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용기] (52) 미국 3년 – 강의환의 급서(急逝)
그런데 하루는 월요밤 늦게 와 보니 내 룸메이트 강의환 군이 안절부절 딩구는 것이었다. “웬일이냐?” 했더니 식중독인 것 같다면서 당장 오랜지 쥬스와 설사약을 사다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의예과 사년을 마친 사람이란 ‘크레딧’ 때문에 두말 없이 그대로 했다. 그는 점점 더했다. 계속 토하고 딩군다. 새로 한시었지만 나는 학교에 ‘비상사태’를 알리고 곧 의사를 청했다. 그는 끝까지 의사 청하는 걸 반대했다. 의사가 뭘 아느냐는 것이었다. 어쨌든, 학교에서도 나오고 의사도 왔다.
의사는 급성맹장염인데 너무 늦어서 터진지 오래고 복막염도 심하게 됐다고 한다. 당장 입원 수술해야 한대서 그리했다. 가는 즉시 수술했다. 중태지만 간혹 낫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튿날 그는 아프지 않다고 좋아했다. 의사도 경과가 생각보다 순조롭다고 했다. 그 날 밤에 이상한 말을 한다.
“내일은 온전히 나아 퇴원할테니 갈아입을 내복과 ‘와이샤츠’와 빨아 대려 놓은 양복 위 아래를 아침에 갖고와 달라”는 것이었다. 의복들이 ‘단스’ 속에 차근차근 정돈되 있었다.
이튿날 아침, 의복을 갖고 왔다. 그는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병원 대합실에 나 보러 왔다는 사람이 수십명인데 병원에서 들여놓지 않아 내게로 오지 못하고 있다”면서 “웬 사람이 저렇게 많은가”고 한다. 나는 헛소린줄 알고, 적당히 대답했다.
의사 간호원 4ㆍ5명이 종종걸음으로 강군 병사에 둘러싼다. 나도 같이 서 있었다. 강군을 피가 전부 곤두솟아서 귀, 눈, 입, 코 할것 없이 구멍마다 샘처럼 콸콸 내 뿜는다. 의사 간호원 모두 피투성이 된다. 그래도 까딱없이 그 피를 받아내고 씻어내며 엄숙하게 최후를 지켜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너무 끔찍스러울 거라”고 나를 나가라고 했다. 내가 물러난 지 삼분 쯤 되어서 ‘Passed away’라고 전했다.
유해는 장의사에게 건사했고 장례식 일체는 학교에서 맡았다. ‘켙소’ 교장 주례로 학교 ‘채플’에서 영결식이 있었다. 학생, 졸업생, 목사 등 약 이백명이 모여 애도해 주었다. 묘소에서도 교장이 하관식을 인도했다. 장지까지 자동차 사십 대가 따랐다. 외국학생의 애처러운 불행을 더 많이 위로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건 후일담이지만 그후 만 30년이 지난 1963년에 피쯔벅에 들러 성묘했다. 작은 비석이 아직도 그를 지키고 있다.
한주일이 지나 졸업식이 있었다. 피쯔벅 제일장로교회에서 거행됐다. ‘뺑귓’이니 ‘프로셋션’이니 상당히 거창했다.
강의환 군도 졸업생 명단에 있었다. 그의 졸업 논문은 내가 책으로 제본하여 학교에 제출했기 때문에 심사를 거쳐 그의 생전에 졸업이 결정된 것이었다.
임자 없는 졸업장이 졸업장함에 하나 남았다. 식이 끝난 다음 내가 찾아다가 그의 아버님은 ‘강두화’ 목사님께 보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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