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14일 수요일

[범용기 제6권] (1624) 교회와 역사

[범용기 제6권] (1624) 교회와 역사[묵시록 11:15-18]

하나님이 세상(World)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요한 3:16)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내어줄 정도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이 교회(Church)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이 쓰여질 당시에는 교회들이 설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느님의 사랑을 독점할 전매특권자가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세상”보다 한 차원 높은 정점을 갖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하느님의 특별계시 기관이라는 신적인 정점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The church is in the world and for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라는 말이 유행어 같이 된 때도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난 것이 아니지만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하여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요새는 “교회가 왜 세상에서 ‘난’ 것이 아니란 말이냐?” 교회도 사회의 한 집단이요, 인간들이 종교적 욕구에 의하여 설립된 일종의 사회단체 이상의 것으로 자처할 아무 것도 없지 않느냐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신용조합이나 주식회사처럼 사람들이 발기하여 조직한 단체와는 다릅니다. 교회가 개인과 사회를 저변으로 하고 서 있기는 하지만 또 하나의 차원, 즉 하느님이라는 정점과의 관련과 거기서 오는 “영”이 이 교회 탄생의 시점이 되었다는 것이 일반 사회단체와 구별되는 점입니다. 이 “영”의 경험은 인간의 심리구조와 그 기능 이상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세상이 하느님 사랑의 제일차적인 대상입니다. 교회 제일주의가 아닙니다. 예수가 오신다는 것도 세상을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자부하는 “교회”가 세상을 소외하고 거기서 탈출하여 “교회”라는 “성채” 속에 농성하여 세상에 포문을 겨누고 노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죄악으로 망할 “세상”에서 나와 영생 포구에 들어왔으니 이제 나는 살았다. 여기서 성경 읽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연보하고 언행에 신실하고 신도끼리 사랑으로 교제하다가 죽는 순간, 영원한 복락이 약속된 천당에 간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렇게 자위하며 사는 신자를 우리는 독신자, 즉 가장 잘 믿는 교인이라고 합니다. 존 번연의 Pilgrim’s Prgress 그대로입니다. 이것이 1885년에 이래 초대 선교사들에게 주입된 한국 교회 원형이었습니다.

그렇게 믿는다면 “세상”은 우리 신앙생활의 “고장”(Locus)에서 탈락되어 버립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내줄 정도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데, 그러면 그는 가장 잘못 믿는 사람, 가장 어리석은 신자랄 수 밖에 없겠습니다. 예수님의 생활질서는 하늘에서 세상에, 그리고 교회에, 종말적인 하느님 나라 완성에-라는 순서였습니다.

고대 헬라인이나 중국 고대 사상에는 “세상”을 어떤 고정된 순환(Cyclic)체로 보았습니다. 그 안에서 변천하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결국 제자리에 돌아오는 것으로 가르쳤습니다. 중국에서는 요, 순 시절을 과거의 황금시대로 설정하고 거기서 Utopia를 찾았습니다. 춘추전국의 어지러운 시대에서도 “천운이 순환하여 갔던 것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없느니라”(天運循環無往無復) 했습니다. 헬라인도 Cosmos를 폐쇄된 기성품으로 보고, 그것이 변천한다 하더라도 그 중에 새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구약의 “전도서”는 헬라사상의 반영입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나니 하나도 없느니라.”

그러나 유대교와 기독교의 “세상관”은 언제나 미래지향적입니다. 간단없이 새 것을 찾아 소망 중에 전진합니다. 구약의 “활력핵”은 메시야 예언입니다. 장차 올 하느님 나라를 예언하고 그 실현에 이바지할 수 있는 정치, 경제, 종교, 문화 등을 현실 역사에서 시행하려고 출전장병처럼 싸운 기록입니다.

“세상”은 이런 미래지향적인 “비전”에서 볼 때, 부정부패, 불법, 횡포 등 악덕의 “퇴적장”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이란 으레 그런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달관이나 한 듯이 냉소하지도 방관하지도 않습니다. 운수가 돌아오면 저절로 잘 되겠지 하고 기다리기만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보는 “세상”은 인간 역사의 “사건”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들을 통하여 인간에게 도전합니다. 이 도전에 인간들은 응답하지 않을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합니다. 하느님은 이 역사를 하느님 나라로 변질시키기 위하여 지금도 일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이것을 증언하는 하나님의 대언자, 하느님의 “입”입니다.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느님을 모독하고 하느님 형상인 인간들을 살육 학대하는 악마적인 정권, 그 악마적 정권에 어깨동무가 되어 사회적으로 부정부패를 조장하고 경제적으로 빈민들을 착취하고 “과부와 고아”의 고혈을 빨아 먹고 소작인을 수탈하고 악마적 돈벌이꾼 등등에 대하여 그들 면전에서 규탄하고 심판을 선언하는 하나님의 사자가 예언자였습니다. 그들은 역사에서 끝이 없는 개선과 전진을 모험했습니다. 그들의 도전은 그들의 신적 “사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종말에 이루어질 메시야 왕국의 도래를 믿고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의를 위한 전투를 계속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이 예언자들 Line을 계승하여 그것을 성취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규탄만 한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했습니다. “용서”의 댓가로 자기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죽음의 운명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부활”했습니다. 그는 “영의 몸”으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어 인간갱신을 가능케 했습니다.

