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30일 수요일

[범용기 제2권] (124) 재건 국민 운동

[범용기 제2권] (124) 재건 국민 운동


박정희가 아직 최고회의 의장으로 있을 때였다. 국민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였던지 “재건국민운동”이란 것을 만들었다. 의장은 이관구로 이미 발표됐다. 그러나 부의장 자리와 중앙위원 등은 아직 선정되지 않았었다.

하루는 홍종인이 기어코 신문회관까지 같이 가자고 조른다.

같이 갔다. 사람들이 배꾹 차 있었다.

‘재건국민운동 발기총회’란다.

이관구가 사회하고 있었다. 홍종인은 “김재준 박사님을 부위원장으로 추대합시다”하고 발언한다. 두말없이 박수환영이다.

나는 ‘국민재건운동’에 완전무식자니까 할 수 없다고 재삼 거절해 봤으나 통하지 않았다. 홍종인이 내 등을 밀어 맨 앞에 내세운다. 나는 퇴장하기도 안됐고 해서 나갔다. 취임사를 한마디 하라는 것이다.

나는 말했다.

“지금 ‘정부로부터 국민에게’ - 라는 ‘상의하달’(上意下達)은 거의 기계적으로 되지만 ‘국민으로부터 정부에’의 ‘하의상달’(下意上達)은 거의 단절됐다. 일반통행은 민주적일 수가 없다. 이런 마당에서 이 국민운동이 국민의 의사와 소원을 정부에 전달시키는 ‘하의상달’의 구실을 할 수 있다면 그런 조건에서 취임을 승낙한다. 그것이 안 되면 언제든지 물러난다”고 했다.

그후 무언가 모임이 잦았다. 시민회관에서 무슨 시국강연도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나도 연사로 몇 번 ‘데뷰’했다.

중앙위원회가 모였다. 국민의 소리를 정부에 전달하려면 우선 국민의 소리가 어떤 것인가를 기탄없이 직접 들어야 한다. 위원들이 총동원하여 둘씩 둘씩 짝지어 전국 각 지방을 뜯어 맡고, 직접 현지에서 그 지방국민들과 면담해봐야 한다는 제안이 가결됐다. 순회할 지방과 날짜까지 결정되어 사무국에서 그대로 진행시켰다.

순회한 위원들의 보고회가 열렸다. 그들이 발굴한 것은 모두 일상생활에 직결된 사건들이었다.

그러나 거의 90%가 현실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었다고 한다. 가능한 최선의 개선안도 구체적으로 제시된 데가 많았다. 우리는 그것을 정리하여 “이런 것이 ‘민의’였습니다”하고 최고회의 의장에게 보고하고 요청하기로 했다.

다 준비된 어느날 우리는 전원이 최고회의 의장을 그의 사무실에 방문했다.

약 30분 후에 박의장이 나타나 일일이 악수한다. 무던히 겸손하고 친절한 태도였다.

대변인이 준비한 문서에 따라 국민실정과 소원사항을 보고하고 선처를 바란다고 했다. 박의장은 우리의 노고를 감사한다면서 성의껏 하겠노라 했다.

그리고 “이런 국민사상, 국민도의, 국민의례 등등의 개선은 여러분이 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뜻을 받들어 저희들도 적극 협력하렵니다….” 했다.

그리고서 자리를 떠난다.

그러나 그 후에는 아무 소식도 없다. 얼마 후에 우리 사무국장이 현직 고급장교 누군가로 대체됐다. ‘재건국민운동’은 온전히 군대화했다. 그때부터 나는 이 운동 어느 회합에도 나가지 않았다. 얼마 더 있다가 이관구가 나가고 유달영이 의장이 됐노라면서 수유리 우리 집에까지 찾아왔다. 간곡하게 협력을 청한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거절했다.

그 후에 ‘국민의례준칙 작성위원’으로 기독교적인 각도에서 간결화한 내 초안을 내놓은 일도 있었지만, 결국 유교전통이 채택됐다는 것을 책이 나온 다음에사 알았다. 국민이 거의 전부가 유교 의례(儀禮)의 영향아래 있는 것이 사실인 한, 그럴 것이라고 이해했다. 어쨌든 간소화한 것은 사실이어서 결혼식 같은 것도 5분이면 거뜬이 끝나도록 되 있었다.

상ㆍ제(喪祭) 의례도 상상이상으로 간소해졌다. 일반사회에서는 많이 실천된 것으로 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도로묵이 됐다. 좋든 궂든 민속(民俗)을 고친다는 것은 하루 이틀에 되는 일이 아니라고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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