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27일 목요일

[범용기 제6권] (1641) 그리스도의 차원

[범용기 제6권] (1641) 그리스도의 차원
[에베소 3:14-20]

사랑은 여러 가지 덕목들 가운데 있는 또 하나의 덕목(도덕목록)이 아닙니다. 모든 덕목 위에 있고 모든 덕목 안에 있어 모든 덕목을 “덕”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동양의 성인 공자도 인ㆍ의ㆍ예ㆍ지ㆍ신 다섯 덕목 중에서 “인”(仁)을 근본으로 했습니다. “인”이란 것은 사랑의 이치요, 마음의 덕이라고 후인은 주석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은 사랑의 이치요, 마음의 덕이란 말입니다. “마음의 덕”이란 것은 양심의 Vertue란 말인 것 같습니다. “덕”이란 것은 선을 실천한 업적을 의미합니다.

구약 시대의 유대교에서도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는 것을 모든 율법의 대헌장으로 삼았습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석가모니”도 “자비”를 설법했습니다. “자비”란 것은 “무아의 사랑”, “자기 욕심에서 해탈한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우리가 주일학교 때부터 암송하던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는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되 자기 외아들을 내줄 정도로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찬으로 자처하고 있으며 남들도 우리를 크리스찬으로 부릅니다.

크리스찬이란 무엇입니까? 크리스찬이란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말이겠습니다.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심정에 머물러 계시고 그리스도 터전 위에 굳게 서서 그리스도 사랑의 토양에 깊이 뿌리를 박고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

그렇다면 크리스찬의 성격, 가치기준, 생활규범, 삶의 의미와 목적 등 모두가 “그리스도 사랑”의 실천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숭고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찬가를 불렀습니다.

사랑의 없으면
천사의 말도
울리는 꽹과리
예언의 능력
신비의 경험
학식의 심오
산을 옮길 믿음 -
이 모두를
다 가져도
나는 無다.
(Nothing이다.)
내 모든 소유를
나눠 주고
내 몸까지 주어
불사른 대도
사랑에서 나온 행위가 아니면
내게 유익이 없다. ……

사랑과 믿음과 소망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하였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가노라면 “사랑”은 너무 높고 크고 넓어서 우리 범인에게는 손닿지 않는 하늘의 별같고 공중에 무지개같게만 느껴지지 쉽습니다. 그래서 그걸 내 하찮은 날마다의 생활에 적용할 수는 없다고 체념하게 됩니다.

사실, 공자님의 제자들도 “仁”을 말할 때 그건 공자님이나 할 수 있는 것이지 제자들은 발벗고 따라갈 수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힘은 써 보겠지만 되지는 않을 것으로 체념을 앞세운 것이었습니다.

크리스찬에게 있어서도 인간 약점으로서는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또 하나 특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성령이 우리 맘 속에 내주하여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정결케 하시고 선을 행하게 하십니다.

성령의 감화란 것은 이교도들의 “신인합일”의 몰아상태가 아닙니다. 우리나라 무당종교에서의 “접신기복” 같은 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경험은 생동하는 높은 윤리를 내용으로 합니다.

“선을 행하는 능력”입니다. 사도 바울도 성령의 열매를 열거하면서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행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 등등이라고 했습니다(갈라디아 5:22). 그리고 총결론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사랑으로 행하는 믿음만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루터는 “믿음으로만 의로움을 얻는다”, “행위가 의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고 로마 가톨릭의 수도생활에 항거했습니다. 야고보서 같은 것은 성경에서 빼버리면 좋겠다고 불만을 터뜨렸답니다. 빼기에는 너무 늦었으니 할 수 없고 그 대신에 “검부레기 성경”이라고 핀잔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만으로 의인 대접을 받게 되었다면 그만큼 그 은혜로운 사랑에 보답할 의로운 행실이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짜 먹고 떨어지는” 무뢰한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사랑으로 ‘행하는’ 믿음” 만이 그 사람을 의롭게 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 해외에 옮겨와 사는 기독자 또는 일반 우리 동족의 입장에서 위에 말한 크리스찬 생활원리를 우리 이래민 생활에 적용해 보기로 합니다.

