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16일 수요일

[1647]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 1983년 1월 16일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토론토 연합교회, 1983년 1월 16일)

기독교는 하향적인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하늘이 땅에 내려와 땅을 하늘의 영광으로 감싸주는 종교입니다. 땅, 즉 ‘지구’는 창조주 하나님이 특별히 꾸미신 아름다운 생명의 ‘낙원’입니다. 지금 우주 탐험에서 알아본 대로는 적어도 태양계에서는 생명이 이렇게 화려하고 풍요한 고장은 지구 이외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가장 낭만적이고 ‘시’와 노래로 찬양받는 ‘달’도 물 없는 바위와 돌의 광야여서 지구와는 비교도 안 되는 메마른 고장입니다.

하나님은 지구를 낙원으로, 하나님의 ‘정원’으로 설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낙원을 보호하고 개발할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지어 이 낙원을 그들에게 맡겼습니다. 인간은 이 낙원의 ‘소유자’가 아니라, ‘청지기(Steward)’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욕심을 부려서 자연을 보호하는 대신에 약탈했습니다. 지음받은 피조물의 찬양 노래 대신에 탐욕의 독소와 핵무기의 매연으로 하늘과 땅과 바다를 오염시켰습니다. 요새 공해 문제는 피조물 전부의 생존 문제로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지구라는 낙원에서 추방되는 경계선에까지 접근했습니다. 악한 ‘청지기’의 운명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죄악보다 큽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땅에 탄생하여 그의 속량 사랑으로 인간의 죄벌을 씻고 다시 지어 땅의 죄인을 하늘의 아들딸로 생명록이라는 하늘의 호적에 등록했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자녀 된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상실된 낙원인 이 땅을 하나님의 정원으로 회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사업이요, 비전입니다. 이것은 지구만이 아니라, 전 우주적인 스케일의 건설 사업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 행동과 생활을 이 한 서클 안에 통합하는 소망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자기는 그리스도의 죽으신, 십자가를 자기도 지고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려고, 다만 이 목표를 향하여 달리는 경주자”라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아직 미완성입니다. 나는 내 목표를 잡았다는 것도 아니고, 완전하게 됐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온몸을 앞으로 기울여 달려가는 것뿐입니다.”

그 목표, 그가 기 쓰고 달리는 그 종착점이 무어냐 하면,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의 완성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위로 향한 경주라고 했습니다만, 그것은 위와 아래와 왼쪽과 오른편, 동서남북에 모두 뻗친 통전(統全)된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서 거룩하게 일컬어지고 하나님 나라가 땅 위에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땅의 인간들이 하나님 자녀가 되고, 땅의 자연이 하나님의 동산으로 되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온 우주가 하나님의 영광의 장막으로 되게 하기 위해 오신 것이었다고 하겠습니다.

바울은 ‘율법과 복음’이란 유대교 관계를 중점 삼아 그리스도의 구원을 이해하려 하였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너무 ‘유대교적’인 결론도 섞였습니다. 그가 만일, 전 우주적인, 그리고 전 인류적인 종교와 사상과 온갖 문화를 이해하려 했더라면 그의 그리스도 이해도 끝없이 넓어졌을지 모르겠습니다. ‘우주적인 그리스도(Cosmic Christ)’ 이야기도 좀 더 분명하게 부각시킬 수 있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전 우주적인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이란 어떤 모습일까요?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의 찬가’를 읊었습니다.

“내가 사람의 언어와 천사의 말을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가 됩니다. 내가 예언의 능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모든 신비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리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비록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 주었다 하더라도 그리고 내 몸을 내주어 불사르게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유익이 없습니다…. 사랑은 영원합니다…….”

모든 것이 다가도 사랑은 영원하다고 바울은 사랑의 개가를 부릅니다. 이것은 사랑과, 다른 모든 ‘가치’와 상대시켜 비교하면서 어느 하나를 택하라는 것입니다. 썩어질 세상 영화를 버리고 영원한 생명을 택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땅에서의 인간 사랑은 그 실천과정에서 구체화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실생활에서는 있어야 할 것, 가져야 할 것, 그리고 내가 주어야 할 것 등 무던히도 많습니다. 사랑한다면서 주고 싶은 것을 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심각합니다. “금과 은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준다 … 일어나 걸어라!” 하고 베드로는 성전 길가에 평생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을 힘을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금과 은’이 불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 앉은뱅이는 걷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성한 사람입니다. 거지 노릇은 통하지 않습니다. 그는 ‘금과 은’을 벌어야 합니다. 정상적인 가정도 갖고 싶어집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사랑은 비교하는 선택가치가 아니라 종합 또는 ‘합일’하는 ‘완전’이라고. 예수님 말씀에 “하늘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비추어 주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6:43~48)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만이 아니라,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자연을 사랑하고, 서로 이웃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자기 이외의 인간은 모두 이웃입니다.

