 유학을 한답시고 만 13년 동안 아내 볼 생각도 못했다. 아내는 혼자서 큰 집, 숱한 식구들 틈에 끼어 농사와 길쌈이란 중노동을 하며 ‘자활’(自活)했다. 어느 식구도 친척도 아내와 틀렸노라는 사람은 없다.

“구설에 오를 말은 입밖에 내지 마라!”, “욕은 ‘먹는’ 것이지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속담같은 말을 나는 아내에게서 몇 번이고 들었다.

일제 시대와 일제 말기, 해방 직후와 6.25동란, 환도와 그 직후 역사의 가장 어려운 고비에서도 식모나 유모 한 사람 둬 본 일이 없이 자녀 6남매를 탈없이 키웠다. 빚진 돈은 한푼도 없었다.

자기는 굶으면서도 남편이나 아이들 도시락은 남이 부러워할 정도로 후하게 싸준다.

6남매 자녀들 시집 장가 다 보내고 지금은 캐나다에 와서 ‘절벽의 동굴’인 ‘아파트’ 15층에 옆으로 드나들며 산다. 때로는 행복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80 평생에 내 살림이라곤 이게 처음이라오…….”

“서울, 평양, 용정 등에서도 ‘내집’이라는 걸 갖고 살지 않았소?”

“그거야 ‘하숙집’이었지 ‘내집’이었소?”

나는 아내가 이번에 여기서 ‘장한 어머니’로 뽑혀 표창받는 것이 ‘이유 없다’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싶어 老妻를 자랑했다.

자식 자랑은 절반 바보고, 아내 자랑은 완전바보라고 한다. 그러나 이건 내가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한인회에서 자랑스럽게 해주시니 ‘남편’도 그 수표에 ‘싸인’한 것 뿐이다.

인철ㆍ혜원 집에서 ‘어머니’ 축하만찬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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