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27일 수요일

[1770] 3ㆍ1정신의 어제와 오늘

[1770] 3ㆍ1정신의 어제와 오늘

3.1 정신이란 것은 무엇보다도 독립정신이다. 3.1 “독립선언서”로 되어 있다. 독립을 시켜 달리는 것이 아니라, 수천년 전부터 독립되어 있는 나라임을 선언한 것이다. 이 독립국가인 조선은 자주하는 조선민족의 나라임을 다시 中外에 선포하노라 했다.

“독립”이란 것은 “혼자 선다”는 뜻인데 그것은 남의 나라에 의존하거나 예속하지 않는디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나라의 “주체성”을 확보한다는 뜻이겠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아무도 혼자서 살 수는 없다. “나라”도 국제적인 상호 관계에서만 설 수 있고 살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독립”은 고립(孤立)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기미독립선언”도 한국의 독립도 中外에 선포하여 세계만방에 고함으로써 모두가 이해하고 협조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Independent”는 Inter-dependent 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이 선언에서는 시대의 風潮를 새로운 각도에서 예견했다. 지금까지의 국제적 국가적 Ethos는 生物(動物)계의 자연질서를 표준으로 한 찰스ㆍ다윈의 약육강식, 적자생존, 자연도태 등 법칙을 인간관계에까지 적용하여 서구 강대국들의 침략근성을 합리화 했었다. 일본의 한국 병탐도 그 “라인”에서 스스로를 당연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물적이요 人間的은 아니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힘, 즉 폭력보다도 도의(윤리)가 앞서는 것이며 전략보다도 앞서는 것이다.

다윈은 인간 생활을 금수생활로 추락시켰으며 友愛의 인간 관계를 人相食의 맹수 생활로 변질시켰다. 서구의 소위 선진국가들의 동양, 아주, 중남미 등에 대한 식민지 확장과 점유는 이런 철학에서 감행된 것이었다. 한국보다 약 50년 앞서 서양문명을 받아들인 일본은 그것을 기화로 한국을 침략하여 국권을 강탈하고 총칼로 우리 민족을 탄압했다.

그래서 나라는 없어졌으나 민족은 살아 있었고 그 민족생명은 지하에서 분출(噴出)하는 것이었다. 3.1 운동은 그런 현상의 하나였던 것이다.

3.1 독립선언은 그런 민족생명의 폭발적인 분출 현상이었다.

때는 제1차 대전이 종식되고 빠리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ㆍ윌슨의 주재하에 강화조약이 체결되려는 무렵이었다.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다. 국토의 대소나 민족의 강약을 막론하고 어떤 민족이든간에 자기들의 민족국가를 형성하고 독립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세계적인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동경 유학생들이 우선 독립 선언문을 발표했고 본국에서는 각 종교 대표 33인이 민족대표로서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것은 첫째 외세의존이 아니냐 하고 말할지 모르지만 “의존”이 아니라 외세를 “이용”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interdependent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었다.

둘째로 국제관계에서의 종래의 폭력주의적 침략 행위를 과거의 부끄러운 유물로 청산하고 새로운 국제적 “도의세계”의 도래 (到來)를 선언한 것이었다. 이것은 새 세계의 道로서의, 국제적 새 가치 기준을 설정한 것이었으며, 예언자적인 외침이었다. 도의 없는 정치는 깡패 정치요 도의 없는 사회는 강도 절도의 소굴이다. 이것은 “진리”다. 침략자인 일본에 대해서까지도 이 진리 운동에 동조하라는 의미에서 용서와 이웃 사랑을 먼저 통고 했었다. 3.1선언의 “도의”는 그 실천에 있어서 “비폭력ㆍ불타협”이었다. 우리보다 5년 후에 인도의 간디가 “비폭력ㆍ불타협”의 “진리 파지(把持)로 대영제국에 항거하여 오랜 투쟁끝에 독립을 쟁취했지만, 그가 우리의 3. 1 선언에서 힌트를 얻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적어도 참고는 되었을 것이 아닐까 싶어진다. 어쨌든 3. 1정신이 진리의 외침인 것은 사실이나 여러가지 여건 때문에 “파지”가 철저하지 못했던 것은 유감이다. 33인 中 국내에서 끝까지 “파지”한 분이 있다면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일지 모르겠다.

