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2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136) 잠시 “런던”가 바람쐬고 다시 투위에(1969) - 런던

[범용기 제2권] (136) 잠시 “런던”가 바람쐬고 다시 투위에(1969) - 런던


Y대회가 끝난 다음에는 자유다. 다른 대표들은 국한된 여비라 곧장 귀로에 올랐지만 김은우와 나는 여비도 넉넉해서 런던에서 약 10일동안 무작정 방랑했다.

의젓한 번화가지만 길바닥 구멍으로 지하에 내려가면 섹스영화, 스트립쇼 등등이 쉴새 없이 연속된다.

그러나 거기가 유흥가 자체인 것은 아니었다.

‘트라팔가’니 뭐니하는 번화가 ‘로타리’에는 환각제에 취한 아가씨들이 머리를 두 무릎 사이에 박고 평토장으로 앉아 침을 흘리는 것도 눈에 뜨인다.

젊은 남녀가 무더기로 분수탑 언저리에 서고 앉고 했지만, 서로 말을 건네는 것 같지는 않았다. 모두 ‘멍’해서 실신자의 그늘진 표정이었다. 그게 ‘히피족’이라기도 했다.

‘하이델 팍’ 공원 입구에는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 인도에서 온 사람 등등이 즉석 연단에서 자기들 불평을 털어 놓는다. 전과 달라서 귀담아 듣는 사람도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너댓사람 섰다가도 가곤 했다. ‘하이델 팍’ 넓은 잔디언덕은 시원스러웠다. 공원 저편에 직장을 가진 사람들은 날마다 그 공원주변을 돌아야 하기 때문에 시간과 비용이 몇 갑절 더 든다고 한다. 그래서 공원 안에 직통로를 만들어 달라고 몇 번이고 청원했었지만 언제나 ‘NO!’ 였단다.

그 이유는, “이 공원은 런던의 폐(肺)다.”

하루는 강원룡 목사가 일부러 나를 보러 왔다. ‘하이델 팍’, 잔디언덕 외나무 밑에서 진종일 얘기했다. 그는 내가 이번에 출국한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중대한 책임자로서 이런 경우에 국외로 나온다는 것은 사기(士氣)에 관계된다는 것이다. 이제는 돌아가는 시기를 잘 택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자기가 먼저 들어가서 정황을 살피고 날짜를 알려드리겠단다.

나는 그가 유숙하는 고급호텔 라운지에서 와인을 나누며 진지하게 간담했다. 그리고 식당에서 정식 ‘디너’를 같이 했다. V.I.P.들의 호텔이라고 한다. 자못 귀족적이었다.

런던은 늙어가는 도시랄까!

한참 자식들을 키울 때에는 흥성한 대가(大家)였는데, 자녀가 모두 자라 시집가고 장가들고 제각기 분가해 나간 다음, 그 커다란 옛집에 늙은 부모만 남아 있다는 것이 런던의 인상이다.

열흘 후, 김은우는 빠리로 떠나고 나는 토론토로 직행했다.

대서양을 북으로 날아 북극권을 넘는다. 조금 졸다가 밖을 내다봤다. 맑은 햇빛에 흰눈의 세계다. 어느 설산(雪山) 위를 날으는가 했었는데 형편은 달랐다. 산꼭대기에 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눈 속에 산들이 통째로 묻혀 있었다.

높은 봉우리 끄트러미가 겨우 눈 위에 내민 것 뿐이다. 아 이런게 북극이구나 했다.

토론토에 도착하자, 강원용에게서 전보가 왔다. 곧 귀국하라는 것이었다.

투쟁위원회에서도 소식이 왔다.

3선개헌안을 반대하고 공화당을 탈당한 길재호 등 국회의워늘의 투표권을 살리기 위해서 신민당에서는 당을 해체하고 다시 창당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국회의원은 반드시 정당원이라야 하는데 어느 기성정당에서 탈당한 의원은 다른 기성정당에 가입할 수 없다는 것이 ‘박’이 만든 정당법이었다. ‘무소속’이란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신민당에서 해당하고 새로 창당하면서 그들을 포섭해야 할 형편이었던 것이다.

이렇게까지 악전고투하고 있는 이 마당에서 내가 여기 있을 수는 없다고 느껴 그 이튿날로 떠난 것이다.

