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8일 월요일

[범용기 제3권] (62) 北美留記 第一年(1974) - “민통” 총회에 갔다(1974년 11월 23일)

[범용기 제3권] (62) 北美留記 第一年(1974) - “민통” 총회에 갔다(1974년 11월 23일)


“민통”이란 이름은 “한국 민주회복 통일촉진 국민회의”의 약칭이다. 김대중 씨는 와싱톤에 주재할 동안에 그의 정치거점으로 조직을 서둘다가, 일본에도 같은 조직을 만들어 동시에 발족하려는 큰 뜻을 품고 일본에 갔다. 일본에도 조직은 됐다. 그러나 그가 8월 8일 동경 프린스 호텔에서 박정권 정보부대에 납치되자 일은 미완성으로 좌절됐다.

그후 와싱톤 민통과 동경 민통은 “가인”과 “아벨”처럼 성격을 달리했다. 그러나 김대중 씨는 두 군데 다 제1대 의장이었다.

와싱톤에서는 안병국 목사가 이 미완성 조직체를 떠맡았고 이근팔 씨가 실무자로 일생의 천직인양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 없는 “민통”은 시민의 정열에 불을 돋우지 못했다. 운영비도 말랐다. 체납된 전화료 대문에 전화를 떼우는 형편이었다. 납치된 김대중의 정치 아지트에 돈 내고 의심 받을 필요가 뭐냐 하는 것이 일반시민의 여론이었다. 그러므로 “민통”이 살 길은 어느 개인 정치가의 정치 운동 지점이란 테두리를 벗어나 범민주국민운동 본거지로 도약발전하는 길 밖에 없었던 것이다. 간판은 같으나 내용은 발전적으로 “지양”되지 않을 수 없었다. 와싱톤 민통본부에서는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밤낮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헌장 초안 작성 위원회가 선임되어 거의 완성 단계에 들어갔다. 새 헌장 통과와 그 헌장에 따른 기구개편 총회가 소집됐다. 와싱톤 사무당국에서는 “장공”에게 축사를 부탁해 왔다. 김대중 씨가 남긴 사업에 “축사” 쯤은 당연한 의무라 느끼어 11월 21일 와싱톤에로 날았다. 김대중 씨가 유숙하던 메이풀라워 호텔에 들었다.

11월 23일 오전 10시에 개회하여 동원모 부의장 사회로 의사가 진행됐다. 우선 헌장 초안 독회가 있었다. 축조토의하여 약간의 수정을 거쳐 통과했다. 새 헌장에 의하여 의장 한 명을 추대한다. 회원의 투표가 결정한다. 대회에 참가할 때, 회비로 8불을 내면 투표회원이 된다. 나는 단 위에서 회원석을 살펴 봤다. 세 갈래의 성분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은 정통적인 민주회원 그룹이고 (2)는 평상시에는 얼굴 한번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현장에서 8불씩 내고 회원된 사람들이고 (3)은 전혀 흥미를 갖지 않는 방관자 그룹이었다. (1)과 (2)는 수가 비슷했다. (3)은 소수여서 입구 구석진 모퉁이에 앉았다가 중도에 나갔다.

(1)은 장공을 추천한다. (2)는 임창영을 민다. 임창영은 절대사퇴를 선언하고 일장 연설한 다음에 퇴장태세를 취한다. 나도 절대 사퇴를 선언했다. 투표하기로 의결되어서 무기명 투표, 그 결과로 내 표가 몇표 더 많았다. 나는 기어코 승낙을 거부했다. 임창영은 퇴장했다.

민윤기 박사가 특별 발언을 했다.

“우리가 어른을 추대하면서 ‘투표’한다는 자체가 잘못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사과드리고 일제 기립하여 ‘장공선생’을 의장으로 모십시다”한다. “옰소”하고 함성을 올리며 일제 기립하여 박수했다.

그래도 나는 승낙을 거부했다. 거부하는 이유로서는 원격한 딴 나라인 캐나다에 살면서 일체 내무를 감찰지도할 시간도 능력도 없다는 것이다. 여기 저기서 쪽지가 들어온다. (1)은 지금 ‘장공’이 수습하지 않으면 민통은 저절로 해체되고 다시는 세워낼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이고 (2)는 우리가 여기까지 밀어온 전공이 가석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좌, 우, 중간 등 다른 성분인들의 집합이산(集合離散)에 견대녈 “뿌리”가 내려지지 못했다고도 한다.

그것도 그럴 것 같았다. 낫살이나 먹은 것이 돕지는 못해도 망개놓고 간다는 것이 부끄럽고 창피한 “도망자”일 것이다. 나는 승낙했다.

시정연설(?)이랄까 취임사랄까를 뺑○ 장소인 중국식당 “황후”에서 발표하고 산회했다.

김대중은 명예의장으로 추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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