국내 민중레벨에서 3.1 선언을 외치고 희생된 분들은 백만 단위였다고 한다. (朴殷植 獨立血史)

이 국내에서 못하는 것을 국외에서 한다는 의미에서 상해에 임시정부가 서고 하와이, 북미주, 중국, 만주, 노령 등 광범한 지역에 산재한 교포들을 기반으로 독립 운동은 확산되었고 그 연줄로 세계화했다. 어쨌든 3.1 정신은 지역적으로 국내외 경제적으로 빈과부, 연령층으로 노년, 중년, 청년, 직업별로, 사ㆍ농ㆍ공ㆍ상ㆍ명분 사회적으로 양반, 천민, 기민, 종교적으로 천도교, 불교, 기독교 등이 진짜 한 폼이 되어 전국에 퍼졌다. 극성스런 일경의 눈도 이것을 탐지할 수 없었다.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은 반드시 비폭력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이승만 박사는 주로 외교에 의한 독립쟁취를 주장했었다. 주요 외교대상국은 미국이라 하여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 내무부장, 국무총리, 대통령대행, 대통령 등을 역임하면서, 독립운동에 있어서 우리민족 성격의 헛점을 뼈저리게 느끼셨다. 그래서 스스로 민족개조론을 발표하고 무실, 역행(力行), 신의, 용기를 강령으로 한 장기적인 민족 개조, 개인적 개조 운동을 벌였다. 그것이 일제시대의 國內 “수양동우회”였고 해외에서는 처음부터 “홍사단”이었다. 일제말기에 국내에 들어와 절대적인 국민적 환영을 받았으나 일제의 손에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고 빈사상태에서 가출옥되어 무리한 전국순회 끝에 逝去하여 고국 흙에 묻히셨다. 그는 폭력 혁명가가 아니었다. “도의 민족”으로서의 민족성격 개조를 위한 민족의 교육자요 민족의 선생님이었다. 그는 3.1운동의 주축을 이룬 핵심지도자였으나 “정권”에서는 담담했고 다만 애국애족의 빛이었고 그 빛의 등대였고 빛의 원천이었다. 그는 도의적인 3.1운동 지도자였다. 도산선생 전기로서는 주요한씨의 도산 전기가 있고 국외에서 발간된 한승인씨의 “도산 안창호전”이 있는데 후자가 그 결정판이라 하겠다. 한승인 선생은 본국 서대문 감옥에서 흥사단 사건으로 2년 동안 한방에 도산을 모시고 있었다는 인연도 있고 해서 마음으로 통하는 친교가 있었으며, 그의 도산에 대한 존경과 신임은 대단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 다음에는 도산이다”했다.

그러나 3.1운동은 진행형이다. 계속 생성하고 발전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정화된 우리 민족생명의 주요한 흐름이 되려면,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생명은 정체하지 않는다. 샘줄기 없는 갇힌 물은 썩는다. 우리의 민족생명은 구석기 시대로부터 면면(綿綿)히 솟구치는 생명의 샘터를 갖고 있다. “한” 민족 고유의, 그리고 특유의 문화를 창안했고 그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일본 문화는 한국문화의 연장에서 이루어졌다. 일본이 서양문명 - 살벌한 침략문명을 몇 십년 앞서 받아들였노라 해서 한국과 한국민족을 함부로 다룬 것은 일본의 깊이 없는 오산이었다. 더군다나 중국을 먹겠다는 것은 뱀이 황소를 삼키려는 것과 같다. 설사 삼킬 수 있었더라도 배가 터져 죽었을 것이다.

3.1 정신은 그런 것을 일본에 충고한 것이었는데 그 교만한 소년은 제 고집대로 밀고 나갔다. 그래서 결국에는 맥아더 앞에서 무조건 항복하고 “천황”의 인간선언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뱀은 두들겨 맞아 죽은 것 같다가도 되살아난다. 아주 죽여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인데 맥아더는 그렇게까지 잔인하지 못했다. 그래서 뱀은 되살아나서 지금은 미국의 경쟁자가 되기까지 했다. 일본은 나면서부터 침략자다. 섬나라기 때문에 그렇게 되기 쉽다. 유럽에도 해적(vike)이 세운 나라가 많다. 그러나 그 나라들은 기독교라는 속죄 사랑의 종교가 受納되어 인존엄과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일본에는 기독교 복음이 없었으며, 있어도 그 지대가 박토 구실밖에 못했다. 천황중심의 가족국가 형태에서 국가 이기주의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지금 이후에도 일본의 회개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3.1정신은 도의적 종교적 입장에서 정의와 사랑의 질서를 일본에 권했으며 지금도 그것을 계속한다. 한국교회는 재일본 교포 사회에 기독교를 전할 뿐 아니라, 한국 인권문제 등에서 일본 기독교 지도자들로 조직된 한국문제 긴급회의와 긴밀한 연락을 갖고 있다.

3.1 정신과 그 운동은 한일 관계에 절대 필요한 정신이다. 그것이 한일관계의 호혜정신과 선린시장과 평화 관계를 증진하는 도의질서의 구현 방향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본이 기독교 국가로 변질되기를 기약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침략적 군국주의를 완화시킬 수는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한일 관계에 있어서도 3.1 정신이 승리할 것으로 생각된다.