김포비행장에는 가족들 이외에 대한일보사에서 나왔고 3선개헌반대위원회에서도 나왔다. 서로 나를 자기편 차에 태우려고 귀빈실을 서성거린다.

나는 “가족들과 같이 간다”고 끊어 말했다. 이철승은 역시 센스가 빨랐다. 우리 가족들을 슬쩍 자기 차에 태우고 함께 수유리 집까지 모시고 간다. 차 안에서 그동안에 된 경과를 보고하고 이제부터의 ‘프로’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집에까지 가서 내 식구들을 내려놓고 시내 사무실로 나를 데려간다.

이제 투쟁의 마감 고비가 남아 있었다. 몇주일 후에는 국회투표가 실시될 것이므로 일대 민중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길재호 등 공화당 탈당위원들은 신민당에 포섭되었다. 우리는 몇일 후에 효창공원에서 대연설회를 열었다. 대성황이어서 약 6만이 모였다. 장준하가 사회하고 내가 개회사를 했다. 그리고 야당 정치인들이 연설했다. 십여명 연사가 모두 연설가였지만 그 중에서도 역시 김대중이 제익 먹어드는 열설을 하는 것 같았다. 6만 청중이 온전히 매혹된 표정이었다. 그때만 해도 순사는 얼씬도 못했었다.

이런 집회가 두 번 있은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투표 전일에는 데모에 나섰다. 한파는 종로 경찰서 쪽으로 한파는 국회의사당쪽으로 행진했다. 후에 주일대사로 임명된 김영선이 나와 같이 국회의사당 쪽으로 걸었다. 유도 8단이라나 하는 장사가 나를 옹호하며 걸었다. 순사들이 달려들면 한팔로 밀어제치며 나갔다. 어쨌든 옥신각신 국회의사당까지 가긴 했었다. 젊은이들이 프랭카드를 들고 구호도 외치면서 시청 가까이까지 따라 올 수 있었다.

신민당수 유진오는 삼선개헌안은 결코 국회를 통과 못한다고 예언하며 낙관했었다.

삼선개헌 반대운동 때 받은 지워지지 않는 인상의 하나로서 청년들의 소탈한 행동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사무실인 종로회관 옆 대합실 비슷한 작은 방에 청년 십여명이 아침부터 밤중까지 매일 모여 있었다. 우리가 사무실에 들어오면 보리차를 갖다준다. 우리가 무슨 심부름을 시키면 그들은 영락없이 준행한다. 문자 그대로 손발노릇을 했다.

하루는 경찰에서 밤중에 그들을 몽땅 잡아갔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사무실에 나왔을 때 그 방은 여전히 명랑한 젊은이들로 꽉 차 있었다.

“웬 젊은이들인고?”

“우리는 제2진입니다”하고 대답한다.

“제2진이 잡히면 제3진이 또 있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한다.

C.I.A.에서 잡아다가 우선 불문곡직, 두들겨 패고, 다음에 경찰에 넘긴단다. 경찰에서 또 두들겨 패고 서대문 감옥에 옮긴다.

그래서 제1진은 서대문 구치소에 있다. 우리 늙은이들은 서대문 감옥에 방문을 갔다.

군사 쿠데타때 그걸 못하게 하려다가 실패하고 10년 징역을 끝내고 나온 ‘반역장교’도 몇분 우리 위원회에 끼어 있었기에 그들이 앞장서서 제집 드나들 듯 감옥문을 출입한다. 십년 사귄 간수라, “또 왔어?”하고 어깨를 툭툭 무사통과다. 우리는 들어간다.

학생 청년들은 한 면회실에 한사람찍 나와 있었다. 들창구멍으로 보고 말한다.

“얼마나 고생스러운고?”하고 인사를 하면 그들은 거의 한결같이, “괜찮습니다. 고생이 무슨 고생입니까? 저희 걱정은 마시고 민주운동을 계속해 주십시오. 나가면 저희도 또 하겠습니다.”

명랑하고 씩씩했다. 이런 젊은이들이 한국의 소망이라고 고마워하며 나왔다.

한 청년은 C.I.A.에서 무지무지한 고문을 겪고 풀려 나왔다.

몸 전체가 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몇 번을 기절했다고 한다. 그래도 기술자가 때리기 때문에 피터진 자욱은 없다고 쓴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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