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목요일

[범용기 제3권] (25) ’74년 1.8 긴급조치 – 세 번째 자택 연금

[범용기 제3권] (25) ’74년 1.8 긴급조치 – 세 번째 자택 연금


1973년 12월 19일 재야원로 15인이 서명한 민주개헌 건의와 박정희와의 직접 면담 요청은 아무 회답 없는대로 해가 저물었다. 우리는 미처 몰랐지만 결국 1.8 긴급조치란 것이 그 대답이었던 모양이다. “체제 불가촉(타부)”이라는 절대주의가 폭력적인 강권발동으로 나타난다는 예고였다. 김종필이 말한대로였다. 긴급조치령이란 것은 ‘계엄령’의 별명인데 ‘계엄사령관’까지 대통령이 겸임한다는 것이 다르면 다른 것 뿐이다. 3권이 박정희 한 사람에 쥐어진다. 재판은 군법회의에서 군사재판으로 한다.

장준하, 백기완 등과 종교인 학생들이 아무 영장도 없이 체포 연행되어 변호사도 있으나 마나로 징역 10-15년의 중형에 처해진다. 김지하에게는 사형이 언도됐었다. 어떤 횡포에도 국민은 말을 못한다. “부비판 절대복종”만이 생존의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김지하’는 15인 선언 때, 장준하는 백만인 서명운동 때 마감으로 만남 셈이다. 김지하는 ‘구리 이순신’을 등사판으로 긁어 몇부를 내게 갖고 왔었다. 아마도 수유리 내 서재 어느 구석에 박혀 있을지도 모른다.

1974년 1월 9일 새벽에 신형사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24시간 꼭 모시고 있으래서 왔습니다.” 진짜, 그는 밤에도 안가고 내 옆에서 잘 모양이었다. 집에 아이들이 작은 사잇방에 이부라지를 펴주고 불도 떼어주고 해서 잘 자고 아침에 나갔다. 그러나 그에게 나를 ‘모시는’ 일 이외에 딴 업무가 주어진 것 같지는 않았다.

안에는 성북서 신형사가 와 있었지만, 밖에도 검정차가 둘이나 지키고 있었다. CIA와 CID라고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서는 없어졌다. 길옆 2층 다방에서 내려다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외출할 때면 짚차도 따라 나선다. 내가 주로 택시를 이용했기 때문에 뒤따르기가 편했던 것이다.

나는 아침에 부근 공동목욕탕에서 아침 목욕을 즐기는 버릇이 있다. 좀 더럽긴 하지만, 거품처럼 든 남의 때를 조리로 후려내면 꽤 깨끗해 보인다.

뜨거운 물에 목가지 담그고 땀 날 때까지 몸을 녹인다. 온 몸이 거듭난 것 같이 가볍고 개운해진다.

하루는 밖에서 나를 지키는 헌병사령부 사람이 책임상 자기도 목욕집가지 같이 가야겠다고 했다. 자기는 탈의실에서 기다리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라고 했다.

나는 그런 건 아랑곳 없이 몸녹이는 재미를 보고 있었다. 한참 후에 그도 욕탕에 들어왔다.

“왠 일이오?” 했더니 “암만해도 욕탕에서 누구와 밀담하는 것 같아서 따라들어왔습니다”한다.

내가 손녀 ‘명은’을 안고 이른 아침 산책을 하노라면 중간쯤에서 그가 나타나 같이 걷는다. “어떻게 여기서 만나게 됐는고?”하면 “박사님 신변을 보호해 드려야 하잖습니까!”한다.

사람이 늘 바뀐다. 이번에는 좀 험상궂은 얼굴이다. 그러나 맘성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저인들 좋아서 이러겠습니까? 박사님 죄송합니다. 애새끼들 먹여살릴려니 이런 죄스러운 일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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