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1일 목요일

[범용기 제5권] (75) 北美留記(북미유기) 第8年(제8년) 1981 – L.A.에

[범용기 제5권] (75) 北美留記(북미유기) 第8年(제8년) 1981 – L.A.에

내 나이 80고개를 넘었다지만 아직도 젊음의 ‘환각’이 마음 변두리에 감돈다. 말하자면 ‘시간’에의 고요한 항거랄까!

금년 겨울에는 늙은 아내가 곁에서 보살핀다. ‘감기 들세라’, ‘배탈 날세라’ 정성섞인 잔소리 때문에 겨우내 방안에 처박혀 지냈다. 캐나다의 눈은 오는대로 얼어붙어 좀처럼 녹지 않는 것이 의례 그런 것으로 되어 있다.

재작년엔가 건널목에서 빙판에 미끄러져 오른켠 갈빗대 둘이 금 갔다고, 두 달이나 누워 있는 일도 있었고 해서, 이제는 동네 나들이도 옹졸하게 조심스러워진다. 그 대신 삼월 쯤, 눈이 녹고 보도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하며는 좀이 쑤셔 가만 앉았지 못한다. 방랑의 꿈이 잔디밭처럼 푸르다. 보도를 무심코 거닌다. 어디를 걸어도 꼭 같은 세멘블럭이다. 구두 뒷축이 튕기는 꼭 같은 외마디 음향만이 귀를 두들긴다. 지겨워서 되돌아 온다. 책상 앞에서의 마음의 산책이 오히려 제격인 경우가 많다. 거기다가 중국 당ㆍ송 시인들의 바람과 달에 흥겨워 남긴 시나 읽을라치면 나 자신도 끼어들이 신선이 되는 것 같아서 좋다.

돈을 낚노라 눈에 쌍불 켜고 ‘시간’을 다투며 뛰고 있는 서양인에게는 이런 자연의 도원(桃源)은 ‘닫혀진 낙원’일게라고 큰소리 해 보기도 한다.

하루는 ‘상하의 나라’ 로스앤젤레스의 옛 친구 구회영 장로 내외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거기 와서 겨울 나라는 초청이다. 당장 날아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내가 십년을 하루같이 펴 내는 월간지 「제3일」 한달호를 빼먹으면서 방랑길 떠나는 죄송스럽게 불성실한 ‘청지기’ 같기도 해서 2월호 발송까지 끝내고 떠나려 했다. 예정대로 2월 28일에 집을 떠났다. 마침 토요일이어서 직장을 쉬는 둘째 아들이 꼬마들과 함께 차로 공항까지 전송한다. 꼬마 손자, 손녀들이 ‘금단의 문’ 밖으로 키돋움하며 “할아버지 안녕!”을 소리껏 외친다. 승객들 틈에 끼어 안보이는데도 지칠줄 모르고 연한 단풍잎 같은 손을 흔들며 외친다. 잠시라도 ‘떠난다’는 갈림길은 사랑의 ‘정류장’ 같아서 슬프면서도 애잔한 삶의 ‘시’랄까! 천진스런 꼬마들에게도 서글프면서도 뭔가 기대되는 감정의 무늬가 수 놓이는 것 같았다.

희안하게도 이번 비행기는 시간대로 뜬다. 구름 위 파란하늘은 높달까, 깊달까. 햇님 얼굴에 면사포 씌울 천사도 없다. 솜구름이 하얀명주실 꾸러미 되어 하늘 구석에 둥실 떠 있다. 나는 의자 등받이를 비스듬이 뒤로 제치고 길게 앉아 지금 구름 위를 날고 있는 것이다.

같은 날 저녁에 L.A. 국제공항에 내렸다. 사람들 걷는대로 따라 걸었더니 저절로 ‘출구’다. 여권도 보나마나 무사통과다. 옛친구 구회영 장로 내외분과 한신 출신 이창식 목사 부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창식 목사 집에 하루밤 여장을 풀었다. 토요일 밤이다. 다음날인 주일예배에 설교를 맡으란다. 무심코 허락했다. 그날은 3월 1일, 3ㆍ1절 기념예배였을 것인데 그런 것을 주인 목사도 귀뜸해 주지 않았고 나도 깜짝 잊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구름 위에 떠 있는 거품이랄까! 발이 땅에 닿은 것 같질 않았다. 마음도 몸도 제대로 가누어지질 않는다. 무심코 택한 제목이 “그리스도 없이 역사의 성취는 없다”였다. 그 제목을 3ㆍ1절 사건으로 옷입혔더라면 멋진 설교가 됐었을지도 모르는데 설교자 자신이 3ㆍ1절인줄도 몰랐으니 허공을 때린 권투선수가 되고 말았다.

설교가 길어졌다. 후에사 알았지만 사회하는 담임목사는 예배 후에 곧장 다른 교회 무슨 임직식에 순서를 맡았던 모양인데 그런줄도 모르고 나는 설교시간을 자유로 연장시키고 있었다. 주인목사는 무던히 초조했을 것이다. 짧은 설교에는 자신이 있노라던 나도 이젠 늙었나 싶어 서글픈 미안이 든다.

