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7일 수요일

[범용기 제3권] (126) 北美留記 第三年(1976) - L.A.에서의 남은 날들

[범용기 제3권] (126) 北美留記 第三年(1976) - L.A.에서의 남은 날들


4월 17일(토) - 4.19기념강연이 끝난 다음에 숱한 내 동문, 후배, 전 경동교회교우들, 민주동지, 옛친구, 친척 등 수십명이, 애기들까지 온 가족동반으로 인사하며 반긴다.

내 “강연” 듣기 보다도 “나”보러 나온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삶에 엉킨 인정, 사랑으로 맺어진 인간관계, 선후배, 사제(師弟)의 의리 등이 삶의 의미와 낭만을 아로새긴다.

4월 18일(일) - 오늘이 부활주일이란다. 홍동근 목사가 목회하는 할리우드 교회에서 설교했다.

예배 후에 예배당 앞뜰에서 부인회 주최 친교 Party가 있었다. 부인들이 손수 만든 시루떡을 나누며 옛날 얘기 요즘 얘기가 열심히 오가고 있었다.

6P.M.에 “서울옥”에서 36명의 동지그룹이 나를 위해 Welcome Party를 열었다.

이용운 제독의 환영사, 사회자 김상돈의 인사소개, 그리고 기억에 안남은 알맹이 뺀 좌담, 영웅담 등이 속출한다.

최옥명 권사 댁에서 “유련”한다.

4월 19일(월) - 김상돈 댁에서 조반 초대.

김운하 사장, 이용운 제독, 김상돈 시장, 김신찬 장로 등이 합석했다.

모종의 정치적 비밀회담인 것 같기도 했다.

알고보니 지난 75.8.16~17에 열렸던 시카고 민통총회 때에 만장일치로 가결된 L.A. 지방위 분규 타결안이 그대로 실천될 가망이 없다는 현 사태에 대하여, 의장의 재고려를 원한다는 것을 타진하려는 것과, 따라서 총회에 제출한 자기들의 안건이 그대로 살아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려는 것.

그리고 L.A. 지방위 문제가 시원스레 해결되지 않는 한, 지난 총회에서 결의된대로 다음 총회를 L.A.에서 개최한다는 것은 지방분규를 격화시킬 우려가 있고 지방으로서의 면목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의장인 나에게 양해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럴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지난 총회 이전으로 돌아간 상태에서는 다시 총회를 자신들의 고장에 초치할 면목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총회에서의 타결안을 그대로 실시할 책임은 L.A. 지방위에서 지기로 약속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이 사건 자체가 L.A. 지방위에서 자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성질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4월 20일(화) 김충국 목사와 사귀었다.

그의 안내로 일본서점에서 책 몇 권 샀다.

밤에는 차상달 선생 댁에서 L.A. 민주인사들의 간부회의 비슷한 모임에 참석했다.

서예가 운여(雲如) 김광업 선생이 지필묵을 갖추셨다.

志友들이 많이 모였다.

민주동지들 중에서 나에게 “글씨”를 청하는 분이 많기에 1인 1폭의 규례로 간단하게 써 드렸다.

그는 나에게 서예용 인태(도장) 네 개를 준다.

벽옥(碧玉)에 친히 써서 손수 판 것이다.

그후 13일째 되는 5월 8일에 그는 고혈압으로 졸서(卒逝)했다.

그때가 마감 만남이었다.

나는 그가 주신 “인태”(印)를 가보(家寶)의 하나로 간직한다.

그는 의사였다.

많은 자녀를 최고수준에까지 교육시켜 분가(分家) 독립시키고 혼자 옛집에 남아 서도로 외로움을 달래고 있었다.

그는 자가류의 서도를 창안했다. 아무도 모방할 수 없는 독특한 서체다. 그림에 추상화가 생기듯, 그는 추상서(抽像書)를 쓴다.

그는 온후 겸손한 한국어른이다.

내가 가면 대선배나 높은 어른을 모시듯한다. 민주동지로서의 “순정”이겠다.

그것은 일부러 꾸미는 “예절”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없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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