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1일 목요일

[범용기 제6권] (1609) 돌들이 외친다

[범용기 제6권] (1609) 돌들이 외친다
[누가 19:36-40, 묵시 11:15-18]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묵 12:15)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눅 19:40)

“교회는 하느님의 기관이고 국가는 세상 기관이다. 교회는 거룩하고 국가는 속되다. 그러므로 서로 二元的(이원적)인 평생선을 유지하는 것이 원칙이다……” 합니다.

그러나 현대생활은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한 Organ으로서의 기능을 갖고 사는 것이기 때문에 양자가 구분은 되면서도 분리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분리할 수도 없다는 것은 서로 본직이 다르면서도 서로 어울려서 타원형적인 하나로 된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조개처럼 자기 폐각 속에 농성하여 ‘게토’가 되면 ‘국가’가 쉽사리 집게로 집어 자기 망태 속에 넣어갈 것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권위로 세상 권력에 Confront해야 합니다. 그렇잖으면 일제말기 일본군벌이 만든 소위 ‘종교법’ 같은 것을 만들어 ‘교회’를 집권자의 ‘하녀’로 등록하고 보존등기까지 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에서는 일제시대 때 교인들이 독립운동도 했고 3ㆍ1운동 때 전국 교회가 그 운동의 병참기지 노릇도 했고, 오늘에 와서는 민주질서 수립에 앞장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1] 우선 할 말은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주신 말씀으로서 역사에 전달해줘야 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3:17-21)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라” 하셨습니다. ‘불의’는 ‘불의’는 ‘불의’라 하고 ‘악’은 ‘악’이라 해야 그 가운데서 불의와 의, 악과 선이 구별되고 가치 기준에 혼동이나 도착이 생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입을 다물고 침묵만 지키면 의와 불의가 함께 매몰되고 그 무덤 속에서 ‘불의’가 더 큰 세력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침묵은 불의에의 묵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일합방 때에 많은 애국지사들이 대한제국의 제단에 자기 피로 제물 드렸습니다.

3ㆍ1운동 때에 한국교회는 일본의 동양침략주의를 고발했습니다. 그래서 제암리교회 같은 것은 일본군경에게 무차별 전원 학살을 당했습니다. 4ㆍ19 때 청년들과 학생들과 교수들은 이승만 정권의 불의를 규탄하고 폭로했습니다.

한일회담 때에 교회는 일본의 경제침략과 거기 따르는 정치적 위협을 경고하고 우선 일본은 36년간 한국침략행위를 참회하고 선한 이웃으로서의 맹약을 밝히고 배상할 것은 배상한 다음에 회담을 시작하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의’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기에는 박정권이 너무 죄과가 많았습니다. 그 죄과의 무게가 저울의 평준선을 맞추기에는 너무 일방적으로 무거워, 이미 저울은 기울어질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모세의 출애굽 당시에 “하느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모세의 헌책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과 같습니다. 양심에 화인이 찍혀서 돌이킬 여백이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1969년 3선 개헌안이 박 정권으로부터 제시됐을 때, 이것은 민주주의의 종식과 일인독재의 수립을 촉진시키려는 ‘통고’라 하여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전국적인 항거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때, 교회에서는 입을 굳게 다물고 한 마디 말도 말답게 외치지 못했습니다. 그때에 2백만 기독신자가 일제히 “아니다”하고 Stand up and be Counted 했더라면 사태는 달라졌을는지 모릅니다. 설사 달라지지 않았더라도 ‘교회’로서의 위신은 섰을 것입니다. 교회로서의 ‘증언’은 남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Crucial한 역사의 위기에서 교회가 침묵을 지켰기 때문에 오늘에 와서도 독재자 한 사람의 손에 농락을 당하는 치욕을 면치 못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교회가 하느님 보다도 사람을 더 두려워하면, 사람들이 교회를 경멸합니다.

[2] 교회가 바른 말을 할 뿐 아니라, 그 바른 말이 일으키는 행동에서 외면할 수도 없습니다. Involvement와 Participation은 ‘말’에 대한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수께서 마태복음 25장에 말씀하신 대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마시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말씀은 간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목마른 자, 가난한 자, 갇힌 자, 병든 자, 유랑자, 헐벗은 자 등등은 그리스도 자신과 일치된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멸시하면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것이 되고 그들을 존대하면 그리스도를 존대하는 것이 됩니다.

나사렛 회당에서 그리스도가 선교의 첫 선언을 발표했을 때의 ‘메시지’도 같은 유형에 속한다 하겠습니다(눅 4:18-19).

교회가 귀족층의 보호나, 중산층의 지지에만 의존하여 가난한 근로자층, 빈민촌의 영세민, 정의를 외치다가 잡혀간 학생과 지식인 그룹, 총칼밑에 포로된 국민 등등의 해방운동에 무관심하거나, 자가류의 신성개념에서 초연하게 지낸다면,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어둠 속에 추방되어 이를 갈며 통곡할 날이 올지 모른단 말입니다.

교회가 잡혀간 학생들과 교직자들과 민주인사들을 찾아 만나주고 위로하고, 그들의 가족돕기에 힘쓰고, ‘의’를 구하다가 낙심한 사람들을 격려하는 등등은 반드시 해야할 천직입니다.

