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6일 목요일

[범용기 제4권] (57) 군정독재에서의 김대중은… - 壓死(압사)

[범용기 제4권] (57) 군정독재에서의 김대중은… - 壓死(압사)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종종 눈에 띄이는 – 일이지만 늙은이 축에 끼어도 억울하달 수 없을 오륙십대의 부인이 “거암”(巨岩)같은 체구를 의자 위에 싣고 있는 것을 본다. 얼굴은 그런데로 정상에 가까운데 턱 밑에는 턱이 한 둘 겹쳐 달렸다. 몸집은 보통인간의 네곱쯤 된달까? 어쨌든, 두리뭉실한 바위에 거북의 다리 같이 팔다리가 붙어 있다. 남자도 비슷한 뚱뚱보가 없지 않았지만 늙은 여자 쪽 비율이 놓은 것 같다.

나는 나의 빈약한 몸집을 대조시켜 본다. “사람의 값어치가 몸둥이 크고 작은데 있는 것은 아니다. 너무 크면 징그럽기만 하지” 하고 혼자 뇌인다. 그러나 그 다음 어쩐지 열등감 같은데 눌린다. “거인”과 “피그미”가 나란히 섰을 때, 아무리 겸손한 “거인”이라 해도 자기의 “거인의식”이 “피그미”에의 경멸로 흘러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장면을 상상해 본다. 내가 어느 공원 그늘 밑에 누워 자는데 저 여자의 둥구런 바위 고깃 덩어리가 살그머니 내 위에 걸터 앉는다면 나는 납작하게 터져 얇다란 방석같이 늘어질 것이다. 그런 나를 죽이려면 칼이고 총이고 쓸데 없겠다. 살그머니 걸터앉기만 하면 될 것 같다.

폭력이 해결하는 시대라면 그런 짓을 못할 바도 아니겠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대서, 문화니, 도덕이니, 종교니, 법이니, 요새 말대로는 “인권”이니 하는 정신운동이 몇 천년을 끈덕지게 이어온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사자가 풀을 먹고 어린애와 독사가 어울려 노는” 평화가 약속되는 것이라 하겠다.

사자나 호랑이도 아주 배고파 눈이 뒤집히지 않는 한, 사람에게 달려들지는 않는다고 한다. 가령 약한 짐승을 잡아 먹는다 해도 한번에 한 마리 정도로 그친다. 곳간에 쌓아두고 대대손손 먹으려는 욕심쟁이는 인간이란 “동물” 만의 습성일지도 모른다.

지금 본국은 남ㆍ북을 막론하고 폭력주의요, 법도 경우도 도덕도 인권도 뜻없는 “이방언어”가 된 것 같다. “금수”의 나라가 되었다. 전두환의 “광주학살” 같은 것은 “금수” 이하다. 금수도 제 족속을 소중히 여길 줄 안다. 놓아 기르는 말들을 보라. 밤에 잘때나 어떤 맹수의 침범이 있을 때에는 어린 것들과 약한 것들을 가운데 넣고 큰 것들이 머리를 안으로 모으고 원형을 친다.

소도 마찬가진데 그것들은 엉덩이를 안으로 모으고 대가리를 밖으로 한 원형 진을 치는 것이다. 말은 걷어차는 뒷발이 무기요 소는 뿔난 앞대가리가 무기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적은 약자애호, 새끼보호를 위한 무기로 사용된다. 무던히 “도덕적”이다. 그렇다면 전두환이 짐승 “이하”란 말이 헐뜯기 위한 욕설만은 아닌 것 같다.

폭력도 “힘”인데 힘이란 인간을 살리고 보호하기 위해 있는 것이고 인간을 압살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뚱뚱보는 비좁은 좌석에서 남보다 더 많은 공간을 점유한 데 대해 미안해야 한다. 권력자는 그 권력을 비인간, 부도덕, 불법 등등에 쓸까 스스로 두려워 제발 민주체제로 규제해 달라고 자원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동방예의의 나라”라면 그렇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요새 우리나라는 갑작스레 “야만”으로 곤두박질 했다. 좋게 말한다면 야만에게 포로가 됐다. 창피하다 못해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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