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24일 목요일

[범용기 제2권] (99)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와 그의 ‘하야’ - 이승만의 부정선거와 4ㆍ19의거

[범용기 제2권] (99)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와 그의 ‘하야’ - 이승만의 부정선거와 4ㆍ19의거


이승만 박사의 야심은 자신의 종신대통령 유임에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두 임기 이상은 헌법이 허락지 않는다. 그는 헌법을 고쳐야 하게 됐다. 그래서 소위 ‘발췌개헌’을 단행했다. 그것도 시원치 않게 됐다. ‘4사5입’의 웃음거리가 됐다.

그는 선거자체를 마음대로 주무를 계획을 세웠다.

그는 자기를 무조건 지지하는 자기 정당을 만들었다. ‘자유당’이란 이름의 ‘도당’이다. ‘자유당’의 이승만이 아니라 이승만의 ‘자유당’이었다.

‘자유당’의 부정선거 계획은 이런 것이라고 동아일보에서 폭로했다.

① 자연기권표, 유령유권자표, 매수기권표를 모아 전유권자의 4할에 해당하는 표 수를 사전에 투표해 둔다.
② 자유당에 투표하기로 약속한 유권자를 3인조, 9인조로 편성하여 조장은 각 조원의 기표사항을 확인하고 투표지를 우선 자유당선거위원에게 보인 다음에 투표한다.
③ 자유당을 지지하는 유권자에게 완장을 두르게 하여 야당지지 유권자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함으로 자유당에의 투표수를 증가시킨다.
④ 민주당측 선거참관인을 매수한다. 매수할 수 없는 때는 무슨 구실을 만들어 개표소에서 축출한다.

내무부의 부정선거지령은 아래와 같다.

① 자유당 완장을 두른 사람들의 많은 수를 투표소에서 약 100미터 밖에 배치하여 선거분위기를 자유당 일색으로 한다.
② 투표함을 운반도상에서 바꿔챈다.
③ 개표때에 혼표 또는 환표한다.
④ 개표 종료 후에 투표집계를 조작 공표한다.
⑤ 자유당후보자의 득표 목표를 5대 1, 즉 80%로 한다.

이런 비밀 부정전술 아래서 정부는 다음해인 1960년 2월 3일에 제4대 대통령, 제5대 부통령선거를 3월 15일에 시행한다고 공포했다. 그럴듯한 선거공약을 내세웠다.

한편, 한국민주당(구파)의 조병옥파 ‘신파’의 장면이 대통령 지명에 대립됐다. 1959년 11월 26일에 민주당 지명대회가 강행되어 대통령 후보에 조병옥, 부통령 후보에 장면이 지명됐다.

그러나 조병옥이 미국 워싱톤 육군병원에서 병사하자, 3ㆍ15 선거는 맥이 빠졌다.

이승만 대통령 당선은 기정사실로 묵인하고 이승만이 지명한 이기붕 부통령 대신에 ‘장면’을 부통령으로 밀기로 했다.

1960년 3월 15일부터 정부기관과 자유당은 ‘장면’ 타도, ‘이기붕’ 당선을 강력 추진했다. 관권, 금력, 폭력, 매수, 그밖에 온갖 부정 수단을 동원하여 이미 예정된 결과를 거두려 했다.

야당 선거연설 집회에 참석하려는 대구고교 학생들을 학교 당국에서 금지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학교 당국에서는 일요등료 명령을 내렸다. 대구 고교생들은 이에 항의하여 ‘데모’에 나섰다.

“학원을 정권의 도구로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1960년 3월 8일 – 대전에서도 고교생들이 부정선거 규탄데모를 감행했다.

같은 날에 부산에서도 학생집회가 열렸다.

1960년 3월 13일 – 서울에서 학생들의 데모가 산발적으로 시행됐다.

1960년 3월 15일 – 3ㆍ15 선거의 날에 마산에서 대규모의 부정선거 반대데모가 벌어졌다. 오후 5시쯤에 ‘민주당’ 마산시 당관계자들이 ‘선거를 포기한다’고 고함치면서 시가를 돌았다. 군중이 그 선전차 앞에 모였다. 그것이 부정선거 규탄데모로 변모했다. 수만 군중이 경찰파출소, 자유당 마산시당부, 서울신문 마산지국, 자유당 간부들의 자택 등을 습격하고 파출소를 불태웠다.

당황한 경찰대는 데모대에 발포했다.

