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29일 화요일

[범용기 제6권] (0643) 國史片影(국사편영) - 통일 신라는

[범용기 제6권] (0643) 國史片影(국사편영)

통일 신라는

“소정방”이 고구려에서 돌아오는 길에 신라까지 먹어버리려던 흉계를 미리 분쇄해서 중국군으로 우리 나라에 발붙일 곳이 없게 만든 것은 신라 정치가들의 민족적 자랑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그러나 “연당멸고” 정책 자체는 자랑거리가 못됩니다. 사실,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우리 민족은 중국의 변방, 또는 “위성국”으로서의 나라격(Nationship)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통일신라”라 해도 만주를 중국에 뺏긴 신라는 자기 앞에 차려진 환갑상을 고스란히 남에게 물려드리고 자기는 상 밑에 부스러기를 주어 먹는 “못난이”가 된 셈입니다.

그 후부터의 신라는 사사건건 중국 눈치를 보게 되었고 문화적으로도 중국의 추종자가 되었습니다. 정치, 문화의 구조 자체가 당나라 것을 고스란히 모방하게 됐습니다. 불교 문화가 왕성해서 사찰과 석탑, 석불 등등이 미굴적인 극치를 전해준다고 합니다만 중국 서역 지방인 “돈황”의 석굴암 석불상 들에 비하면 미술품으로서의 정교도는 더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스케일”은 쪼무랍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같은 시대에 된 서구 여러 나라의 문화재와 비교한다면 그 격차가 더 크게 됩니다.

중국도 예외가 아닌 것 같습니다.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모르겠습니다만, 그 박에 건조물들은 넓이에 비하여 높이가 부족합니다. 주로 목재를 사용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서구에서와 같이 주로 돌과 벽돌을 건축재로 상용했더라면 건조물의 높이가 훨씬 치솟았을지 모릅니다.

위의 얘기는 여담이었습니다만, 통일신라는 스스로 부풀어 교만해졌습니다. 백제는 피정복 민족이라 “개똥새” 노릇을 하게 됐습니다.

신라 자체 안에서는 귀족계급이 전횡하여 소위 “뼈대”가 말하게 됐습니다. 진골이라야 집권하게 되고 농민은 농노 취급을 받게 됐습니다.

절대다수의 인간이 극소수의 인간에게 볶이고 닦기고 약탕건의 한약짜듯 착취 당한다면 반란이나 혁명이 폭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1) 발해 왕국

“신라”의 “연당멸고” 정책도 비난의 대상이 되었지만, 요하 유역부터의 그 광대한 고구려의 국토를 고스란히 “당”나라에 바치고, 스스로 “당”의 변방이 된 “신라”의 졸렬한 강화조약이 더욱 아니꼬왔던 것입니다.

만주가 당나라 소유가 됐지만, 그 광대한 지역에는 수많은 고구려 민족이 그대로 정착해 살았습니다. 그들은 틈만 생기면 반당운동을 일으키고 고구려를 회복하려 했습니다.

아직도 11 성읍이 “당”에 항복하지 않고 항쟁을 계속합니다. “당” 나라에서는 “영주” 지금의 종양에 그들의 강력한 군사기지를 설치하고, 거기에 교구려 유민 수십만을 옮겼습니다. 자기 나라 군정 아래서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였답니다. 고구려 유민은 그 집단생활을 이용하여 더 유리하게 반당운동을 조직화했답니다. 고구려 유민과 섞여 살던 거란족도 같은 운명 아래 있었습니다.

696 A.D.에 “거란” 추장 이진충이 당나라 도독을 죽이고 대대적인 반당 운동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고구려의 유장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군을 이끌고 “당”의 지배세력에서 벗어나 다른 지방으로 이동을 개시했습니다.

당나라 군대는 가쓰고 추격해 옵니다. 그러나 지금의 길림성 돈화 부근인 동모산에서 당나라 군대는 섬멸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698 A.D.에 대조영은 나라를 세워 이름을 “진”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 계통의 새 나라가 만주에 탄생했습니다.

713 A.D.에 국호를 “발해”로 고쳐 불렀습니다.

“발해”는 고구려의 고토인 만주 전역을 모두 회복했기 때문에 “큰 나라” 구실을 했습니다. 요동지방만은, “발해”로서는 너무 멀고 중국으로서는 가까운 지역이어서 중국과 밤낮 대결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 고장은 당나라가 하는 대로 버려 두었습니다.

