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26일 화요일

[1238] 한국근대사에 있어서의 3ㆍ1운동의 위치

[1238] 한국근대사에 있어서의 3ㆍ1운동의 위치

1919년 3월 1일 운동은 결코 우발적 또는 일부 인텔리층의 울분 발산현상이 아니었으며 또는 그 당시 일본인들이 선전하던 “경거망동”, “부화뇌동” 등의 “몰지각”한 소란이 아니었다는 것부터 밝힐 필요가 있다.

3.1운동의 목적은 1909년에 일본에 강제 합방된 한국이 일본 통치권에서 벗어나 자주 자유하는 독립된 민주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데 있었다.

우선 이 운동이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성질의 것이 아니라, 장강(長江)같이 길고 먼 데서부터 흘러왔다는 것부터 말해야 하겠다. 파리강화회의에서의 윌슨 미국대통령의 민족자결 주장은 우리 유구한 민족운동의 대하(大河)가 그 시점(時点)에서 절벽을 내리쏟는 폭포가 된 것 뿐이요 그것이 시발점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우리나라 5천년 역사를 여기서 다 더듬을 수는 없으나 적어도 이조 중엽 임진왜란 무렵부터는 대강 살펴야 할 것 같다.

돌이켜 볼 때, 고조선 삼국시대에 고구려는 중국과 대결할 정도의 실력을 갖고, 그 영토도 요동 반도에서부터 만주 전체와 연해주의 일부, 한반도의 거의 전부에 미쳤었다. 그러나 신라의 연당멸고(聯唐滅高) 정책에서 당나라의 반도침략의 길이 열렸고 그 덕분에 고구려는 망하고 소위 “통일신라”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신라의 통일은 그리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외세를 업고 동족을 잔멸했다는 것도 그리 떳떳한 윤리가 아니었지만, 고구려 멸망 후 신라에게 주어진 영토란, 지금의 경기 이남과 서쪽으로 황해도 평안남도, 그리고 평안북도의 일부와 함경남도의 일부를 통치한 것 뿐이었다. 고구려의 광대한 영역인 만주전역은 고스란히 당나라에 내주고 말았다. 돌아오는 길에 신라까지 먹어버리려던 당나라의 야심을 꺽고 그 만큼의 영토라도 보전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면 있을 것이다.

그 때부터 우리나라는 중국의 변두리 나라로 되고 우리 임군은 중국 천자(天子)의 번신(藩臣)이 되었다.

“왕건”이 통일신라를 이어 고려왕조를 세우고, 송도 즉 개성에 도읍하여 여진, 거란 등 북방민족과 대결하면서 함경도 지방을 개척하기 시작했으나 함경남도 북청 정도까지가 고작이었던 것같다.

고려왕조도 물론 중국의 산하에서 임군노릇을 했으며 특히 말기의 원(元)나라와의 관계는 정략적인 인척관계에 조종되어 나라의 위신을 지키기 어려웠다.

이런 판국에 이태조가 이씨조선을 세웠기 때문에 그는 중국 천자가 “이신벌군”(以臣伐君)을 이유로 자기의 왕권을 인허하지 않을까 싶어 몹시 초조해했다. 그러니 만큼 그의 중국에 대한 태도는 비굴했다고 할까? 어쨌든 인허를 간청하는 글에서 천한 “신하”로 자칭했다. 이것을 반드시 “사대주의” 랄 수는 없을지 몰라도 주권국가로서 기분좋은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강대국들 틈비구니에서 작은 나라가 독립성을 유지하려면 “적응하면서 항거한다”는 양면작전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슬픈 고충이라 하겠다.

어쨌든, 중국은 이씨 조선으로부터 “칭신”(稱臣)의 예를 받고 “대국”으로서의 “명분”을 세운 것으로 그쳤으며, 일정한 시기에 조공물(朝貢物)을 받치고 배알(拜謁)의 예를 지키기만 하면 그리 악착같이 들볶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씨 왕조에 있어서는 임진왜란을 위시하여 일본의 침략이 더 큰 문제로 등장하는 것이었다. 특히 청ㆍ일, 러ㆍ일전쟁 이후의 일본은 한국침략을 급속도로 추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집권층인 양반계급은 구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국정쇄신의 기회를 번번히 놓치는 것이었다. 그 반면에 민중의 신문화 수입과 애국열정은 반비례적으로 강화되었으며, 특히 실학사상에 의한 민중의식의 계발은 장차 정치, 경제, 문화 등등에 활력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 무렵, 서양의 제국주의 세력이 동양에 뻗치면서 중국은 분할점령의 위기에까지 몰려 들었다. 다만, 일본만은 1853년에 문호를 개방하고 서구 문명을 수입하여 재빨리 “근대화”에 성공하였고 소위 “명치유신”이라는 획기적인 역사변혁을 해치운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동양침략” 야심은 불타 올랐다. 임진왜란 때의 실패를 만회하는 것은 바로 이 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준비 과정에서 우선 조선반도를 손에 넣어야 한다는 열의에 뜨거워졌다. 그것은 한반도가 동양의 대륙 지배를 위한 칼자루 같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일본만이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도 마찬가지였기에 한반도는 중국, 미국, 러시아 일본 동등 여러 강대국들의 정치, 외교의 소용돌이 되었다.

