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16일 수요일

[1898]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 1986년 10월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1986년 10월)

나는 내가 말하는 줄거리, 또는 논조의 마무리로서 거의 예외가 없을 정도로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들었습니다마는, 자세한 풀이를 한 일이 없었습니다. 풀이가 없어도 말 자체가 상식적으로 풀이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에서 ‘사랑’이란 낱말은 헬라어에서와 같이 에로스니 아가페니 필로스니 하는 여러 가지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에로스는 남녀간의 연애와 같이 서로 상대방을 내게 붙이려는 사랑이랍니다. 물론 남이 여를 점유하려면 남이 여의 것이 되고, 여가 남을 점유하려면 여가 남의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창조 질서의 신비가 작용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접착제입니다. 이때의 사랑은 아가페니 에로스니 하는 것을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예쁘다, 잘났다, 얌전하다, 사내답다 하는 등의 감정이 생기는 것은 에로스이겠지요. ‘저런 사람이 내 남편이었으면, 저런 아가씨가 내 아내라면 얼마나 행복하겠느냐’ 그래서 결혼까지 추진합니다. 결혼한 다음부터는 그런 에로스적인 것이 아가페로 성숙합니다. 남편이나 아내나 주체인 인격이기 때문에 강요나 강제는 금물입니다. 아가페 사랑이란 것은 나를 남에게 주려는 사랑이라고 합니다마는 받기 위해 주는 교역으로서의 사랑은 아니고, 그저 주기만 하는 것으로서 행복과 보람을 느끼는 사랑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같은 것이 그것이겠습니다.

정주(程朱)는 공자의 ‘인(仁)’을 주석하기를 ‘인자 애지리 심지덕(仁者愛之理心之德)’이라고 했는데, 보수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사랑을 의미한 것 같습니다. 유교에서는 부모 자식의 사랑에서 인을 연역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므로 비약은 없습니다. 박애는 무부 무군(無父 無君)의 무분별한 이적의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그리 크고 넓은 것이 못되기 때문에 인에서의 자기 평가부터 절하해 놓고 보는 것이겠습니다.

공자와 맹자는 모두 성선설을 주장했습니다. 인간 본성은 천명에서 받은 것이기 때문에 본래의 성품은 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원죄의 저주를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본성은 선한데 사회생활에서 욕심, 즉 소유욕이 싹터 자람으로 악이 창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다운 인간이 되려면 과욕의 수양부터 진지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교에 있어서 ‘학’을 한다는 것은 지식보다도 덕을 닦는 그것이었습니다. 말을 미끈하게 잘한다든지 표정이 정답고 사랑스럽다는 것은 문제 밖의 일입니다. 공교로운 말, 아리따운 얼굴에는 인이 드물다는 판단입니다. 빈부 귀천도 논할 바 못 된다 했습니다.

공자의 수제자 안회는 일찍 고인이 됐습니다만, 공자는 그에게 바통을 넘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무던히 가난했던 것 같습니다. ‘삼순구식(三旬九食)’을 했다니까 한 달에 아홉 번 식사를 하면 다행한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의폐(衣敝縕袍)’라 했으니 의복은 넝마 조각을 걸치고 다닌 모양이고, ‘재누항(在陋巷)’이라 했으니 요즘의 소위 빈민굴에서 기거한 모양입니다. 거지꼴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수달피 두루마기 입은 부자와 나란히 서서 담소하면서도 당당하여 부끄러워하지 않았답니다. 이런 안빈낙도의 태도를 공자는 칭찬한 것이었습니다. 진리애요, 탈속한 도와 인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공자는 인과 의와 예와 지를 제자 훈련의 요강으로 삼았는데, 의는 물론 바른 인간관계를 말하는 것이니 지금의 사회 정의 같은 것이겠고, 예는 인간을 공경하는 태도여서 ‘경’, 즉 인간에 대한 존경심, 인간 존엄을 의미한 것이겠습니다. 예는 법의 강요에 의한 인간 존경이 아니고, 사생활에서의 자기 결단에 의한 자발적인 인간 존경인 것입니다. 법치를 편중하는 힘의 국가에서는 ‘민면이무치(民免而無恥)’라 하였습니다. 법망만 교묘하게 뚫을 수 있으면 살인, 강도, 절도, 사기 등 흉악한 범죄를 감행하고서도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필요합니다. 동시에 종교의 설교 또는 설법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생명이 신자의 심장 속에서 치솟는 생명샘입니다. 샘터가 자기 가슴속에 있으니 다시는 목마르지 않습니다. 그것이 도덕적이니 거기에 죄악이 없습니다. 공의가 바다에 물 덮이듯 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에로스, 아가페, 필로스를 모두 갖춘 사랑 입니다. 인간을 예쁘게 봅니다. 더럽다, 밉다 하는 인간도 예쁘고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선과 악을 똑바로 구별하여 모두가 바르게 살기를 원합니다마는, 도둑놈도 양상군자라 하며 그 앞에서 절하고, 도와드리지 못한 것을 사과하며 수요품을 나눕니다.