26명이 죽고 86명이 부상했다. 체포된 자는 220명이었다고 한다.

이 데모대는 주로 청소년, 행상인, 하급점원, 자동차운전조수, 식당뽀이, 구두닦이 등 하층시민급이었다. 평시에 피압박 감정과 분노가 폭동화한 것이었다.

1960년 3월 24일 – 부산에서 1000명 학생이 마산 경관들의 만행을 규탄하는 데모를 감행했다.

1960년 4월 11일 – 마산 데모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대로 바다에 던져졌던 ‘김주열’ 소년의 무참한 시체가 바다 위에 떠올랐다.

그것이 마산 시민과 전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1일에서 13일까지 마산은 계속 데모의 도가니가 됐다.

1960년 4월 14일 – 마산경찰 당국에서는 마산데모의 배후에 공산당의 손이 움직였다고 생각되므로 진상을 조사하는 중이라고 발표하여 시민들을 더욱 격분케 했다.

그 동안에 서울 학생들은 잠잠했다.

부산과 마산 학생과 시민들은 서울에 항의했다.

“서울 학생들은 썩었다. 민주운동은 시골서만 하는 것인줄 아느냐? 비겁하다. 독재정권에 붙어 출세나 하려는 거냐?”

이런 내용의 도전이 서울 학생들을 격분케 했다.

1960년 4월 18일 – 고려대학교 학생 3천명이 부정선거 무효를 부르짖으며 구보(驅步) 데모에 나섰다.

고대학생들의 선언에는

“마산학생들을 석방하라. 학원 자유를 보장하라. 기성세대는 불신한다. 최후까지 싸운다” 등등이었다.

그들은 2:30PM에 국회의사당 앞에 농성했다. 행진 중에 많은 학생이 연행됐다. 그들은 연행학생 석방과 폭행경관 처단을 내무장관에게 요구하면서 동시에 네가지 결의문을 발표했다.

“행정부는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라. 행정부는 더 이상 민족의 체면을 망치지 말고 무능정치, 부패정치, 야만정치, 독재정치, 몽둥이정치를 집어치워라. 등등.”

인촌(仁村) 김성수 선생의 “역사는 구원(久遠)하니 조급을 피하고 이성(理性)에 돌아가라” 한 유훈을 이철승이 인용하며 학생들의 해산을 권하자 학생들은 귀교의 길을 떠났다. 학생대열이 종로 4가 천일백화점 앞에 이르렀을 때, 그 부근에 잠복했던 정부 깡패들이 부삽, 갈구리, 벽돌, 몽둥이 등등으로 학생들을 급습, 난타하여 많은 학생들이 피를 길바닥에 쏟으며 쓰러졌다. 40명의 학생과 6명의 기자가 부상했다.

“경찰깡패들아 나오라!” 외치며 학생대열은 전진했다. 고대 교정에 모였을 때, 연행됐던 학생들도 다 돌아왔다.

유진오 총장은 학생들을 귀가시켰다.

이날 밤, 국무회의에서는 더욱 강경한 탄압책을 쓰기로 의결했다.

깡패 습격에 격분한 고교(高校) 학생들 이백여명이 데모에 나서 종로 4가를 거쳐 화신앞까지 행진했으나 경찰에 의해 저지됐다.

1960년 4월 19일

8:40PM, 대광고교생 일천여명이 거리에 나서 한떼는 서울대학 쪽, 한떼는 화신쪽으로 전진하는 중, 동성(東星) 고교생들도 합류했었으나 화신 앞에서 무술경관대에 의해 해산됐다.

9:30PM에 서울대학교가 동원되어 각 단과대학이 총출동 약 일만명이 10:30AM 종로로 집결, 경찰대와 탑동에서 충돌했으나 전진을 계속했다.

거기에 고대, 연대, 성대, 동대, 중대, 건대, 국민대, 경기대가 합세하여 태평로, 세종로 등 거리는 꽉 찼다. 시민들도 ‘학생만세’를 불렀다. 당국에서는 ‘이적행위’라고 야단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폭정이야말로 이적(利敵)이다”하는 플래카드가 쏟아져 나왔다.

“경향신문 복간하라”는 플래카드도 치켜든다.

데모데는 중앙청 방위진을 뚫고 경무대로 가는 대열과 법원으로 가는 부대, 그리고 이기붕 집으로 가는 부대의 셋으로 나뉘었다.