지금 그는 하느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고 사도신경에 기록돼 있습니다. 하느님 “우편”이란 것은 하느님으로서의 권능을 대행하는 권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는 성령, 즉 그리스도의 “영”으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 안에, 우리들 가운데 계십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 하늘에 올라가셨지만 그의 관심은 언제나 세상에 있습니다. 세상이 그의 “일터”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세상을 위하여 그리스도 하시는 일, 하시려는 일들을 맡아 심부름하는 그의 “청지기”입니다.

결국에는 “몸으로” 세상에 다시 오겠노라고 그는 약속했습니다. 그것은 세상 나라들이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나라로 변질할 때의 그와 세상과의 관계성을 말한 것입니다. “몸”이란 것은 부활한 “영의 몸”을 의미합니다.

그의 “세상”에 대한 집착은 이렇게 강합니다. “세상” 나라가 “우리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나라”로 변질(Transform)할 때까지 그는 몇천년이고 그의 백성들과 함께 그의 백성들 앞에서 일하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지금도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며 쉴새 없이 일합니다. 무던히 장기전입니다. 교회는 “세상”이란 일터에 쳐 놓은 “장막”입니다. “전선”이 이동하면 “텐트”도 같이 이동합니다. “세상 나라”가 “하나님 나라”로 완성된 “새 하늘 새 땅”에는 “교회”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모든 것의 모든 것(All in all)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범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로 “승화”됐기 때문입니다. 묵시록에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성전’이 없더라”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성전’이고 우리 몸 하나 하나가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사 안에 변화되어 감추어졌습니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역사의 완성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묵시록 21장, 22장을 읽을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신부가 신랑을 위해 단장한 것 같이 아름답게,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더라”고 쓰여진 구절에 유혹되기 쉽습니다.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요, 인간이 만든 것은 아니니 우리 힘이 무슨 소용이냐? 우리 힘쓰는 것이 무슨 효능을 가져 오겠느냐? 우리는 주는 것을 받기만 하면 된다. 가만히 누워 기다리자! 하게 되기 쉽단 말입니다. 말하자면 “불로소득”의 “행운”을 꿈꾸는 유혹에 걸리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하느님 등 모든 관계성에 있어서 그런 “행운”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사과 나무에 사과가 주렁주렁 열렸다 해도 그 사과가 사람의 입에 저절로 굴러들지는 않습니다. 그런 것을 기대하는 사람은 그 사과 먹을 자격이 없습니다. 사과가 열리게 되기까지에는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일해야 했고 사과가 열린 다음에도 사람이 능동적으로 그것을 따고 고르고 저장하고 운반하고 가공하고 하는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하물며 “역사갱신”은 인간의 가장 거창한 사업임과 동시에 가장 영광스러운 운동입니다. 역사가 하느님 나라 바탕으로 변질하게 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종교적으로 그 “바탕”이 변화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만 하고 기다리기만 한다든지 교회당 안에 농성하여 평생 번데기 노릇만 한다든지 하므로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악의 세력이 그런 “수면자”(Sleeping Person)을 통째로 너끈히 잡아다 먹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찬은 십자군이 되어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 자신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 하는 일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가능한 최선을 다하는 것 뿐입니다. 인간의 최선에 하나님의 축복이 내리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로 되게 하는 거대한 역사개혁 또는 갱신운동”은 크리스찬의 본직입니다. 그것은 역사의 어느 한 부분만이 아니라 역사 전체가 그리스도의 역사로 되게 하는 전투입니다. 그런데 역사의 주역은 인간입니다. 인간 중에서도 그리스도화한 인간입니다. 천국 열쇠를 가진 기독자는 역사 변혁 운동의 Keyman입니다. 이 악한 세대에서 그리스도 왕국 건설의 Keyman 노릇을 한다는 것은 Militant한 일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는 오히려 역행하여 자기가 하느님 노릇하려는 세상 권력에 맞서야 합니다. 거부해야 합니다. 나아가서는 전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의 신앙적 integrity를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대결할수록 악령의 세력은 무자비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포로”가 되고 카타콤에 숨기도 하고 뛰어나와 순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사에서의 최후 승리자는 핍박자가 아니라, 핍박 받는 자입니다. 미래 역사의 창조자는 현재에 만족 또는 추종하는 “다수”가 아니라, 현재에 불만을 품고 더 밝고 바른 미래를 위하여 수난하는 소수자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와 역사”는 서로 긴장관계를 가지면서 하느님 나라 건설 또는 전진에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대에 와서는 교회와 국가 권위 균형이 깨어져 갑니다. 국가권력은 팽창만 해갑니다. 특히 독재 국가의 집권자는 거의 만능을 강행합니다. 자기가 곧 국가라고 어깨를 잽니다. 그들은 종교, 특히 기독교와 기독교회에 지식이 부족합니다. 종교적 심정도 말라 붙었습니다. 동서양을 논할 것 없이 Power Politics 일변도로 되었습니다. 군사력과 경제력이 뒷받침하는 한도 안에서만 정치력이 행사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제2차 대전 후, 패전국인 일본을 온전히 “거세”하기 위하여 소위 “평화헌법”아래서 비무장국가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서 강대국들은 “인제 됐다”고 가슴을 내리 쓸었습니다. 일본은 그 대신에 “평화산업”을 강화했습니다. 경제력이 월등하게 자랐습니다. 그러나 일본 나라가 군사력이 약하다해서 당장 일본을 침략한다거나 멸시하는 나라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 대신 핵무기를 산더미같이 쌓아 놓고 상대방을 멸종시킨다고 으르렁대지 않고서는 제 나라를 보존할 수 없다고 불안해 하는 강대국들은 멸망을 눈 앞에 보면서 떨고 있습니다. 젊은 세대들은 초조하여 일시적인 향락에 젊음의 미래를 투신합니다. 이것은 정치적 타락임과 동시에 역사 전체의 타락입니다. “우리나라”는 약소국임에도 불구하고 초강대국 핵무장 산하에 끼어드노라고 열심을 피웁니다. 핵무기를 어디다 쓰려는 것일까요? 이북동포들을 몰살하려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역사의 주인인 하느님은 더욱 분노하실 것입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남한, 북한, 서구, 동구, 남미, 북미를 막론하고 개인 자유와 사회정의와 세계평화를 “모토”로 하여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로 변질하게 하는 사랑의 공동체 구성과 성장에 헌신한다면 심판의 날이 연기되어 기다릴 기회라도 주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위에서 써낸 것이 너무 테두리가 커서 어리둥절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동강령 비슷한 것을 붙여 보려고 합니다.