이런 사랑의 범위를 넘어서 개인, 가정, 사회, 국가, 그리고 국제적으로 확충시키려는 것이 사랑의 공동체 운동입니다. 사람은 그 사람의 사랑하는 범위만큼밖에 위대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세계 인류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세계적 인물이 됩니다. 내 나라에 몸 바치면 그 나라의 위인이 됩니다. 그 나라를 구성한 민족은 그 나라의 민족사와 함께 그를 영원히 기억하고 숭앙하고 그의 뒤를 이으려 할 것입니다. 그는 그 민족의 역사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시아를 죽도록 사랑하면 우리 생명은 아시아의 사랑 속에서 살고 아시아는 우리 속에서 살 것입니다. 요컨대 내 사랑의 범위가 내 왕국의 영역입니다.

사랑은 고립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웃이 있습니다. 이웃이 없으면 이웃을 만듭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이웃을 만든 사람입니다. 내가 나라를 사랑하면 나라가 내 나라로 됩니다. 내가 동양을 사랑하면 동양이 내 동양이 됩니다. 내가 세계를 사랑하면 세계가 내 세계로 됩니다. 내가 전 우주를 사랑하면 전 우주가 내 우주로 됩니다.

지금 우주를 향해 숱한 로켓을 발사합니다. 그리고 우주 전쟁을 상상합니다. 우주를 개발한대도 우주 평화에는 흥미가 없고 우주 전쟁이라야 신이 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성을 그대로 갖고 사는 한 세계 평화는 가망이 없습니다. 전쟁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고 회담으로 이해 조절을 하는 것이 피차 유리하다 해서 국제연합이 생겼습니다.

국제연합은 국제적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힘은 미국과 소련이 갖고 있습니다. 국제연합이라는 공동체로서는 이 두 초강대국을 제재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자질구레한 소국간의 알력을 조정하는 정도입니다. 그래도 그런 국제 선(善)을 지향하는 공동체가 생겼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지금은 갓난아이 같지만 자라서 장부가 되면 범세계적 정부가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평화운동은 전쟁 선전보다 약세입니다. 그러나 그 바탕은 비교가 안될 만큼 다른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는 살리는 운동, 사랑의 운동이고, 그 운동의 기관은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사랑의 범위를 전 우주적으로 넓힐 때에 우리의 공동체는 우주적으로 넓어집니다. 그것이 땅 위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다른 하나는 죽인다는 위협에서 잠시 전쟁을 정지시키는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으로부터 났으며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일 4:7~8)

그런데 기독교 역사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빙자하여 살인하고 전쟁을 일으켜 그것을 ‘성전(聖戰)’이라 하고 전사자를 순교자같이 높이는 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한국 교회에서도 교회가 교권의 강함을 배경으로 인간의 양심선언을 유린하고 종교 재판에 걸고 성직을 박탈하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들에게는 돌이킬 생각도 없고 돌이킬 여지도 없는 것 같습니다. 교만으로 양심을 밀폐합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바른 믿음을 물려받은 진리의 전매특허자라는 거만과 무식 때문입니다. 정치적 독재자의 심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다른 모든 것이 있다고 해도 사랑만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믿음도 구제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단언했습니다. 몸을 주어 불사른대도 무물(無物)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다만 진행형인 것이 다를 뿐입니다. 우리는 이 길을 출발해서 이 경로를 달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완전이라는 목표 지점을 향하여 올림픽 경주자처럼 끝까지 달릴 뿐입니다.

우리가 세계적 사랑의 공동체, 더 나아가서는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구현하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친다면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며, 그 공동체 안에서 함께 영생할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될 것이 아니므로 장기전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중도에서 탈락하면 상보다도 경멸이 주어질 것입니다. 내가 누구다 하는 사람은 위험합니다. 그는 그 생각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니다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가 우리의 좌우명입니다.

댓글 1개:

  1. '스완송'이라는 말이 있다...

    죽기 전에 부르는 노래가 가장 아름답다는 의미... 아마도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고 정리하면서 부르는 노래이리라... 어쩌면 그만큼 처절한 노래가 어디 있을까?

    장공 김재준 목사의 글을 모아놓은 '김재준전집'의 마지막 권에 실려 있는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그가 일평생 삶으로 이야기한 '하나님의 나라'를 글로 정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면 다 해결되는데... 왜 그렇게 '사랑'이 힘들까?
    모든 사람이 바울의 사랑(고전 13장)을 가슴에 새기고... 성 프란시스의 '평화의 도구'에 감동을 받지만... 그것을 삶으로 연결시켜서 살아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아름다운 '스완송'이 진정 아름다운 '스완송'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이어받아서 계속 노래하는 사람들이 생겨야 한다.

    단순히 그 사람의 과거 삶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것에만 머문다면... '기념사업회'는 반쪽짜리일 것이다. 그 삶을 오늘의 사회에 운동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의 '몸의 부활'은 제자들의 '믿음의 확증'으로 열매를 맺었다...
    진정한 부활은 변화를 동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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