현역사 단계에 있어서 우리는 분단된 국토와 분립된 국민, 그리고 두 초 강대국의 운명적인 영향하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진정한 독립국가가 아닌 종속적이며 경제도 종속 경제다.

우리는 위에서 일본과의 관계를 경계했지만, 미국과 소련과 남한과 북한, 그리고 중공 등과의 국제 관계가 미묘하다. 자칫 잘못하면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그들 이익을 위한 바둑판이나 바둑돌이 되든지, 심지어는 그들 전쟁의 격전장이 되고 그들 군대의 용병제공자가 될런지 모를 형편이다.

그 틈을 타서 일본의 한반도 진출이 재현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우리가 미국과 일본을 도외시 할 수도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3.1 정신의 “인터디펜던스”를 더욱 강조해야 할 것이다. 요는 우리의 주체의식 여하에 달려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런 “도의” 운운은 무지개 같은 꿈이다. 현실의 모든 사건은 국가 이익에서 좌우된다. 차관에 차관을 더하더라도 능률적인 현대 기계를 도입하고 첨단기술을 습득하여 경제적 풍요사회와 정치안정, 이북과의 경쟁에서의 승리 등등을 달성하는 것이 선결문제다. 과학 기술학적 실리주의가 무엇보다도 우선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잘못이랄 수는 없겠다. 그러나 문제는 그 과실의 처분에 있다. 합리적인 생산이 적정하게 분배되어야 하며 기업주와 노무자가 공생하는 윤리가 실천되어야 한다. 탐욕경제와 부패부정은 일체양면이다. 절대권력은 절대부패를 낳는다.

3.1 정신은 그런 방향이 아니었다. 강권주의 배격과 도의 세계의 도입, 그리고 모든 국가 민족의 자유, 자주, 자립과 정의, 평화, 애족, 애린의 가치기준을 전 세계의 새 질서로 수립하려는 선언이었다. 그러므로 특히 무법 불법의 기류속에 도의의 생명을 유통시키고 탐욕과 전쟁의 분위기 속에 용서와 평화를 주입하는 3.1 정신을 역사의 근간으로 삼아야 한다. 그것이 도산선생의 염원이었고 3.1운동의 불멸의 맥박이다.

1985. 3.2. 흥사단 본부 3.1 기념식에서


1985년 3월 5일 - 이호빈(李浩彬) 목사가 창립한 중앙신학교가 지금은 사회복지대학으로 확장되어 한 종합대학으로 발전하는 도중에 있다. 중앙신학교는 거기에 흡수되어 한 학과로 남았지만, 그 근원은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교목실을 두고 교목실장 이하 삼사명의 교목 겸 교수가 교목사업을 돕고 있다.

교목실장은 심일섭 목사 겸 박사고 그 밖에 교목실장과 협력하여 교목사업을 돕는 교수와 직원 4, 5명이 한 “팀”이 되어 학원복음화에 성의를 다하고 있다. 모두 한신동문들이다. 학장은 법학박사로서 법조계의 원로며 서울대, 고대 등 법과 교수 또는 학장, 부총장 등으로 30여년 교육에 헌신한 분이라 했다. 중후하고 유덕한 어른다운 분이라는 인상을 준다. 오늘은 천여명을 상대로 “오리엔테이션” 즉 학교 소개하는 날인데 이 학교의 연원(淵源)이 기독교인 관계로 신입생들에게 지성과 신앙의 불가분적 관계를 납득시키려는 의도로 모인 것이었다. 학장이 개회선언을 했지만 심일섭 교목실장이 사회한다. 학생들의 예배출석은 각자의 카아드에 기록되고 학점 취득에 계산된다.

오늘 모인 천여명 신입생 중에 신자는 극소수에 불과하고 교회관계도 없는 학생이 거의 전부라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정을 미리 짐작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호빈 목사의 “중앙신학교” 만을 염두에 두고 강연을 준비했던 것이다. 그래서 또 한번 촛점 어긴 사진이 되었다. 너무 어렵고 길었다.

오후의 신앙 강연은 10분이라는 주어진 시간에 맞춰 허물없이 했다. 효과적이었다고들 한다.

다음 프로는 학장의 학사지시 중심으로 진행시키고 있었다. 교목실장과 관계교수들은 나를 인도하여 퇴장 - 꽤 멀리 떨어져 있는 관광호텔식당에서 한식을 대접받고 학교 차로 우이동에 직행했다. 교목실에 앉아 있는 동안에 글씨 3, 4點 요청하는대로 써 드렸다. 지필묵은 벌써부터 준비되어 있었다.

사회복지대학의 캠퍼스는 四面에 푸른언덕 또는 산이 둥그렇게 돌려막은 안온한 분지(益地)여서 업구도 출구도 노출되지 않는 고장이었다.

오염 안된 샘물이 작은 시내가 되어 골짜기를 흐른다. 마실 물은 골짜기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약수다. 오염을 모르는 仙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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