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20일 월요일

[귀국이후] (9) [1716] 書(서)라는 것

[1716] 書(서)라는 것

글씨를 쓴다는 것은 역시 道(도)가 앞서고 技(기)가 따르는 것이라 하겠다.

옛어른들은 글씨 쓸 때 정좌하여 無念無想(무념무상)의 빈 마음으로 다시 말해서 虛心狀態(허심상태)를 첫째로 쳤다. 한번 잘써 보겠다든지 이정도면 누구만 못할 것 없다든지 하는 욕심이 앞서는 경우에는 애매한 종이만 버리게 된다. 전 精力(정력)을 붓끝에서 불타게 한다는 것이다.

글씨는 역시 中國(중국)이 本(본)고장이다. 가장 文化(문화)가 찬란했던 唐宋(당송) 시대를 비롯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바닥을 보인 적이 없다. 書道史(서도사)가 말하는대로는 書(서)의 歷史(역사)는 中國史(중국사)와 同伴(동반)한다. 甲骨文字(갑골문자) 이전에 벌서 墨(묵), 朱(주), 毛筆(모필) 등이 있어서 占卜(점복)을 위한 甲骨(갑골)에 글짜를 파넣기고 하고 木版(목판)이나 土器(토기)에 칼로 새기기도 했다. 帝王(제왕)의 德(덕)을 칭송하기 위하여 비석에 파 넣기도 하고 靑銅(청동)에 浮刻(부각)하기도 했다.

종이가 발명되자 書道(서도)는 부쩍 발달하여 “永”(영)자 기본획으로 分類(분류)되어 衛恒(위항 – 西晋사람)의 四體書勢(사체서세)가 定立(정립)되었다. 말하자면 古文(고문), 篆書(전서), 隸書(예서), 草書(초서)의 各異(각이)한 妙味(묘미)를 나타내었다는 것이다.

中國(중국)에서는 王羲之(왕희지)를 天下名筆(천하명필)이라 하지만, 그 밖에 唐初期(당초기)의 虞世南(우세남), 歐陽詢(구양순), 顔眞鄕(안진향) 등도 名筆(명필)로 친다. 褚遂良(저수량), 唐太宗(당태종), 唐高宗(당고종)의 皇后(황후)인 則天武后(측천무후)도 名筆(명필)이었고 玄宗(현종)도 독특한 名筆家(명필가)였다. 懷素(회소), 柳公權(유공권), 蘇軾(소식), 南宋中興(남송중흥)의 皇帝高宗(황제고종), 唐末帝(당말제) 徽宗(휘종)은 독특한 筆體(필체)를 남겼다. 文徵明(문징명), 董其昌(동기창) 등의 活達(활달)한 自由(자유), 何紹基(하소기)의 神奇(신기)한 筆體(필체) 등 들추려면 한정이 없다.

中國(중국)의 共産化(공산화)와 함께 六天年來(육천년래) 찬란하던 中華(중화)의 文明(문명)eh 雜草(잡초)같이 밟혔다. 書道(서도) 역시 후손없는 老爺(노야)의 신세였다.

現存中國(현존중국)의 代表的書藝家(대표적서예가) 于右任(우우임)은 憤然(분연) 臺灣(대만)에 亡命(망명)하여 歷代中國名筆(역대중국명필)의 傳統(전통)을 이었다. 그의 遺墨(유묵) 14輯(집)이 4凾(함)에 收錄(수록)되었고 그 밖에 약 4輯分(집분)이 별도로 인판(印版)되어 있다.

그의 親筆(친필) 글씨 數點(수점)은 전 대한일보 논설위원 許宇成(허우성) 先生(선생)이 家寶(가보)로 간직하고 있다.

書道(서도)에는 神筆(신필), 名筆(명필), 能筆(능필) 등의 平價階梯(평가계제)가 있다고 한다. 神筆(신필)은 古今(고금)을 통하여 몇 사람 안 되는데 王羲之(왕희지)를 첫째로 치고 우리나라에서는 金生(김생)을 꼽는다고 한다. 名筆(명필)에 드는 사람은 지금의 우리나라에도 많으나 神筆(신필)은 없으며, 古李承晩博士(고이승만박사) 글씨 같은 것은 能筆(능필)에 속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書(서)에는 楷書(해서), 行書(행서), 草書(초서), 篆書(전서), 隸書(예서) 등의 書體(서체)가 있다. 楷書(해서)가 基本(기본)이고 行書(행서)가 다음이다. 草書(초서), 篆書(전서), 隸書(예서) 등은 能熟(능숙)한 다음에 시도하는 것이 순서이다.

韓國(한국)의 書(서)로서는 傳說的(전설적)인 金生(김생), 肅宗(숙종) 때의 白下(백하) 尹淳(윤순), 中宗朝(중종조)의 韓錫琫(한석봉), 英祖朝(영조조)의 圓嶠(원교) 李匡師(이광사), 純祖(순조) 때의 秋史(추사) 金正喜(김정희)(院堂, 원당) 등이 高邁(고매)하며 邪氣(사기)가 없다고 한다. 院堂(원당)은 秋史體(추사체)라는 追從(추종)을 不許(불허)하는 自己體(자기체)를 이루었고 平壤(평양)에 訥人(눌인) 曹匡振(조광진), 全州(전주)에 蒼岩(창암) 李三晩(이삼만)이 있어 南(남)과 北(북)에 서로 빛났으며 高宗(고종) 때에 香壽(향수) 또는 夢人(몽인) 丁學敎(정학교)가 名聲(명성)이 높아 光化門(광화문) 등 많은 題額(제액)을 남겼다.

咸北(함북) 茂山郡守(무산군수)로 있던 白松(백송) 池昌翰은 中國(중국) 淸末(청말)의 何紹基體(하소기체)를 따랐다고 하는데 韓末(한말)의 色(색)다른 筆家(필가)라 하겠다. 畵(화)로서는 蟹(해)를 즐겼다. 大院君(대원군)도 有名(유명)한 書藝(서예)를 남겼다.

現存(현존)한 韓國書家(한국서가)로서는 孫在馨(손재형), 金顯正(김현정) 등과 그 밖에 많은 별들이 빛을 뿜고 있다. 古吳世昌翁(고오세창옹)은 隸書(예서)로 이름이 높다.

기독교界(계)에서는 金基昇(김기승) 씨가 거의 獨步(독보)하고 있는데 그는 書(서)에 自己體(자기체)를 形成(형성)했으며 肖像畵(초상화)에 섬세하다. 高宗皇帝(고종황제)의 肖像畵作家(초상화작가)로 畵壇(화단)에 데뷔했다고 들었다.

日本(일본)의 書道(서도)는 日本體(일본체)를 이루고 있으나 中國體(중국체)와 比肩(비견)할 바 못 되며 대체로 雄健味(웅건미)가 약한 것 같다. 佛門(불문)의 巨僧(거승)들이 남긴 巨筆(거필)이 있다. 한국에서도 佛門(불문)에 名筆(명필)들이 있었다.

최근에 한국에서는 女流書藝家(여류서예가)들이 頭角(두각)을 나타내려 한다. 申師任堂(신사임당)의 傳說(전설)도 바르게 이어져야 할 것이므로 기쁜 소문이 아닐 수 없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