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10일 월요일

[범용기 제6권] (1632) 교회와 국가

[범용기 제6권] (1632) 교회와 국가[로마 13:1-8]

지금 전 세계적으로 교회가 “교회”라는 성채 속에 농성하여 자족할 수 있었던 “교회주의” 시대는 지나갔거나 지나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세속주의”가 밀물처럼 몰려와서 지평선을 메꾸고 “거룩”의 영역은 스스로를 유지할 수 없을만큼 그 영역이 좁혀졌습니다.

성문을 열고 나가서 항복하든지, 대결하든지, 화해교섭을 하든지 선교에 의한 변질 운동을 전개하든지 하지 않고서는 배겨나지 못할 위기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문을 열고 “교회” 이외의 세계, 사회 또는 국가라는 세속의 광장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에 주의를 집중해야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독재국가 안에 있는 교회는 그 직면해야 할 위기가 하나 둘이 아니고, 그 치러야 할 사건들이 날마다 촉발되기 때문에 순간 순간 결단의 위기를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와 국가, 또는 교회와 정부 사이에 있는 긴장관계가 팽팽해지고 그 줄다리기 경기가 결사적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미국, 영국, 유럽, 같은 부유사회 국가와 교회 사이에도 이 문제는 점차 “에스칼레잇” 되는 경향이 짙어간다고 보겠습니다만, 한국 정부와 한국 교회만큼 심각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한국정부란 것이 박정희 일인독재체제 아래 있기 때문에 “교회로 교회되게 한다”는 그 원초적인 과제마저도 제대로 유지하기 어렵게 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에 흔히 지나간 교회역사를 들춰봅니다. 교회 선배들이 비슷한 경우에 어떤 태도로 어떤 길을 선택했는가 하는 것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도 너무 다양하고 그 상대방인 사회 또는 국가도 너무 다양해서 종잡기 어렵습니다. “교회”라고 한 마디로 말하지만, 오소독스, 카톨릭, 개혁교 등 여러 교파들이 그 조직에서나 교리에서나 생활양식에서나 그 대 사회, 대 국가관계에서나 너무 다양해서 교회 자체를 하나로 묶어 “현실”로 파악하기란 극히 어렵단 말입니다.

교회도 그렇지만 “세상”도 마찬가지로 다양합니다. 정치, 경제, 문화, 종교, 습관 등등이 각기 아주 다채로운 국가와 사회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제, 오늘 안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닐, 수 천년 역사의 토양 속에 각기 자기 민족, 자기 나라로서의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맑스는 유물론적 변증법이니, 유물론적 역사관이니 하는 책에서 인간의 물질적 생산양식이 하나로 통제되면 인간의 의식구조도 하나로 통일되어 “하나”의 역사로 전 세계 인류가 통전되리라고 단정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맑스도 지금 다시 살아 지금의 현실을 본다면 감히 그런 속단은 내릴 용기가 없을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시 말한다면 교회도 세상도 그 자체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간단없이 변한다는 말입니다. 변함에 따라 그 둘의 관계성도 변할 밖에 없습니다. 변하는 것이 발전인지 후퇴인지 원형에의 복귀인지 종말에의 파멸인지를 자신있게 단언하기도 어렵습니다. 문명 비판도 각양각색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죽은 고기처럼 물 가는 대로 떠내려 갈 수는 없습니다. 격랑에 밀리면서도 물결을 타고, 또 물결을 거슬러 넘어, 제가 가야 할 목적지를 향하여 배를 저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그 배에 “나침판”이 있어야 합니다. 변치 않는 북극성과 인연을 통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NORM이라고 말합니다. 푯대, 표준, 도달해야 할 “꼴”을 확립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적어도 우리 크리스챤은 그 NORM을 신구약 성경과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성서”에서의 “국가관”은 미발달 상태여서 현대 국가에 해당시킬 만큼 명백한 NORM을 거기서 발견할 수는 거의 없습니다.

예수의 말씀 가운데 한 구절 “카이사의 것은 카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교회의 주권자라 하고 카이사를 국가의 통치권자라 한다면 교회와 국가와의 상관관계를 말씀하셨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를 걸어넘겨 함정에 빠뜨리려는 교권자들의 전략적인 궤계에서 인출된 것이었고 진리를 사모하는 성실한 道心(도심)에서 발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마가 12:15).

그러므로 예수도 전술 대 전술로 대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래도 걸리고 저래도 걸릴” 질문을 “이래도 안 걸리고 저래도 안 걸릴” 대답으로 대결했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질의 문답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라는 거창한 문제의 NORM을 발견했다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교회사 2천년 기록에서도 이 문제가 현실적으로 정착한 일은 없었습니다. 카톨릭은 교회 산하의 국가로, 앵글리캔은 정교분리에서 출발하여 “제왕”의 산하에 있는 교회로, 칼빈은 “특별은혜”로서의 교회와 “보통은혜”로서의 세상이란 은혜의 兩分(양분)에서 낙착 지으려고 했습니다. 교회와 국가에 대한 공통된 NORM은 설정되지 못했습니다.