그런데 주인인 한국정부는 너무 약세였다. 국내적으로 12세의 어린 “고종”이 무후한 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고종의 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섭정의 자리에 있는 조대비를 조종하여 실권을 장악하고 안동김씨의 세도정권에 대결하여 왕권강화에 전력했다.

대원군은 중국이 서구 제국주의 침략에 희생되는 현실을 보고, 중국보다 비교도 안될 만큼 소국인 우리 나라가 서양 제국주의자들에게 먹힐 것은 뻔한 일이니 그럴 바에는 아예 그들을 들여놓지 않아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쇄국주의를 단행했다. 그러나 이것은 소극적인 일시 모면이지, 적극적인 국가대계랄 수는 없는 것이었다. 대원군은, 서양문명을 재빨리 받아들이므로 강국의 반열에 든 일본도 양이(洋夷) 즉 “서양뙤놈”의 한패거리로 인정하여 도맷금으로 배척하고 일본의 지혜를 배우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원군의 국내에서의 개혁정책 단행에는 그 나름대로의 통쾌한 데가 있다.

안동김씨네 세도정치를 꺾고, 당쟁의 거점인 600여개 “서원”들 중에서 47개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철폐하고 지방색을 타파하고 통화제도와 세금제도를 평준화하고 군대를 개편하여 신식으로 훈련하는 등등은 영웅적인 용단이 아닐 수 없다 하겠다.

그런데 외척의 세도정치를 말살하기 위하여 인척관계가 가장 약세라고 보이는 “민비”를 간택하여 고종의 왕비로 삼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민비”의 종횡무진한 정치수단에 대원군 자신이 실각했다는 사실과, 안동김씨네를 대신하여 민씨네가 세도정치 무대에 등장했다는 사실 등등은 “아이로니”가 아닐 수 없다.

결국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그물코가 찢어지고 한때는 중국에 유폐되는 일까지 있었다.

민비는 일본의 침략세력을 제압하기 위하여 러시아 세력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런 정치 게임 때문에 일본의 한반도 침략은 더욱 가속도적이 되어갔다.

1882년 이래 일본 세력의 침투에 대결하여 청국도 한국에서의 정치, 경제 등의 특권을 증대시켰다.

이런 외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가의 자주독립을 확립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개화운동, 다시 말해서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의 개화세력이 1884년에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궁궐안 혁명이어서 국민적인 기반이 정립되지 못했기 때문에 청ㆍ일의 농락과 한국 수구파의 반동으로 좌절되었다.

이런 불안 가운데서 농업국가언 한국의 농촌은 황폐해졌고, 그와 동시에 양반층의 세력 유지를 위한 농민 착취는 더욱 가혹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1894년에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자랑스럽고 통쾌한 “동학혁명”이 일어났다.

동학혁명의 총수(總帥)인 전봉준 장군의 성명에 의하면, “① 동학도는 정부와 협력하여 서정쇄신에 적극 협력할 것. ② 탐관오리를 숙청한다. ③ 횡포한 부자들을 처벌한다. ④ 불량한 유림과 양반들을 처벌한다. ⑤ 노비를 해방한다. ⑥ 각종 천민에 대한 대우를 개선한다. ⑦ 과부들의 재혼을 인정한다. ⑧ 명목 없는 집세를 폐지한다. ⑨ 인재등용에 문벌을 개업시키지 않는다. ⑩ 일본과 내통하는 자를 엄벌한다. ⑪ 공사채 문서를 일체 무효로 돌린다. ⑫ 토지는 균동 분작하게 한다” 등등이다.