가톨릭 신부로서 세계적 과학자요, 인류학자요, 제일급 고고학자요, 종교학자요, 역사학자요, 문학자인 테이야르 드 샤르댕은 다윈의 환경론적 진화론을 탈출하여 생명 자체에 내재한 진화 의욕을 진화의 원동력으로 생각했답니다. 그 생명적 진화의 원동력은 사랑인데, 그것은 전 우주적인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는 길이요, 살리는 길이요, 그의 부활은 영원한 생명의 성취였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극치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무익하니라…….”가 아니라 하나님 사랑 안에서 몸이 영의 몸으로 변질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누스페어(Noosphere), 즉 정신계에서 영의 몸으로 변화하여 자유하는 것이겠습니다.

내 나라의 산천만이 아니라, 이 지구 위의 만물만이 아니라, 범우주적인 모든 존재를 사랑하여 한 공동체의식 안에 포괄하는 것입니다. 요새 소위 우주개발이 젊은 세대의 가슴 죄는 동경의 대상으로 되어갑니다. 그러나 사랑보다도 전쟁을 들쑤시는 데서 흥미를 돋웁니다. ‘우주 전쟁(Space War)’이지, ‘우주 평화(Space Peace)’가 아닙니다.

인간에게 창조주는 낙원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대로는 지구가 우주의 낙원입니다. 이 지구라는 낙원을 사랑한다면 함부로 원자탄, 수소탄을 던져 폭파시키고 새파랗게 맑은 하늘을 독약으로 오염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연은 살아 있는 생명입니다. 창조주의 영광입니다. 자연의 관리자인 인간이 사랑해 주기만 한다면 자연은 행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 숲은 농촌의 진주입니다.

우주의 어느 딴 성좌에 무엇이 사는지, 천사가 사는 삼층천이 있는지 아직은 모릅니다. 그러나 어디에 무엇이 어떻게 있든 간에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과 말씀의 작품임에는 틀림없겠습니다. 하나의 우주입니다. 그러기에 하나의 법칙에 지배됩니다. 만일에 간 데마다 딴 법칙에 지배된다면 로켓 발사도 우주여행도 있을 수 없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감싸 기르는 영광스런 하나로 된 우주입니다.

우리는 서커스단의 연출 무대를 봅니다. 코끼리, 호랑이, 사자, 돌고래, 강아지, 심지어는 뱀까지도 인간의 친구가 되어 인간에게 순응합니다. 새들도 인간과 합창합니다. 겁 많은 다람쥐도 사람 손에 올라앉아 모이를 먹습니다. 비둘기도 사슴과 사람과 동무합니다. 사람이 자기들을 사랑하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나라의 남과 북을 생각합니다. 힘센 딴 나라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38선을 그어놓고 우리 동족끼리를 부추겨 싸움을 붙입니다. 뭣 때문에 싸워야 하는가? 뭣 때문에 서로 원수같이 미워하는가? 그까짓 것 38선이야 있든 없든, 우리끼리는 서로 사랑하자, 우리 역사는 ‘사랑의 공동체’다 하고 욕지거리 대신에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조성을 호소한다면 그 ‘큰’ 테두리 안에서 인간 사랑이 인정이 되어 그립고,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젊은이들은 남남북녀든 남녀북남이든 결혼도 하고 싶을 것입니다.

이 큼직한 ‘비전’이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쩨쩨한 문제 갖고 옥신각신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전 우주에 적용되는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교회는 이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의 ‘거점’입니다. 전선기지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우주적인 사랑의 공동체란 뜻입니다.

바울은 “크리스찬이 별별 희한한 일을 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Nothing’이란 말입니다. 인간애, 동족애가 민주체제의 섬유요, 남북통일의 조직이라 하겠습니다. 그것이 오가면서 통일이란 피륙이 짜여져 나옵니다. 지금은 ‘인권’의 시대입니다. 미국의 카터는 인권을 들고 나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탐욕주의자들은 돈을 들고 나옵니다. 권력주의자들은 무기를 들고 나옵니다. 민주주의자들은 ‘민권’을 들고 데뷔합니다. 기독인들은 ‘하나님 형상인 인간의 존엄성’을 들고 행진합니다.

그러나 전 우주와 모든 피조물과 인간들과 천사들과 그밖에 또 무엇이 있다면 그것까지도 사랑으로 하나 되는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가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처럼 땅 위에 임하여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가 땅 위에 임하고, 하나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낙원이 회복되고, 영원한 생명이 거리에 생명 강으로 흐르고, 그리고 그리스도가 다시 오는 영광의 날일 것입니다.

그때에는 선민도 이방인도, 남자도 여자도, 종도 상전도, 공산주의자도 자본주의자도, 부자도 가난뱅이도, 남과 북도, 동과 서도, 야만과 문명인도 없습니다. 모두가 한 몸의 지체이고 모두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의 공동체에 합일된 ‘만유’입니다. 그때에도 만유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만유 안에 있어 우주 만유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통전됩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것의 모든 것(all in all)이 됩니다.

전 우주 만물이 사랑의 공동체 안에 감싸입니다. 우리는 이 우주를 경주장으로 하고 이 목표를 향하여 달음박질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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