예수가 왜 그 당시에 정부에 대하여, 또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성에 대하여 직접적인 발언을 하지 않았을까? 교회 제일주의 때문이었을까? 정교분리 개념에서였을까? 무관심이었을까? 국가 제일주의였을까?

이건 필자의 추측에 불과한 것이겠습니다만, 예수 당시에는 유대 나라로서의 “정부”랄 수 있는 “기구”가 없었고, 헤롯왕국이란 것이 있었지만, 그것은 로마제국의 “분봉”왕국이오, “유대정부”는 아니었으니만큼 말하기도 쑥스러웠을 것입니다. 예수가 “헤롯”을 “여우”라고 호칭했으니 그가 “헤롯” 편이 아니었던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것이 헤롯 “정권”을 지적한 것인지 헤롯 “개인”의 성격을 상징하는 것인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 형편으로 비긴다면 “친일파 정권”이고 “매판자본정권”이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 하나, 예수 당시에 직접 유대의 정치적 독립을 위해 자원 출전한 것은 이른바 “젤로트”, “열심당”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정부에 대하여 무력 게릴라 전술로 투쟁했습니다. 무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군대는 “열심당”에 대하여 무자비, 무차별 섬멸작전으로 토벌했습니다. “열심당”의 독립운동은 너무 무모한 전략으로 일관했다고 보겠습니다. 그것도 예수 당시에는 마카비 전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다 해 봤다는 정도로 결말된 것이었고 남은 세력은 패잔병 정도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베드로를 책망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서에는 예수의 말씀이 아래와 같이 기록돼 있습니다.

“나보다 먼저 온 자는 강도요 절도여서 양을 잡아 먹기 위해 폭력을 남용한 자들이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젤로트”를 의미한 것인지는 단언하기 어렵겠습니다만, “나보다 먼저 온”, 한 옛날이 아니라 최근에 나타난, 소위 “구원자”란 집단을 의미한 것이라면 적어도 “젤로트”가 포함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그들은 민중을 아낀다는 것 보다도 더욱 도탄에 몰아 넣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 당시에는 유대 “민족”은 있어도 유대 나라는 없었고, 정부가 있다셈 치더라도 로마의 분봉왕청이고, 로마 총독이 최고 정권자였고 민족운동, 독립운동자들은 있었어도 진정한 애국, 애족자 단체는 아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유혹자들에게 제시를 요구한 “데나리온”(은전)은 “카이사”의 이미지를 새긴 것이었습니다.

실질적으로는 민족자주도 국가회복도 경제자립도 된 것이 없으면서 공연스레 부풀어 권력층으로 자부하고 저변에 깔린 민중수탈이나 일삼는 교권자들에게 그들이 자랑하는 “돈” - 카이사의 “것”인 카이사의 머리가 새겨진 돈을 제시시켜 그들의 “본 얼굴”을 비춰주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카이사의 것은 카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 라는 본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가 하나님과 카이사를 대등한 입장에서 “일대일”로 맞세워 놓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카이사도 하느님의 피조물이고 카이사의 “역사”도 하느님의 주재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국가에 대하여 납세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과 성전 또는 회당에 대하여 헌금의 의무를 다하는 것을 일상 생활의 규례대로 인용하여 교재로 사용한 것 뿐입니다. (마태 22:17, 21 ; 마가 12:14, 17 ; 누가 20:22, 27).

이것을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 특히 현대의 그것에 문자적으로 적용하여 독재정권에의 복종 또는 무관심을 강요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확대이론이라 하겠습니다.

김종필 국무총리는 로마서 13장에서 바울이 말한 “세상권력”에 복종하라는 권고를 전제로 “박” 독재정권에 대한 교회의 복종을 담화로 권고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합니다. 모든 권세는 하느님께로서부터 온 것이며 이미 있는 권세들도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사람은 하느님이 정하신 것을 거스리는 것이며 따라서 그 사람은 자기에게 내릴 심판을 각오해야 합니다.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통치자가 두려울 것이 없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만 두려움이 됩니다. 당신이 집권자를 두려워하지 않으려거든, 선을 행하시오. 그리하면 그가 당신을 칭찬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금 바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 여러분은 그들에게 여러분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 두려워해서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양심을 위해서도 복종해야 합니다. …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지지 마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