(1) 남북평화통일 – 이북에는 핵무기도 없고 외국 군대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북에서 이남에 쳐내려올 군사행동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군사적으로 남하한다면 우선 60만 국군과 싸워야 하겠고 따라서 미군과도 싸워야 할 터인데 그럴 실력은 물론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박정희가 이북에 쳐들어갈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불가능합니다. 미군의 뒷받침 없이는 가망이 없습니다. 그러면 미국이 우리 국군을 앞잡이로 하여 이북 침략을 감행할 것이냐? 그건 세계 여론이 허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생 “평화통일” 밖에 내세울 것이 없게 됩니다. 그런데 극을 달리는 “반공” 정책과, 핵무기 장비 정책은 평화통일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공갈” 전략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이 평화통일 방향에 보탬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김대중 씨의 3단계 통일안 같은 것이 오히려 현명하지 않는가 싶습니다. 어쨌든 어느 한 편에서 다른 한 편을 자기 빛깔로 마구 칠해버리는 통일론에 기독자나 교회가 추종할 수는 없겠습니다.

(2) 경제적으로 탐욕적인 자본주의와 무신ㆍ유물론적인 “인간부재”의 공산주의와 어느 하나에도 기독자나 기독교회가 따라갈 수 없습니다. 기독자와 교회는 어느 진영에서나 예언자적인 발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교회로서의 독자적인 위치에 서 있습니다. 생명없는 물체 같이 역사의 물결에 떠 내려가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역사의 바깥에 옛날의 “은자”(Hermit) 같이 숨어 살 수도 없습니다. 천상 당면한 역사를 그리스도의 역사로 변질시키는 데 나서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를 위해서나 역사를 위해서나 유일한 출구입니다.

