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28일 월요일

[1246] 한국인과 한국 역사 (1) / 1980년 11월

한국인과 한국 역사 (1)


(1980년 11월)

남의 허물은 보이지만 제 허물은 안 보인다는 속담도 있지만, 사실 사람이 자기 얼굴을 거울 없이 보도록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다행일지 모른다. 모두 제 잘난 맛에 산다는 것이 사실이고, 또 그래야 자살 케이스가 덜해질 것이 아닐까 싶어진다.

우리가 그동안에 미국도 원망해 보고 일본도 나무래 보았다. 그러나 따져보면 우리 자신이 주인이고 우리가 당해야 하고, 우리가 마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구한말 친일정권이 나라를 일본에 넘겨줬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당한 것은 우리 민족 전체였고 친일정권 몇 사람만이 아니었다.

지금 독재정권이 나라를 자기 개인의 사유재산같이 다루고 국민을 자기 머슴처럼 들볶는다. “네가 뭔데 그러느냐? 나라 망쳐먹는 짓 그만둬라.” 하는 애국지사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고 가두고 한다. 그따위 짓을 하고서 나라가 견디어낼 까닭이 없다. 더군다나 틈만 있으면 쐐기를 박아 넣는 강대국들이 이미 그 지렛대를 꽂아 놓고 있다. 그래서 나라꼴이 엉망이 되면 결국 당하는 것은 국민 자신들이다.

1945년 ‘해방’이란 미명 아래서 우리나라를 두 조각으로 끊어놓고 한 몸의 혈관을 돌던 핏줄까지 멈춰버린 것은 우리가 아닌 두 강대국이었다. 그러고서는 서로 미워하도록 부추긴다. 그러면 부추김에 고스란히 걸려들어 눈에 쌍심지 켜고 총부리를 겨눈다.

이번 광주사건에서 공수부대가 그렇게까지 잔악한 살육자가 된 것은 “빨갱이들 반란이다.” 하는 말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만일 이북에 쳐 들어간다면 어떤 짓을 할는지 예측조차 할 수 없겠다. “멸공이다!” 덮어 놓고 부수고 죽이고서 “국군 만세”, “통쾌하다”, “시원하다”, “이제야 군인으로서의 보람을 느낀다.” 하며 대접으로 술을 들이킬지 모르겠다.

우리 역사가 5000년이니 6000년이니 하지만, 민족국가로서의 의식구조가 어디선가 잘못된 데가 있길래 그런 것이 아닐까? ‘삼천리 금수강산’ 이니 ‘삼천만 문화민족’이니 하는 자화자찬에 도취하여 자기의 못생긴 얼굴을 미녀로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 벽이 온통 거울로 된 방에 안내해 줄 필요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모욕일까?

원래 우리 국토는 만주 전역과 시베리아의 흑룡강 유역과 연해주와 한 반도를 포함한 광대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중국과의 쟁파전이 잦았고 수 양제, 당태종, 당고종 등이 전 국력을 기울여 침입했었으나 그때마다 격퇴당했던 것이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오히려 중국 정복을 꿈꾸고 있었다 한다. 당나라에 조공물 보내는 것도 애당초 거부했고 신라와 백제가 중국 천자에게 매년 조공물 보내는 것도 못 보내게 도중에서 뺏어버리곤 했단다. 그러니 소위 대륙의 종주국으로 자처하는 중국이 체통을 세울 수 있겠는가? 그래서 밤낮 고구려 정복을 설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에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가 무서워서, 백제와 임나는 일본에 추파를 던지기도 했고, 신라는 당나라에 빌붙기도 했다. 백제는 일본이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자 역시 신라와 함께 당나라에 치근댔다. 그러나 고구려에 연개소문이 있는 동안에는 당나라도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수나라가 612년에 평양을 침범하다 을지문덕 장군에게 전멸되었고, 613년의 제2차 침범에도 실패, 614년 제3차 침범에서도 실패했으니, 천자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무리한 강행군 때문에 수나라는 국력이 피폐하고 민심이 해이해져 결국 몰락하고 618년에 당나라가 건국됐다. 당나라는 수나라 잔당을 소탕하고 628년에 천하를 통일했다.