이 혁명 강령을 보면, 1884년의 갑신정변, 즉 김옥균, 박영효 등의 혁명과는 다르다. 즉 갑신정변은 위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민중과는 유리된 궁궐안 혁명이었으나 1894년의 동학혁명은 민중이 궐기 주도한 민중의 운동이다. 그 목적은 평등시장에 의한 정치적 경제적 민본주의 체제의 도입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운동이 농민의 성원을 얻을 것은 물론이다. 단시일 안에 전투태세와 능력을 갖춘 “혁명군”이 편성되어 서울 이남의 거의 전지역을 휩쓸었다. 그들은 민정기관을 설치하여 위에 말한 개혁안을 착착 실현하였다.

이제는 서울에 진격하기 위하여 공주에 본영을 두고 정예부대를 훈련시키고 있었다. 당황한 한국정부는 “국군”을 동원시켰으나 도중에서 도망쳐 버린다. 결국 외국군의 출동을 요청했다. 일본과 청국은 때가 왔다고 최신무기로 장비된 정예부대의 여단병력을 동원했다.

전봉준 장군과 그의 농민군은 구식 화승총과 곤봉, 낫, 도끼 등을 들고 최후의 일각까지 일본군에 항전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전봉준 장군은 잡혀 늠름하게 처형되고 흩어진 동학군의 대부분은 후일에 의병대에 들어 끝까지 일본 침략에 항전했다.

동학혁명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국내적으로 서정을 쇄신하면서 국제적으로 외세를 몰아내고 진정한 근대민족 국가를 건설하자는 민병운동이었다. 그러므로 그 당시 한국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탈취하자는 것보다도 현정권이 민중을 위하는 좋은 정부로 개선되어 외세에 농락되지 않는 독립국가로 정립되기를 원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정부가 수립된다면 중국으로서의 한국 지배에도 차질이 올 것이므로 원세개는 중국군대를 상륙시켜 서울을 방위하게 하였다. 이것이 한반도를 독점하기 위한 청ㆍ일 각축전적인 청일전쟁의 유발점이 되었다.

1985년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요동반도를 청국으로부터 항양받았었으나 소위 삼국간섭 (로, 불, 독)으로 도로 내놓게 되었다. 일본은 분했다. 그 분풀이를 위해 앙심을 먹고 전쟁준비에 눈이 파래졌다. 동시에 장차 오고야 말 러ㆍ일전쟁의 교두보격인 한국을 점령하려는 욕심은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한국 정부에서도 자기 나름대로의 개화운동을 촉진시켰다. 과거제도의 폐지, 신분제도 폐지, 고문과 연좌처벌 폐지, 조혼의 금기, 괴부의 재가 허용 등등이 그것이다. 이 정도의 개혁은 동학운동에 자극된 것만으로도 성취될 가능성이 무르익어 있었다고 본다. 따라서 구태여 일본의 개입과 간섭 없이도 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청일전쟁에 이긴 일본이 한국의 내정근대화에 적극 관여 지원한 것은 일본의 선진적인 “이미지”를 한국인에게 과시하여 한국 침략의 포석으로 만들려는 데 그 본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정략에 능한 민비는 일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러시아 세력을 도입하였다. 일본은 민비를 미워했다. 민비의 친러정책을 그대로 둔다면 한반도 쟁탈전에서 러시아가 승리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본군은 고종을 연금하고 1895년 8월에 민비를 살해하고 김홍집을 수반으로 한 친일내각을 구성했다.

새 내각은 급진적으로 개혁을 추진했으나 국민의 대일감정은 날로 악화되어 의병이 각처에서 봉기했고 결국에는 무력항쟁 독립전쟁에로 변모해 갔다.

이런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1896년 2월에 고종은 서울에 있는 러시아 영사관에 파천하고 친일내각은 무너지고 그 내각의 주연자인 김홍집, 어윤중 동은 민중에게 살해되고 친러내각이 새로 구성됐다.

그런데 일본이 늑대라고 가정한다면 러시아는 굶주린 곰이랄까! 1896년 한해 동안에 러시아는 함경도 경원, 종성 등지의 탄광 채굴권과 압록강 유역과 울릉도의 목재 채벌권을 가졌다. 거기에 자극된 다른 강국들도 덤벼들어 미국은 평안도의 운산금광 채굴권과 경인철도 부설권, 불란서는 경의철도 부설권을 각각 한국 정부로부터 획득했다.