[1] 첫째로 – 우리 기독자는 교파별이나 신학적 견해의 차이나 직종의 다름이나 거래에 있어서의 이해관계나 심지어는 정치적 사상적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사랑”의 원칙에 대하여 서로 넘나들지 못할 만큼 깊고 넓은 Crevice를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크리스찬 사랑은 넓이를 갖고 있습니다. 그 넓이는 “자기애”에서 “가족애”로, “교회애”에서 “사회애”로, 다시 “국가애”와 “민족애”로 넓어져야 합니다. 사랑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그 인격이 넓어집니다.

이것은 어느 한 단계를 완성한 다음에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식이 아닙니다. “자기사랑” 안에서 동시에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의 풍부함을 나누는 소위 가진 나라의 Sharing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부의 두푼 돈이 더욱 귀한 사랑의 선물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의 진실이 사랑을 담습니다.

[2] 둘째로 – 바울은 그리스도 사랑의 “길이”를 말합니다. 불에 닿자마자 바글바글 끓다가 불이 조금 멈칫하면 당장에 싸늘해지는 소위 “쟁개비 사랑”이 아닙니다. 오늘 죽자살자 사랑하여 결혼했다가 몇 달 후에는 남처럼 갈라지는 연애지상의 낭만으로서의 사랑일 수도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죽어서도 천당 간다는 이기주의적 사랑은 천당이 없다면 후회막급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대접받고 윗자리에 앉고 벼슬아치도 될 수 있을 때에는 예수를 믿노라 자랑하며 나서다가도 신자에 대한 박해와 냉대와 빈곤과 연행과 투옥 등등이 밤낮 노리고 있을 때에는 예수 냄새를 부끄러워하는, 그런 마음씨는 그리스도 사랑과는 상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본국에는 소수이긴 하지만 각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직”에 충성스런 기독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영광으로 변질시키는 성령의 위로와 격려를 실감하면서 감옥에, 고문실에 가는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 때문에 한국교회 전체가 세계교회에 등대가 되고 빛이 된다는 영예를 갖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바울이 말하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영원히 남아 있을 가치를 가진 사랑이란 말입니다. 시간의 계열에서 본다면 그것은 사랑의 “길이”가 되겠습니다.

[3] - 사람의 깊이와 높이는 동시에 고려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하늘에서 세상에, 그리고 “지옥”에까지 내리 꽂힌 사랑이라는 의미에서 그 깊이와 높이가 한 직선으로 내리 뚫려 있습니다. 나무가 든든히 서려면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하는 것과 같이 이래민들이 이 땅에 든든히 서려면 사랑의 뿌리를 깊게, 강인하게 내려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 우리가 차별대우를 극복할 가장 적극적, 건설적인 방안은 역시 크리스찬 사랑의 실천이란 것입니다.

차별대우를 받으면서도 오히려 자기 긍지를 잃지 않고 여유있게 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사랑을 표시할 작은 기회라도 있으면 그것을 놓치지 않고 우리가 가능한 성의를 다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선한 운동에 동참하면 그들도 우리 이래민의 정의운동에 동참할 것입니다. 그리고 존경할 것입니다. 일본에 대한 충고도 일본에 대한 우리 기독자의 사랑의 넓이에 속합니다.

일본만이 아니라, 어느 나라 어느 역사에 있어서도 역사는 “힘”의 무대 위에서만 그 미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정치, 경제, 문화, 외교 등등에 있어서 “인간사랑”이 그 “혼”이 되고 활력소가 되는 한도 안에서 그 미래가 설계되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사랑” - 그것이 그대로 “하느님 사랑”입니다. 이 둘은 서로 구별될 수는 있어도 분리될 수는 없습니다.

“기독자”는 사랑의 십자군입니다.

사랑은 때로 억울하게 십자가를 집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부활의 더 크고 영원한 생명으로 승리합니다.

1981년 4월 5일
일본 횡빈교회에서

댓글 1개:

  1. 야고보서 같은 것은 성경에서 빼버...생명과 자유를...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