당태종은 정치가였으므로 군사행동에는 지극히 신중했다. 부전승(不戰勝)을 노리고 있었다. 그래서 신라, 백제, 고구려의 화해를 권고하면서 고구려 침공의 구실을 기다리며 군사 준비도 진행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642년에 고구려의 명장 연개소문이 왕을 죽이고 왕의 생질 보장(寶藏)을 세우고 자기는 막리지(섭정 비슷한 총리대신)가 되어 국정을 전담하고 있었다. 중국 천자로서는 고구려를 ‘번병국(藩屛國)’, 즉 중국의 안보를 위해 병풍처럼 둘러 세운 변방 위성국으로밖에 보지 않는 터였으므로 그런 ‘하극상’의 반란(?)을 묵과할 수는 없다 하여 군사행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643년에 신라가 당나라에 원병을 청해 왔다. 645년에 당태종은 출병하여 고구려의 안시성을 포위했다. 그 성은 요하(遼河) 바로 가까이 있는 요충지였는데, 성주 양만춘의 완강한 저항 때문에 당태종은 참패하여 철군하고 말았다.

647년에 당나라는 다시 이번에는 해군을 편성하여 산동에서 황해를 곧장 질러 평양성을 에워싸고 육군은 요동을 통하여 만주로, 압록강을 건너 평양을 치기로 했다. 신라는 고구려를 족칠 천재일우의 기회라 생각하여 김춘추와 그의 아들 문왕을 당나라에 보내어 당나라의 문화적, 정치적 예속국이 됨을 자인하면서 고구려 침략만을 애원했다.

661년 당나라에서는 소정방을 총사령관으로 하고 신라군을 그의 지휘하에 두어 주로 군량대기, 군수품 운반하기, 길 인도하기, 정탐작업 등을 맡겼다. 그리고 소정방은 신라의 전력소모를 노려 혹사에 혹사를 거듭했다 한다. 사실 당나라의 출병 목적은 고구려만 먹고 만다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길에 신라와 백제까지 먹어치우자는 심보였기 때문에 고구려와의 전쟁 중에 신라의 국력을 피폐하게 하는 것이 후일을 위해 일거양득이 된다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662년에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사천에서 당군을 대파했다. 그래서 당나라 고종은 고구려 침략을 일시 단념하고 철군했다.

그런데 666년에 고구려의 영웅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 둘이 서로 아비의 권력계승을 경쟁하다가 둘째아들이 바통을 넘겨잡았기에 장남인 남생(男生)은 당나라에 망명했다. 아마도 자기 나라 사정을 고해바쳤을 것이다. 당 고종은 고구려 침략의 구미가 동해서 다음해인 667년 7월에 신라에도 출병을 명령하고 고구려 침략전쟁을 시작했다. 고구려는 기껏 싸웠지만 중과부적으로 668년 9월 21일에 항복하고 말았다.

애당초 당나라는 고구려를 정복하면 압록강 이남은 모두 신라 땅으로 하고 만주만은 자기들이 가진다는 약속이었다 한다. 그러나 통일신라는 겨우 청천강 상류 정도에서 금 그어졌고 북으로는 함경남도의 일부에 국한된 것이었다. 당나라 소정방은 철군할 때 예정대로 신라까지 먹으려 했으나, 군량 부족과 병졸의 피폐와 신라군의 항전 때문에 그 계획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백제는 당연히 신라에 줘야 할 것이었으나, 당나라는 백제에 자기들의 도독부(총독부 종류)를 두고 반 신라운동의 거점으로 만들어 신라를 괴롭히는 일에 협력했다.

이제 생각건대 고구려의 멸망이 그대로 한국인과 한국 역사의 결정적인 분수령이 되었다고 하겠다. 그때부터 우리 민족과 우리 역사는 외세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고 위축 일로를 걸었다. 고려에서 실지 회복을 위해, 북벌을 꿈꾸었다. 하지만 그것은 백일몽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부터 우리는 우리 민족과 우리 역사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보고 억지로 미화하는 헛된 자랑에 부풀지 말아야 하겠고, 우리 민족의 얼굴도 있는 그대로 거울에 맞세워야 하겠다.

해방 후, 국사 연구에 큰 진전이 있었고, 국내 많은 국사학자들의 참신한 저서도 많이 간행되었다. 일본의 양심적인 신진 역사학자들도 ‘조선사’에 대한 일본 식민주의자들의 정략적인 허위 기록들을 고발하고 조선 역사의 바른 얼굴을 발굴하려고 성의를 다하고 있다.