이튿날부터는 구회영 장로 댁에서 유숙한다. 더할나위 없이 복스러운 가정이다 구회영 장로 내외분은 ‘한신대’가 6ㆍ25 동란에 몰려 부산에 피란했을 때, 선생, 학생 할 것 없이 두루두루 도움받은 친구다.

“Friend in need friend indeed”란 속담을 연상시킨다. 환도한 다음에는 서울 경동교회 시무장로로 교회에 충성했다. 지금은 L.A.에 자리잡고 사업기관들은 자녀들에게 내놓아 맡기고, 은퇴하여 ‘퇴로재상’같이 여생을 지낸다. 자녀들의 극진한 효양을 받으며 화초 기르기와 정원가꾸기, 연못의 잉어떼, 상하의 숲 등등을 즐기며 자유롭게 산다. 얼굴도 일본사람들이 좋아하는 ‘후꾸노마기(복의 신)’을 닮았다. 그렇다고 아랫배를 연방 쓰다듬으며 히죽 웃어대는 야한 표정은 물론 아니다. 정답고 부드러워 접근하기에 걱정스럽지 않다. 말하자면 허물없이 사귈 수 있는 친구란 말이 되겠다.

그는 지금 65세지만 왼종일 차를 운전해도 피곤한 기색이 없다. 내가 산수탐방을 좋아하는 줄 알기에 미세스 구(‘구권사’라고 부른다)를 기장(機長)으로 옆자리에 모시고 나를 승객으로 뒷자리에 앉히고 자기는 ‘파이로트’가 되어 탐승길을 떠난다. 구권사는 먹을 것 마실 것 약품 등등 오만가지 살림을 꾸려 차에 실었다. 차는 길을 달려야 하고 길은 지도같이 고정돼 있기 때문에 ‘김삿갓’ 여행같이 자유로운 ‘방랑’일 수는 없다. 그래도 ‘스케쥴’과 시간에 죄인처럼 묶여진 ‘이동’이 아니라는 한도 안에서 ‘자유’요 ‘방랑’인 것이리라.

다시 생각한다면 ‘방랑자’란 고생과 천대를 각오하면서도 그것을 냉소해버리는 Cynicism이 몸에 베어야 할 것이고 스스로 고매(高邁)하여 속된 냄새를 피우지 말아야 할 것이며 해탈자같고 신선같은 시인이어야 할 것인데 포근한 차 안에서 먹고 자고 누우며 호강스레 탄탄대로를 달리면서 자유로운 ‘방랑’이랄 수 있을까 싶어진다. 그렇다고 내 발로 광야를 걷기에는 너무 늙었다. 고생이 없으니까 ‘방랑’이라 수 없겠지! 그래도 이름이 낭만적이고 인간이 방랑적이니까 그대로 불러두기로 한다.

3월 2일 – 오전에 ‘한신동문회’ 대표로 신창윤, 김을락 두 목사가 예방와서 12시까지 얘기하다 갔다.

오후에는 구회영 장로 내외분과 이창식 목사가 차로 요세미데 탐승길에 올랐다. 물론 내게 대한 호의 때문이다.

갈수록 ‘신작로’는 좁아진다. 가파로운 바위산이 그대로 태평양에 미끄러져 빠졌다. ‘비이취’랄까 공간은 없다. 산이래야 바위 하나로 찰떡같이 엉켜진 덩어리니까 길 닦기도 수월찮았을 게다. 작은 집채만한 바위 하나가 가파로운 벼랑에 붙어 있다. 당장 굴러 내리칠 것 같다. 공연한 걱정이겠지! 그래뵈도 뿌리가 깊길래 끄덕 없이 붙어 앉았을 것이 아닌가? 그럭저럭 ‘모로베이’라는 초대 덴마크어민들 어촌에까지 내려왔다. 태평양은 언제봐도 맑다. 푸름이 하늘과 겨룬다.

오늘은 바람이 거세다. 그리고 춥다. 이엄이엄 밀어닥치는 물결에 억억만년 씻기어 하얀 모래사장이 생겼다.

몬트레이 반도가 바로 저 편에 가늘게 누워 있다.

고 김능근 장로 막내따님 ‘영혜’가 그 근처에 산대서 심방간다. 거기는 집에 문패도 번도호 없다. 심방에 익숙한 이창식 목사가 이집 저집 문을 두들긴다. 길 가는 사람에게 묻는다. 결국 알아냈다. ‘영혜’는 경동교회 인연도 겹쳐서 몹시 반가와했다. 남편되는 김창욱 님은 공학박사인데 진실한 노력가라는 평이 있다.

가파로운 바위벼랑 중턱을 끌질해서 받침기둥을 세우고 손수 설계하여 혼자서 3층집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니만큼 집모양도 보통이 아니다.

자동차길은 아니지만 꼬불꼬불 한줄기 오솔길이 집 앞까지 이었다. 바위를 까헤친 것인데 그것도 자작이라고 한다.

능근 장로가 서랑 김창욱 박사에게 써 준 족자가 소중스레 걸려 있었다.

“인생은 등산자 같다. 험하고 높은 고개를 겨우 오르며는 또 그런 산이 앞을 막는다. 그러나 오르고 또 오르면 넓고 밝은 고장이 열린다.…”하는 뜻의 한시였다. 아마도 자작, 자필인 것 같았다.

“人生行路如登山, 路破一區又有艱,
夜暗甚後睦光出, 水解江邊春水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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