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5일 금요일

[범용기 제3권] (42) 北美留記 第一年(1974) - Toronto에 왔다

[범용기 제3권] (42) 北美留記 第一年(1974) - Toronto에 왔다


11:00PM에사 토론토에 내렸다.

마중나온 식구들은 공항에서 3시간이나 기다렸단다. 기다리는 마음이란 짧은 시간도 지루하게 만든다. “待人難”이란 시구는 반드시 애인끼리서만 쓸 수 있는 구절이 아니리라.

꼬마 손주들도 다 나와 있었다. 지영과 하륜은 할아버지를 붙잡고 놓지 않는다.

네 살짜리 손자 하령은 할아버지 턱 수염이 무섭다고 달아난다.

“할아버지 무서워 괜히 기다렸다!”

한국 있을 때 독재반대의 표로 함석헌은 수염을 깎고 한신 교수들은 머리를 면도로 밀고 나는 수염을 길렀었다. 그런대로 여기 왔으니 아래 위에 수염이 너저분할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경용이 자기 차로 자기 Apt에 모셔 간다.

1974년 3월 장공이 캐나다에 재입국한 것은 영주권자의 당연한 권리여서 문제될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동료윤리” 때문에 장공은 약 2개월 후에 귀국할 예정으로 떠났던 것이다. 그것이 연기되고 차단된대로 8년을 지냈다. 이제는 캐나다 시민으로 캐나다에 정착했다. 지금의 “장공”은 자녀와 손자관계로서나 해외민주운동 관계로서나 삶의 뿌리를 북미주에 내렸달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공”은 맨처음 서울 떠날 때의 귀국 약속을 불문에 붙일 수가 없어서 스스로 불안해 한다.

“장공”이 서울을 떠날 부렵은 박정희 군정이 “욱일승천”의 기세를 올릴 때였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그는 “유신헌법”이란 이름의 자기 작품을 발표하고 자기가 만든 거수기를 통하여 단일후보 무경쟁, 만장일치(?)로 “대통령”이 됐다. 종신 대통령으로서의 Start선을 끊은 것이었다. “자유한국”을 염원하는 장공은 제4차의 자택감금을 당하고 있다. 이렇게 될 바에는 해외에나 나간다고 여권수속을 시작했다. 무난하게 발급됐다. 그러나 그 여권에는 캐나다 이외의 다른 고장에는 가지 말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캐나다 가시면 노년에 자녀 분들의 효양이나 받으시면서 편히 지내시지요… 미국엘랑 가지 마세요!”

이것이 집에까지 찾아와 당부하는 정보부 사람의 말이었다.

그런데 장공은 센트루이스, N.Y., 와싱톤, 필라델피아, L.A., S.F., 달라스, 뱅쿠바, 에드몬톤 등 민주운동 단체와 동지들을 방문했고 갖가지 Conference에 부지런히 참가했었다. “재미 한국인 크리스찬 학자회”에도 불참한 예가 없었다. 늙은이를 혼자 다니게 하기가 불안해서 내 서랑되는 이상철 박사가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그는 나의 북미주에서의 삶의 “목격자”다. 그 자신도 물론 착실한 민주동지로 일관한다.

필자가 지금 이 “범용”한 기록을 쓰는 것은 첫째로 본국의 수난민주동지들에게 “보고”하는 개인 서한 대신하기 위한 것이고 둘째로는 북미, 서독, 일본 등에 산재한 민주동지들의 호의와 헌신과 참여와 노고를 감사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캐나다에 이민한 내 가족들 이야기는 될 수 있는대로 생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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