“발해”는 “당나라 문화”와 “고구려”, “백제”, “신라”의 문화를 폭넓게 받아들였고 일본과의 무역도 적극 장려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스스로 “고구려국”이라 일컬을 정도로 고구려적이었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발해”를 “해동성국”이라고 평했답니다.

“발해”는 서울을 여러 지방에 두었습니다. 동경, 상경, 서경, 중경, 등등 -

필자가 1938년엔가 “할빈”에서 발해 “동경성”까지 기차로 오는 가운데도 “발해”의 “서울”들을 여러 고장에서 발견하였습니다.

“발해”는 직접 “신라”와 대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고구려 유민의 광복운동이었으니만큼 간접적으로는 신라와 맞선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전라도에서는 그 지방의 군사와 정치권을 맡고 있는 “비장” 견훤이 “신라”의 연당멸제를 규탄하고 백제를 다시 세운다는 선언을 포고했습니다. 그는 탁월한 군사지도자여서 단시일 안에 거대한 의병단을 편성할 수 있었습니다.

“견훤”은 농민출신이었기에 농민들이 쉽게 따라 나섰던 것 같습니다.

(3) 강원도와 중부지방을 근거지로 궁예가 나라를 세웠습니다. 궁예는 신라의 왕족이었지만 왕실에서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그의 “앙심”이 되어 신라를 미워하고 복수심에 눈동자가 파랗게 불꽃을 튀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신라”가 당나라와 짝짝궁이 되어 같은 민족인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을 규탄하며 자신이 고구려를 회복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도 군사 지도자로서는 숙련된 군인이었다 합니다. 그러나 정치는 모르는 인간이었다는 것이 정평인 것 같습니다.

“궁예”는 “외눈박이”였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그는 열등감이 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열등감을 메꾸기 위하여 강력주의를 과시하고 포악무도하고 여색에 방탕하고 농민을 학대 착취하여 민원이 하늘에 사무쳤다고 합니다.

(4) 왕건은 궁예의 부하로 있으면서, 궁예 때문에 도탄에 빠진 농민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대변자가 되어 줍니다. 군인들에게는 규율과 훈련을 강화하면서 군인으로서의 긍지를 갖고 새 나라 건설에 이바지할 것을 순순히 설득합니다.

농민과 군인이 모두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왕건은 쉽게 허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왕건”은 “신라”에 대해서도 “반란자” 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신라”의 마감임금인 “경순왕”을 구슬립니다. 왕건은 자기 본실의 맏딸 “신란공주”를 경순왕비로 들여, 자기도 신라 왕실의 중요한 일원임을 합리화했습니다. 군사적 실력으로 “신라” 정복하려면 손바닥 뒤집기 보다 쉬운 처지였지만, 군사력 보다도 정치적 “제스츄어”로 경순왕의 자진양위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경순왕이 자기 “사돈”에게 왕권을 양도했다 한다면 그건 “반란자에게 왕권을 뺐겼다”하는 것보다 훨씬 더 Smooth할 것이고 민심 수습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었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신라를 노리던 세 사람의 말로

잽싸게 맨 처음 쳐들어온 것은 “견훤”이었습니다. (927 A.D.) 그는 궁중 재산을 약탈하고 후궁들을 난행으로 유린하고 귀중한 문헌들을 불사르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정치는 못할 사람이었습니다.

중부지방의 궁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경주를 “멸도” 즉 멸망시켜야 할 도읍, 멸망할 도읍이라 이름하고 아주 앉았던 자리도 없게 만든다고 했답니다. 군인이 “적”을 섬멸하는 본새로 정치를 하자는 것입니다.

궁예는 결국 농민 반란에 몰려 도망치다가 농군의 낫에 뒷잔등이 찔려 죽었다고 하는데, 잘 모르기는 합니다만 있을 수 있는 일임에는 틀림 없겠습니다.

이쯤에서 이른바 “후삼국시대”는 끝났다고 하겠습니다. 후삼국이란 “백제”를 들고 나온 호남지방의 “견훤왕국”, 고구려를 들고 나온 궁예의 태봉왕국, 그리고 “통일 이전의 고려 왕건의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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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 후삼국은 견훤의 '후백제', 궁예의 '후고구려', 그리고 기존의 '신라'를 지칭합니다. 이 부분에서 김재준 목사는 통일 신라에서 고려 왕조로 넘어가는 과도기에서 각축을 벌였던 세 나라를 언급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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