(3) 기독자와 교회는 모든 사회문제에 참여해야 합니다. 참여해서 적어도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해야 합니다. 그것을 애매하게 한다든지, 아예 침묵을 지킨다는지 한다면 가치 기준이 혼란해지거나 아주 없어지거나 합니다. 그때에는 독재자가 자기를 신화하여 자기가 가치기준이 됩니다. 모두가 이의 없이 그에게 충성을 서약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독자는 그렇게 되기 전에 사회 또는 정치에 책임적으로 동참하여 정부를 감시하고 견제하고 개선해야 합니다. 그것이 민주체제의 원칙입니다. 개선, 즉 고쳐서 더 좋게 한다는 데는 정책을 바꾸려는 Liberalist와 정체(政體)를 바꾸려는 혁명주의(Revolutionist)가 있습니다. 교회가 어느 vus를 택하느냐 하는 데는 “전자”를 택하는 온건파와 “후자”를 택하는 과격파(Radicalist) 둘 다 있을 것입니다. “전자”가 다수고 후자가 소수일 것입니다만, 침묵의 추종자가 절대 다수일 것입니다. 이 절대 다수는 “예수 믿고 천당 가자”는 “역사부재”의 타계주의적 이기주의자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대 역사 책임을 하나님의 종말학적 심판에 밀어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악하고 게으른 청지기”입니다. 영생복락 대신에 무서운 처벌의 대상이 될까 두렵습니다.

역사에 참여하는 기독자나 교회는 할 일이 너무 많아 걱정일 것입니다. 날마다 일어나는 사건들이 예외없이 그에게 도전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뜻대로 응답해야 합니다. 바쁩니다. 그러나 보람을 느낍니다.

운명도 사명으로 변질합니다. 수난이 영광으로 빛납니다. 성령이 끊임없는 위로와 격려와 대책을 제공합니다. 미래를 향한 “비전”이 생동합니다. 그의 일상생활이 그대로 그의 신앙고백이고 그리스도 봉사고 하늘나라로서의 Nation Building이고 그의 생각이 생활신학이기 때문입니다.

1975년 10월 26일 오후 7:30
시카고 제일감리교회에서

댓글 1개:

  1. 장공 김재준의 정치참여에 대한 신념은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의 '세상'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의 대상이자 사랑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목회자는 세상을 외면할 수 없다!

    오늘날 정치에 관심이 없는 목회자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삶의 어느 모양을 갖던지 정치와 분리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김재준의 정치신학은 머리에서, 강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생생한 정치 현장에서 다듬어진 것 같다. 정치의 한복판에 있지만 정치에 매몰되지 않고, 철저한 신앙고백을 바탕에 두었다.

    가끔 극우집회의 중심에 서 있는 기독교 단체들을 보면... 진정 신앙고백적인 행동인지... 자신의 이익과 욕망을 기독교로 포장해서 주장하는 것인지를 세상 사람들은 다 아는데... 본인들만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알면서도 모르는 척 '자기최면'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물며... 사람이 없으면 좀 키워서 내세울 것이지... 천박하기 그지없는 전## 목사가 현 정부에 대항하는 선봉장을 자처한 형상은 그야말로 코메디가 아닐 수 없다. 분명 웃기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야말로 "웃기고 자빠졌다!"라고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때로는 애잔하고... 짠~하기도 하다... 저렇게 수준이 낮은 인물이 대표가 되어야 하는가?

    물론 국민의 지도자를 자처했다가... 수신제가를 못해서 낙마한 리더들을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래서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돌아보는 과정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소위 진보 진영에서도... 보수 진영에서도...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했던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필요한 '로고스'(논리력), 파토스(공감력), 에토스(화자 고유의 성품?) 중에서 에토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한다.

    60년대 초반 민주화 운동의 현장에서 혜성같이 등장한 장공 김재준 목사는 그 이전까지는 학교에서 가르치던 교수에 불과했다. 당시 쟁쟁한 민주 투사들이 많았지만 결국 70년대 초반까지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는 장공 김재준 목사가 서 있었다. 물론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한 것은 아니지만... 누가 중심에 서 있어야 하는지는 대단히 중요했다고 본다.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함석헌과 김재준'이라는 강연을 통해서 당시에 누가봐도 함석헌이 중심에 서 있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항상 함석헌은 김재준을 중심에 서게 했었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서로 협력하면서 그 모임이 최선의 결과를 만들 수 있는 것에 집중을 해야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중심 자리에 김재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인지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 민주화 운동에 대한 사진을 보면, 누가 어느 위치에 자리했어야 하느냐를 두고 다투는 자리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민주화 운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추진할 것이냐를 보여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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