이런 국가 멸망 민족 노예화의 역사적 위기에서 집권층은 무능 부패하였으나 양심적인 지성인과 애국적인 민중은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갑신정변에 실패하자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 박사는 다시 돌아와 순한글로 된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서대문 밖에 건립한 “영은문”을 “독립문”으로 이름을 갈고 독립협회 지사들의 개화운동, 고종의 아관으로부터의 환궁운동 등등을 일으켜 마침내 1897년 2월에 고종은 덕수궁으로 환궁했다. 그것을 계기로 국호를 “대한”이라 하고 “고종”을 “광무황제”라 하여 “대한제국”이 성립됐다.

그러나 위에서도 잠깐 말한 바와 같이, 이 개혁운동도 지성인들이 전제왕권을 옹호 이용하여 공화제를 실시하자는 어중간한 방법론을 탈피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략에 능한 집권 수구당에게 농락되어 좌절되었고 1895년 12월에는 관권의 적극적인 탄압으로 독립협회는 해산되고 지도자들은 체포 투옥됐다. 그리고 더러는 국내에 숨고 더러는 국외에 망명했다.

청일전쟁에 진 청국은 한반도에서 손을 떼었으나 이제는 러시아가 문제였다.

일본은 1902년에 영일동맹을 맺었다. 러시아의 남침을 막는 데 있어서 이해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이 때에 일, 영, 미는 러시아에 대하여 만주로 부터의 철병을 요구했다. 물론 러시아는 응하지 않았다.

일본은 1903년 6월에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임을 러시아가 인정한다면 일본은 한ㆍ만국경에서 양쪽 50km지대를 중립지대로 할 용의가 있다고 제언했다. 이에 대하여 러시아는 북위 39도선 이북의 한국영토만을 중립지대로 하고 만주는 자기네가 독점하겠다고 응수했다. 1904년초에 이 흥정은 결렬되고 러ㆍ일 전쟁이 일어났다. 한국 정부는 한국이 국외 중립국임을 선언했으나 자위 실력 없는 “중립”은 “백지”와 같은 것이었다.

마침내 러ㆍ일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승리했기 때문에 그후부터는 한국은 군사, 정치, 경제의 모든 부문에서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1905년 7월에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권을 인정하는 “테프트 · 가쪼라” 밀약을 맺었다. 같은 해 8월에 “한ㆍ일 협정서”가 채결되고 “이등박문” 이 “고문”으로 앉았다.

1905년 11월에는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 강행되어 이등박문이 “통감”이 되고 외교권은 그의 손에 들어가 버렸다. 한국의 지성인들은 “방성대곡” 했고, 시민들은 철시하고, 시종무관 민영환은 자잘하고 지방에서는 순절자가 배출됨과 동시에 의병대가 각처에서 봉기하여, 유격전-부대전으로 일본군에 공격을 가했다. 1907년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에서 고종의 밀사인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이 호소문을 제출하려 했으나 접수가 거부되자 이준 선생의 분사 사건이 생겼다.

이 밀사 사건 때문에 고종은 이등박문의 강박에 못이겨 황태자에게 양위하고 덕수궁에 유폐되었다.

1909년에 이등박문은 하르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총살되었으나 그 이듬해인 1910년 8월에 한국의 국가주권은 완전히 일본에 탈취되고 국민은 망국민이 되었다.

그러니까, 1919년 3월 1일의 3.1운동은 5천년래 우리 선조들이 중국, 만주, 몽고, 일본 등 주변 외세에 시달리면서도 직접, 간접으로 항쟁하여 독립을 쟁취 또는 유지해온 기나긴 우리 민족사의 고비여서 그 연원이 우발적이나 즉흥적, 또는 경거망동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 38선으로 양단된 현실에서도 우리의 통일된 민주민족국가의 재건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며, 그것을 위한 투쟁은 결코 실패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민족정기가 때로는 오염 혼탁되는 일이 있더라도, 그 연원에서부터 끊임없이 솟아 흐르는 민족생명의 “가람” 때문에 오염은 씻겨내리고 다시 맑아질 것이다. 마치 백두산“천지”(天地)에서 넘쳐흐르는 압록강, 두만강이 때로는 탁류로 범람하는 일이 있어도 그것이 말라붙거나 “황하”처럼 밤낮 흙탕물이 되지는 않을 것과 같다.