여기서 보면, (1) 국가 권력은 “권선징악”이라는 윤리적인 제약 아래 있는 권력이란 것입니다. (2) 교회와 국가는 다같이 하느님의 주권 아래 있지만 그 존재양식과 기능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3) 이 다른 기능은 “하느님의 뜻에 복종”하는 의미에서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수립돼야 합니다. 집권자와 국민이 서로 비판하고 비판받아 서로 자기 양심대로 또 자기 깨달음에 따라 나은 것을 택할 기회를 가진 것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박정희 군사정권이 폭력행위에 의한 비민주적 독재정권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전체주의적인 철학(?)에 근거한 것입니다. 경제 시스템도 독점재벌의 독무대 경제여서 민중은 그들의 수탈에 굴종하다가 “빈혈”로 쓰러질 운명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대 교회정책도 전체주의적인 내용의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의 견해로서는 교회도 자기 정권 밑에서 전적으로 자기 권력의 지배하에 있는 한 사회기관인 것 이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독재자는 자기를 절대화하기 때문에 또 하나의 절대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이든, 자기의 “라이벌”인 인간이든, 절대다수의 인간집단인 어떤 사회단체든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와 동등이거나 자기보다 위거나의 지위를 용납하지 못합니다. 평등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하느님의 기관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느님이신 “성자”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느님에게 제일차적인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합니다.

로마서 13장은 세상권력을 하느님의 절대권력 앞에서 “상대화”한 내용의 것입니다.

모든 권력은 하느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면 박정희도 그 하느님의 권력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복종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의 권력이 하느님의 절대권력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든지, 자기권력만이 실재로 하느님의 권력이란 것은 가상적인 인간 욕망의 투영이라고 생각한다든지 하여 모든 한국 민족으로서의 인간이 “박” 자신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기를 강요한다면 그것은 자기 신화(神化)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이 아닌 것이 “신” 노릇을 하려 해도 “신”으로 인정받을 수가 없고 인정 받아본 일도 없습니다. 그래도 억지로 “체제”란 조개 껍질 속에 숨어 “神”(신)인양 절대를 강행한다면 결국에는 자기가 “우상”이 되고 맙니다. “우상”은 타파될 운명에 서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회는 개인과 집단이 하느님을 정점으로 한 삼각형적인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교회는 제1차적인 충성을 하느님께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가 과연 매일 매일의 삶에서 대 정부, 대 사회, 대 타교파, 대 세계교회 등등의 관계에서 사건이 생길 때마다 “하느님에의 충성”을 제일차적으로 선택하고 결단하고 단행하고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권력 독점자는 말합니다. 하라는 대로 순종만 하면 교회를 건드릴 생각은 없다고, 그러나 독재자에게 순종하는 것이 곧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한국 교회가 신앙양심적으로 타락했다고 믿기는 어렵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대신에 박정희를 교회의 보좌에 앉히고 예배드릴 신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 안에서도 기독교장로회는 소수파에 속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교회 또는 신자인 개인 혹은 집단으로서 “예”하고 “아니오”할 것을 분명히 하는데 진실하려고 애썼습니다. 그 때문에 목사들과 신학생들이 연행 문초, 구속, 장기징역 등 옥형을 당했고 지금도 당하고 있습니다. 소수 카톨릭 신자들도 그리스도 증인으로 수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절대다수는 독재자에게 순종하므로 교회의 안일과 수적번영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라”고 그리스도는 말씀하셨는데, 불의를 “불의”라고 언명하지 않는다면 의에 대한 가치기준이 혼선을 이루어 “義”(의)가 불의로 처벌되고 불의가 의로 선양됩니다. 맛 잃은 소금이라 하겠습니다.

한국에 시찰 나갔던 어떤 교회지도자가 예장 선교사에게 “왜 예장은 잠잠하냐?”고 물었답니다.

그 선교사의 대답은 이러했답니다.

“개가 짖는 것은 입으로 짖는 것인데 ‘기장’은 한국교회의 입입니다. 그러나 입이 짖을 때 입만으로 짖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몸 전체가 협력함으로 짖어지는 것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글쎄요, 잘 협력해서 계속 짖을 수 있게만 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고맙겠습니다. 그러나 입은 죽어라고 짖으려는데, 또는 짖고 있는데, 그 몸의 다른 부분이 경련을 일으키고, 근육무력증을 일으키고 엉덩이에 마취 주사를 지르고 하는 따위 딴 짓을 한다면 그 입인들 어떻게 짖어낼 수 있겠습니까? 예수의 말씀에 원수가 네 집안 식구니라 한 것이 기억납니다.

교회와 국가는 서로 보충할 수도 있고 서로 의무를 달리하면서 합동하여 유익을 가져올 수도 있고, 분리를 주장하여 교회 독자성을 강조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독재정권 하에서의 교회는 “생존”을 위한 투쟁을 내포한 긴박하고 위기적인 투쟁입니다. 그러니만큼 지고자(至高者, 초월자)인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를 높이 들고 “이것은 야훼의 말씀이다”하고 나서는 예언자의 외침을 드높이지 않을 수 없다고 봅니다.

그 순간 예언자는 “고난의 종”이 됩니다. 고난이 무서워 악령에게 복종하는 “생존”이 아니라, 성령에의 순종에서 “생존”을 도박한 항거를 택한 수난인 것입니다.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은 좁고 험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변의 영광입니다.

“참 인간”으로서의 부활입니다.

1977년
N.Y. 지구 학생수양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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