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6일 목요일

[범용기 제4권] (54) 군정독재에서의 김대중은… - “That’s not fair”

[범용기 제4권] (54) 군정독재에서의 김대중은… - “That’s not fair”

꼬마 손주들에게 뭔가 주고 싶은 것이 늙은 할아버지 심정이지만 하나하나에게 꼭 같은 걸 주지 않으면 당장에 “That’s not fair”의 항의가 들어온다. 인간이 나면서부터 물려받은 것이 자기보호의 본능일 것인데 철이 든 맨처음에 벌써 “이건 내꺼다!”, “아니 그것 내꺼다”하고 싸움이 벌어지고 울고 맞고 한다. “소유욕”이란 것은 그의 “생존”에 직결된 것이기 때문에 생명자체에 박힌 뿌리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성 싶다. 공산주의나 독재주의가 인간탄압이니 통제주의니 권위주의니 숙청이니 하는 피비린내 나는 인간 살육을 감행하지 않고서는 스스로의 “생존”을 보존하기 어렵다는 것은 바로 이 각 개인이 타고난 자기 보호의 자유를 가로채갖고 “내가 너를 더 잘살게 더 바르게 살도록 해줄테니 너는 나 또는 우리당에서 하라는대로만 하라. 안하면 ‘반동분자’로 숙청된다” 하는 말하자면 머리칼을 거꾸로 쓰다듬은 역리 때문인 것이다.

민주주의란, 각 개인이 자기의 자유로운 선택과 결단에 따라 제 삶을 제가 꾸려간다는 생활원칙을 터전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 삶을 실현하려면 제 혼자서만 아니라 남들도 그렇게 살아, 서로 어울려야 하기 때문에 이른바 “사회정의”가 제창되고 전쟁이 거부되고 국제평화가 증진되도록 힘쓰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불의에 항거하는 생존본능 “That’s not fair”의 열매다.

그런데 예수의 교훈 가운데 “포도원 농부” 비유(마태 20:1-16)같은 것은 fair하다고 보기 어렵다. 포도원에서 일한 사람들에게 삯을 주는데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일한 사람, 점심때부터 저녁때까지 일한 사람, 그리고 저녁때부터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 꼭 같은 한 “데나리온”씩을 줬다는 것이다. 아침부터 저녁 때까지 뙤약볕에 땀을 짜내면서 일한 사람이 “That’s not fair”라고 불평하는 것은 “사회정의”를 위해 당연한 “프로테스트”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fairness를 말할 때, “노동량에 의한 임금”이란 것보다도 “인간생활에서의 ‘일용할 양식’ 즉 최저한도의 생활비를 위한 노동”을 기준으로 했다.

여덟시간 노동한 사람은 통상적인 규례에 따라 일하고 통상적인 규례의 임금을 받아 그 날의 살림을 하게 된 것이고, 일하고 싶어도 일 시키는 사람이 없어서 실업자 노릇하는 사람들도 그들 최저한도의 생활은 보장되야 이난 자유와 삶의 위신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므로 없어서는 안될 생활비는 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가 어떤 제도에 얽매여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호의적인 인간사랑에서 넘쳐난 처사였다. “당신은 규례대로의 임금을 약속한대로 받았으나 불공평을 말할 근거가 없는 것이고 내가 내 호의에 따라 실업한 분들을 도운 것은 당신걸 축낸 것이 아니라, 내 것으로 한 것인데 왜 내 선한 자유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인가요?”, “내 착한 것이 당신 눈에 거슬리나요?” 여기서 우리는 fair – 사회정의가 인간화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의”라는 이름 아래서 인간 살육, 착취, 전쟁 등등이 “인기배우” 노릇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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