3.1운동은 “부르조아”, “혁명”이었다고 딱지를 붙일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맑스가 말한 계급 투쟁에 의한 공산혁명론으로 3.1사건을 착색한 것이어서 당시의 사실과는 다르다. 그리고 실제에 있어서 일제의 무차별 학살 행위에 맨손으로 맞서 거리를 메꾼 백만 단위의 민중 – 학생, 중산시민만이 아니라, 기생, 창기, 갓쟁이, 농쟁이, 백정, 장똘뱅이, 거지소년, 떡장수할머니 할 것 없이 누가 시켜서가 아닌, 속에서 치미는 붉은 마음 하나로 지하에서 지상에로, 지상에서 지하에로 정보를 나르며 한틈 샐데 없이 비밀을 지켰던 것이다: 이것은 이론이나 구조를 초월한 “하나”로서의 민족생명의 폭발이어서 “계급”이나 이념으로 왈가왈부하기에는 너무나 거룩한 것이었다. 다만 그것이 “최후의 일각, 최후의 일인까지” 라는 철저성을 상실 또는 저하시킨 것이 면괴할 뿐이랄까 !
① 3.1운동은 윌슨이 빠리 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을 주창한 외세에 편승한 “망동”이라고 일인은 조롱했었지만, 이것은 외세 “의존”이나 “외세편승”이 아니라, 외세를 이용한 외교 정책이었다. 1919년 3.1은 “사내총독”의 무단정치에 숨통이 졸려 민족정기가 질식상태에 접근했던, 우리 민족 최대의 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3. 1선언문에는 외세 “의존”이나 “편승”의도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세계 대세가 군국주의에서 지유민주평화에로 전환하려는 시대의 움직임에서 탈락되지 말고 우리의 주권회복 주장에 인색하지 말라는 격려의 글이었다. 우리가 외세를 이용하려면 우리 자신들의 주격적인 역량을 길러야 한다는 의미에서 우선 독립국가격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동학혁명의 평등시장과 민중사회 건설과 외세배제 둥의 유산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② 그러나 광무혁명이나 갑신정변, 또는 동학혁명에서처럼 입헌군주 체제에 향수를 느낀 흔적은 없다. 3.1 운동은 결코 보수주의운동이 아니었다. 그러니 만큼 민본주의를 넘은 민주주의적 투쟁으로 추진되었다.

③ 우리나라를 기어코 식민지로 만들기 위하여 국가 주권자인 광무황제를 강박하고 중신들을 협박 조종하고 민비를 시해하고 마침내는 국권을 “완전 또 영구히” 박탈한 장본인은 소위 “이웃”이라는 “일본”이었다. 일본은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직접적인 침략자였다. 3.1운동이 발발한 시점은 고종, 즉 광무황제의 돌아가신 국상 기간이었다. 윌슨의 민족자결 선언에 발맞추어 일어난 3.1독립운동의 배후에 “고종”이 있었을 것이라는 혐의로 일인은 고종을 시해했다는 풍설(?)도 항간에 낭자했었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이런 일이 일인의 상투 수단이었다는 데서, 민비시해사건과 아울러 심증이 간다고들 말하게 되었다. 고종 국장일에 전국에서 모여온 수만의 백성들이 독립만세에 충심으로 가담했다는 것은 감정적으로도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하겠다.

④ 3.1운동 이후, 아니 해방 이후에도 일본은 “선한 이웃”이랄 수 없었다. 박정희 정권을 무조건 지원하면서 한국을 경제 식민지로 예속시킨 주역도 일본이었으며 “케네디-요시다” 밀약에서 이에 대한 미국 묵인을 얻었다는 것도 알려져 있었다.

1945년 8.15해방이 일본 군사정부의 무조건 항복 “속편”이었다면, 38선 분단은 미국과 러시아의 냉전 거점으로서의 분할 점령이었다. 이것은 우리의 비사(悲史)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다. 개항 100년 동안, 자주, 독립의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백만을 단위로 한, 애국 선열들의 피를 우리가 “무”에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또 무엇 때문에 남과 북이 갈라져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되어야 했는가? 통일된 민족국가 재건은 우리민족의 지상 명령이다. 지금의 남과 북 정권은 임시 과도 정부에 불과하다. 3.1절은 일본의 침략을 차버리고 독립을 선언한 날이다. 분단국가란 꿈에도 생각못한 일이었다. 한반도는 한나라, 우리 민족의 나라다. 우리 5천년 역사를 다시 보라. 선열들의 나라사랑이 “피참대”, “피눈물”이 되어 조국의 역사에 호곡한다. 3.1운동은 그 한토막 장면이다.

그러나 그 피는 100만 단위의 목숨이었다. 이런 의가 과거의 흙에 매몰된 채 싹트지 못할 리가 없다. 우리도 각기 그 있는 고장에서, 그 당면한 상황에서 이 3.1의 정신으로 삶을 불태우며 우리 민족의 의미와 사명을 드높여야 하겠다.

에드몬톤에서 -198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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