경무대행 데모대는 통의동 파출소 앞에서 경찰의 최루탄 공세로 한 명이 부상했고 대체로 전진이 중단됐다. 사대, 동성중고생 일대가 중앙청 뒷문까지 진출했으나 더 나아가지 못했다.

12시 20분

돈화문 방면에서 급파된 헌병 약 100명이 4대의 트럭에 분승되어 나타났다.

소방차들도 동원됐다. 그러나 학생들의 돌에 맞아 박살이 됐다.

데모데는 바리게이트를 뚫고 전진했다.

경찰은 광화문에서 경무대까지 다섯 고장의 방위선을 설정했다. 제1선 중앙청 뒷문, 제2선 국민대 앞, 제3선 효자동, 제4선 효자동 중간 경무대 앞까지, 제5선 경무대 정문, 경찰은 제4선을 사수선(死守線)으로 하고 원현 철조망을 친 바리게이트를 치고 있었다.

학생들은 이 선을 돌파했다.

1시 30분

경찰은 무차별 발포했다. 학생 5, 6십명이 총탄에 쓰러졌다. 격분한 학생들은 동료의 시체를 넘어 전진했다. 경찰이 던진 최루탄을 재빨리 주어 도루 경찰에 던지기도 했다. 경찰은 마치 적진이나 소사하는 것 같이 앞뒤 없이 기관총을 쏜다.

‘의대’생들은 흰옷을 입은채, 부상학생들을 병원에 날랐다. 경무대와 중앙청 뒷문 사이는 격전장으로 화했다.

학생들은 진명여고 앞까지 후퇴했다.

중고생들이 스크램 짜고 “낙동강아 잘 있거나, 우리는 전진한다…” 노래 부르며 행진했다.

2시 50분 PM

서울신문사와 반공회관이 탄다.

통의동 파출소가 부서지고 공문서가 바람에 날려 길가와 구렁창에 너저분하다.

파출소는 모조리 부서진다. ‘시경’에서도 발포했다.

시민들은 속담처럼 뇌인다.

“경향신문은 정부가 잡아먹고
서울신문은 민중이 잡아먹고….”

‘반공회관’이 탄다. ‘반공’이란 이름 붙은데는 모조리 때려 부순다. 이 정권의 ‘반공’이 얼마나 가짜 반공이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5시 PM

군대가 출동한다. 자녀를 찾으러 나온 학부형들은 저절로 ‘시민 데모데’가 된다.

7시 PM

비상계엄에 따르는 통금시간 싸이렌이 난다. 시민들은 많이 집으로 간다.

8시 지나자 탱크 소리가 요란했다.

조선일보 기자가 동대문서 잡혔는데 “나는 조선일보 기자다” 하고 기자로서의 취재자유를 주장하려 했단다.

“조선일보 기자? 흥, 이새끼!”하고서 쏴 죽이더라는 소식이 퍼졌다.

이날 밤, 서울 시내만도 52개소의 파출소가 부서졌다.

경찰이 자유당 앞잡이로 민원을 너무 샀다는 증거라 하겠다.

병원은 어디나 부상자로 초만원이다.

서울의 이날 밤은 조용했다. 군인이 입성했다. “군인이 학생을 쏠까?”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

18, 19일 이틀에 걸쳐 부산, 대구, 광주, 청주, 인천, 전주, 수원, 이리, 진주, 창령, 하동 등에서 학생과 시민이 함께 나서 데모했다.

마산 경찰 당국에서는 계속 공산당의 배후 조종설을 유포하려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1960년 4월 23일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발포명령을 내렸었지만, 직속부하들이 “어디를 향해 발포하리까?”하고 위협삼아 대드는 바람에 쑥 들어가 버렸다는 막후담도 새어 나왔다.

결국 송요찬은 23일에 아홉 대학교 학생대표들과의 간격없는 회담을 요청했다.

4월 25일

대학교수단이 시위했다.

5시 40분 PM

“학생들이 흘린 피에 보답하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258명의 교수들이 시가를 행진했다.

학생들은 교수님들 앞 뒤에 옆에 시위(侍衛)하며 함께 행진했다.

“선생님들 고맙습니다.”

시민들도 교수들의 행동에 감격과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거리는 박수의 홍수였다.

물론 교수들의 행동이 여기까지 이르기에는 넘어야 할 난관이 한 두 고비가 아니었다. 더러는 탈락했으나 그것은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교수들의 시국선언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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