[3] 교회가 민주운동에 가담한다는 것은 그것이 기독교 신앙과 윤리에 일치되는 운동입니다. 개인자유와 사회정의를 함께 구현할 수 있는 체제는 자유민주 System밖에 없습니다. 도표를그린다면 정삼각형이 되겠습니다. 개인과 사회가 저변의 두 점입니다. 그 두 점을 이은 ‘선’이 관계 또는 연결선입니다. 긴장관계입니다. ‘개인’이 너무 자기만을 주장하면 이기주의가 됩니다. 사회가 너무 자기만 주장하면 전체주의가 됩니다.

이 저변의 두 점 위에 삼각형으로 말한다면 ‘정점’이 있습니다. 이 삼각형의 한 정점에 저변의 두 점이 연결됩니다. 그래서 ‘통로’랄 수 있는 ‘선’이 저변의 두 점에 이어집니다. 정삼각형이 됩니다. 그 정점이 하느님의 말씀을 맡은 교회입니다. 범우주적인 삼각형인 경우에는 ‘하느님’이 정점이 되겠습니다. 선이 그어지지 않으면 고립된 한 ‘점’일 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민주운동에 동참한다는 것은 개인과 사회에 ‘통로’인 ‘선’을 긋는 것입니다. 생명의 혈맥을 뻗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바울은 권고합니다. 자유는 양심자유, 정치자유, 경제자유를 총괄합니다. 인간해방, 인간회복, 인간존엄이 모두 ‘자유’에서 성취되는 생명의 열매입니다.

‘인간구원’을 본직으로 하는 교회가, 적어도 본국 5천만 동포의 집단노예화에 “아니다!” 소리도 안한다면 길바닥의 ‘돌’들이 대신 외칠 것입니다.

벌써 ‘돌’들의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니다.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면 그들에게도 들릴 것입니다.

[4] 교회가 외친다고 뭐 그대로 되느냐? 학생과 교직자가 ‘예’ 하든 ‘아니오’ 하든 그게 독재자의 강철심장에 세미한 음파의 한 결이라도 울리는 줄 아느냐? 메미 울어울어 ‘한’을 전하지만 공연스레 소리만 낭비하는(嗚而傳恨 徒勞費聲) 것과 다른 것이 무어냐?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유’란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입니다. 율법주의든, 도덕주의든, 정치적 탄압이든, 경제적 착취든, 절대화한 이념이든, 횡포한 일인독재든 간에 무릇 인간을 누르고 밟고 묶고 단근질하는 그리고 법없이 살육하는 모든 것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그리스도와 함께 자유전선에 나설 것입니다.

이 인간자유운동은 고귀한 유산이니만큼 그것이 우리 역사에 뿌리내려 생명숲으로 무성하게 하려면 일조일석에 그 성과를 거두리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로마는 하루에 된 것이 아니라는 말과 같이 영국의 민주주의도 크롬웰 전쟁으로부터 수다한 피를 흘렸던 것이고 미국의 민주주의도 6ㆍ25 공산침략, 4ㆍ19의 이승만 독재 등에 항거한 젊은 피로 그 지반이 세워졌습니다.

5ㆍ16 군인독재와 싸우다가 희생된 피의 씨앗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한국 역사의 토양 속에 심어지고 있습니다.

해방된 것도 이제는 30년이 되었고 4ㆍ19도 14년이 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는 전도 요원합니다.

우리는 젊은 세대와 전체 교인에게 민주교육, 민주훈련, 민주주의 의식화에 꾸준해야 하겠습니다. 군인들이 장기집권을 강행한다면, 우리도 장기항거를 계획해야 합니다. 속히 끝나기를 바랍니다만, 장기도 불사한다는 여유가 요청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부탁합니다.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라.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아노라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아노라 하겠고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느님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하겠다”고 했습니다.

한국교회가 정의편에 서서, 양심대로 예와 아니오를 말하지 못하고, 인간 자유를 박탈하고 5천만 민족을 한 그물에 후려내는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예언자의 역할도 담당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벙어리, 귀머거리로 낳던 것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 하고 격려합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하나님)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로 되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2천년을 꾸준하게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안식일에도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고 해명했습니다. 그는 그 일을 역사의 종말까지 계속 할 것입니다. 무던히 장기전입니다. 지금도 그리스도는 세계사의 전선에서 수난 중의 의인들 속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두려워 말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고 격려하십니다.

세속 역사의 그리스도 역사화란 것은 ‘예언’이요, ‘환상’이 아닙니다. 역사의 결실입니다. 역사의 소망입니다. ‘종말’은 다만 ‘끝’이라는데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끝에 하나님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완성하신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여기서 그 과정을 성실하게 성취해 가는 데서 삶의 의미가 주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교회와 세속권력에 맞서는 입장에서 그 세속권력의 현실에 하나님의 뜻을 심고 그 뜻이 그 권력을 변질시켜 그리스도 나라 모습으로 되어가게 하는 것이 교회의 의무입니다. 심판에 견딜 수 있는 행위는 지금 여기서 만들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고난에 직면했습니다만 그만큼 영웅적인 기회도 주어져 있습니다. 교회가 이 위치를 자각하고 이 역사 속에 산 신앙을 심어주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입성의 날에 그리스도의 나라 도래를 외칠 제자들의 특권을 길바닥 돌들에게 넘겨주는 일이 없도록 깨어 촛불을 밝히며 ‘호산나’를 외칩시다.

1974년 5월 8일 Washington D.C.
한인연합장로교회 종려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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