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17일 목요일

[범용기 제2권] (76) 인철ㆍ혜원 결혼 – 나의 캐나다 방문

[범용기 제2권] (76) 인철ㆍ혜원 결혼 – 나의 캐나다 방문


1958년 이른 가을 이미 예정된 캐나다 방문의 길에 올랐다. 9월 하순에 있을 캐나다 연합교회 총회에 ‘친선사절’(Fraternal Deligate)로 초청됐기 때문이라지만, 사실인즉 휴식을 위한 ‘전지요양’이었다.

해방후 첫 해외여행이다. ‘꼴불견’의 시골뜨기 모습이었을 것이다.

떠나기 전에 두 가지 일을 마무리해야 했다.

① 인철ㆍ혜원 결혼식을 치르는 일이다.

1958년 7월 12일에 경동교회에서 강원룡 목사 주례로 인철ㆍ혜원 결혼식을 올렸다. 두 집이 꼭같이 씻은 듯 가난했다. 좋게 말해서 ‘청빈’(淸貧)이다. 인철 어머니 혼자 진주에서 올라왔다. 그래서 신랑 편 가족석을 빛냈다.

인철은 자기 힘으로 백금 결혼반지를 마련했다. 그때 신학교 교수들도 모두 무료봉사나 다름 없었기에 내 주머니도 비고 말았다. 마침 예수교서회에서 ‘어드맨’의 출애굽기 주석 번역을 부탁해 왔다. 나는 그것을 한주일 안에 마감했다. 그 원고료가 결혼비용에 쓰여졌다. 장롱과 침대도 그런대로 준비됐다. 피로연은 경동교회 여신우회에서 차렸고, 회원 총동원으로 접대한다.

하객은 이삼백명, 교회당이 완전 만원이었다. 퇴장할 때 신랑은 거의 달음질하다시피 걷는다. 따라가노라고 더 잽싸게 걷는다. 백영렵 목사가 농담한다. “무던히도 급해 맞았네, 식을 벌써 올려주지 않고……” 하면서 내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찌른다.

신혼여행도 없다. 자동차로 시내를 한 바퀴 돌고서 수유리 학장사택에 왔다. 이층 침실이 ‘신방’이다.

혜원은 ‘이대’에서 도서관학과 속성과를 졸업했고 도서관 직원 자격증도 받았다. ‘한신’ 도서관에 직원으로 취직했다.

그래서, 남아 돌아가던 교수ㆍ직원 사택의 하나에 입주했다.

② 또 하나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경동교회를 강원룡에게 위임하는 일이다. 당회, 제직회, 공동의회를 거쳐서 경기노회에 위임 청원서를 냈다. 무난히 접수됐다. 위임식은 노회에 부탁하고 나는 캐나다에로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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