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5일 금요일

[0126] 성도의 교제 / 1946년 10월

성도의 교제(누가복음 7:31-35, 고린도전서 12:12-26)


유교윤리에서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을 가르칩니다. 그 중에서 친구의 도리를 信, 즉 믿음에 두었습니다. 信이란 글자는 사람이 자기 말(言)을 옆에서 지켜본다는 뜻이랍니다. 信誼, 信仰, 信賴, 信實, 信用 등은 모두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것과 일단 말한 것은 그 말한 사람이 자기 말 옆에서 지킨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위에서 말한 五倫 중 넷은 모두 계층 윤리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붕우유신의 벗, 즉 친구라는 것은 웃사람, 아랫사람의 계층이 없습니다. 벗은 동등입니다. 벗은 서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도 하느님이 우리를 친구로 삼아 우리를 믿어 주시고 우리도 그를 믿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자 예수께서도 “내가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노라”,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그에서 더 큰 사랑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공자님도 友道를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위에 말한 오륜 중 네 가지 계층윤리 속에 붕우유신, 즉 벗의 도를 가미한다면 훨씬 원활하게 사귀어질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과 친하면서 동시에 아들의 친구가 되고, 임금과 신하가 의를 지키면서 임금이 신하의 친구가 되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다른 역할을 하고 신분과 직책에 구별이 있다 하더라도, 남편이 아내의 친구가 되고 아내가 남편의 친구가 된다면 그 생활 관계가 스무드하게 될 것입니다.

이조 유교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일곱 살 되면 자리를 같이 하지 않는다(男女七歲不同席) 하였습니다. 나란히 앉는다든지 마주 앉는다든지 하는 것을 못하게 한다는 말이겠습니다. 일본 유학자 중에는 ‘자리’란 말을 ‘잠자리’로 해석하는 분도 있습니다만, 政解라고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처녀 총각이 친구가 될 수는 거의 없겠습니다. 친구로 사귈 수 없다면 인간관계의 정상화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인간은 친구 없이 살 수가 없습니다. 서로 친구가 되고 친구를 만들어야 집단보호가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적에게 개별격파를 당하여 멸종될 우려가 있습니다.

친구 되는 길, 친구 만드는 길에 관하여 몇 가지 사항을 생각해 봅시다.

① 혈통입니다. 핏줄입니다. 같은 핏줄기 – 한 집안, 한 부족, 한 민족 등은 피로 맺어진 친구입니다. 속담에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습니다. 혈통이 친구 되는 큰 길임에는 틀림없겠습니다. 원시인의 부족단위적 복수관습은 친구로서의 엄숙한 의무였습니다.

일본 민족은 조상을 신으로 삼고 그와의 혈통관계로 단결합니다. 원시종교적 전승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위정자의 전략적 허구가 다분히 섞였을 것입니다만, 어쨌든 성공했다 하겠습니다.

② 문화와 환경이 친구를 만듭니다. 같은 환경, 같은 문화 속에서 자라난 사람은 친구가 되기 쉽습니다. 우리나라에서 西道는 서도로, 畿湖는 기호로 뭉치는 것은 그 환경과 문화와 전통이 그렇게 유도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취미로 모이는 것도 있습니다. 술꾼은 술꾼끼리, 낚시꾼은 낚시꾼끼리, 등산객은 등산객끼리 뭉칩니다. 동창은 동창끼리 모이기 쉽습니다.

③ 인격적 결합으로 친구가 되는 길이 있습니다. 혈육의 인간으로서는 가장 고귀한 友道라 하겠습니다. 소위 동지라는 것입니다. 동고동락하는 친구가 됩니다.

‘크리스찬 친구’란 것은 위의 모든 것을 갖고 있으면서 그 모든 것 이상의 友道입니다.

“육신으로 난 것은 육신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거듭 나야 하겠다는 말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가 하느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인데, 그것은 “혈통으로나 욕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느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3) 했습니다.

크리스찬 친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혈통으로나 본능으로나 수양으로나 습성으로 난 것이 아니고 위로부터 오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의가 무엇입니까? 옳은 것입니다. 옳지 않은 것이 불의입니다. 의가 서면 서로 친해집니다. 그러나 불의가 횡행하면 억울함이 늘고 원한이 맺히고 복수심이 탑니다. 친구 되는 길은 좁혀지고 원수 되는 길은 넓어집니다.

그러나 인간성 자체 안에 악의 뿌리가 숙명적으로 심겨져 있다고 할까요? 인간은 선을 원하면서 악을 행합니다. 친구로 지내다가도 자기에게 불리하면 원수로 표변합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고 한탄하게 됩니다. 모두가 자기 중심적이고 하느님 중심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우주와 인생의 유일한 구심점인 하느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시고 우리는 그의 사랑하는 자녀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독생자 예수를 우리의 죄 값으로 내놓으시고 그이의 ‘속죄死’로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의인으로 선포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의가 우리의 의로 된 것입니다. 이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나 떳떳하게 설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권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원수가 없습니다. 친구가 있을 뿐입니다. 사랑은 너와 나를 하나로 묶습니다. 그것은 밖에서 오는 압력 때문이 아니라, 따로 떨어져 살기 싫어서 저절로 합하는 것입니다. 물이 물을 만나면 기어코 합류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합해서는 무얼 하려는 것입니까? 땅 위에 하늘나라를 임하게 하는 일에 진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모두를 하느님의 친구, 우리의 친구로 삼으려는 운동입니다. 성도의 교제를 전세계에 넓히는 聖業입니다.

그런데 근년에 와서 유물주의ㆍ현세주의적인 세속의 파도가 ‘성도’라는 신자를 휩쓸어 갑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도 異敎化해 갑니다. 교회도 국가의 경계선을 넘지 못합니다. 교인도 민족의 한계를 넘지 못합니다. 교회 자체 안에서도 자기 교파 확장에만 열중합니다. 다른 교파들과 고락을 같이 하려는 우도를 상실했습니다.

교리적으로는 정통이니 이단이니 하고 마치 진리는 자파만의 전매 특허 상품인 것처럼 야단스럽게 굽니다.

체면을 차려서 서로 싸우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참친구’는 못 됩니다. 니체가 말한 ‘별 친구’(star-friend) 정도밖에 못 됩니다.

우리는 교회 행정에서 다양성 안에서의 통일성(unity)을 지향합니다. 그러나 타교파와 일반사회와의 사이에 있어야 할 community는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의 unity는 community로 발전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모든 기존교파를 조급하게 하나로 통합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교파나 자기들의 생겨진 역사적 필연성이 있을 것이고, 애정이 섞인 전통이 있겠고, 자기 양심의 자유와 가치기준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이점은 더 높은 구심점 설치를 요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거룩한 사랑의 친교가 그것입니다. ‘합동의도’ 이전에 ‘친교의 함양’이 배어들어야 할 것입니다.

사회, 국가, 세계 관계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힘센 제국이 약소국들을 군사적, 경제력, 정치력으로 압박하여 병탐함으로 한 세계국가를 세운다 해도 거기서는 그만큼 약자의 원한과 강자의 포악이 증대됩니다. 약소국들의 참친구가 되어, 보수를 기대함 없이 도와주고 기독교적 사랑으로 감싸주면 그들은 감사함으로 우리의 친구가 될 것이며 우리도 그들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교제’입니다.

[1946. 10]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