국토

만주를 잃은 우리 국토는 빈약하다. 뼈만이 앙상한 산악지대다. 경작 가능한 국토 면적이 전 면적의 5분의 1이라고도 하고 8분의 2이라고도 한다. 그러니까 대부분이 산지니만큼 그 산을 어떻게 개발하느냐가 문제의 핵심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당국에서의 국토개발정책에는 졸렬하고 무성의한 점이 너무 많았다. 적어도 국내 산업에서의 목재 자급자족은 있어야 체면이 설 것이 아니겠는가? 공업을 근대화해서 공업산품 수출로 목재를 수입하면 되잖느냐 한다. 그러면 그동안에 우리 삼림은 간 데마다 울창했어야 할 것이고, 종국에는 우리 목재로 대체해야 외자관계도 과증을 면할 게 아니냐? 그러했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런 실용주의적 면을 외면하고서라도 산과 나무란, 생명적인 일체여서 나무 없는 산은 헐벗은 거지꼴임에 틀림없다. 아무리 가파른 산에, 만숨의 소낙비가 내린다 하더라도 몇 자 깊이의 낙엽이 깔려 있고 나무 아래 잡초가 무성하면 급류에 의한 사태는 감소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남한에서의 농공병진정책의 실패는 근원적인 파탄을 우리 역사에 심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겠다.

우리가 국토를 논할 때, 38선 이북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우 리는 38선 이북은 우리 국토에서 제외된 지역인 것같이 여긴다. 이북에서 월남한 분들은 몰라도 대대손손 이남에서 살던 분들은 선영도 고향도 이남이니만큼 이북에 대한 관심이 그다지 절실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우리 국토’라면 이남과 이북이 합한 것이지 그 어느 한 동강이만이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이북을 방문한다는 것은 내 나라, 내 땅, 내 고향에 가는 것이지 적지에 스파이로 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남과 이북 행정 당국자들이 똑같이 반성해야 할 근본 자세인 것이다.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이북은 고구려의 본토다.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가 없어질 수 없는 한, 이북은 영원한 우리 ‘국토’다. 우리 역사에서 유서 깊은 산들을 보라! 백두산, 묘향산, 금강산, 구월산이 모두 이북에 있지 않은가? 단군, 기자, 위만 조선 등등이 모두 이북에 심어진 신화와 전설과 역사가 아닌가? 우리가 어떻게 이북을 우리 국토에서 소외시킬 수 있겠는가?

민족

우리 민족은 퉁구스족의 일파라 한다. 기원전 3000년 즈음에 만주와 시베리아로부터 한반도에 들어왔다고 한다. 고구려는 퉁구스 민족 이동의 최종단계에 속한다는 것이다. 고구려는 만주에서 부여족과 혈연관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부여의 왕자 고주몽의 남하(南下)와 고 온조(高溫祚)의 남천 전설로 보아 고구려인이 북방 민족이었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 더 먼 연원은 몽고족에 이어진다. 그 무렵에 한반도 남쪽 해 안에는 이른바 삼한(마한ㆍ진한ㆍ변한)이 이미 정착해 있었는데, 남쪽 바다의 먼 섬들에서 옮겨온 족속들이 아닌가 한다. 몸 모습의 형태로 보아 고구려는 키 크고 얼굴이 길쭉하고 관골이 나오고, 삼한 사람들은 얼굴이 둥글고 키가 비교적 작고 언어의 유사성으로 보아 남방에서 옮겨온 드라비디안 족과도 인연이 있지 않은가 한다.

최남선은 한국 민족을 진단인(震檀人)이라 하고, 진단인의 옛 중심지는 지금의 만주요 송화강 유역인데, 여기서 이동하여 북으로는 흑룡강 저편까지, 동은 연해주, 서는 홍안령까지의 사이에 무더기 단부(團部), 즉 집단 부락 같은 것을 이루었고, 남으로 내려간 이동민은 갈래로 나누어져, 반도로 들어간 분대는 지금의 조선인 직계 조상이 되고 동남으로 바다를 건너 섬들에 상륙한 일대는 일본의 근간 민족이 되고 서남으로 요하를 건너 중국 대륙에 들어간 부족은 중국인이 말하는 ‘동이(東夷)’가 되었다고 했다(최남선, 『이씨조선』)

대체로 그렇게 말할 수 있을는지 몰라도 한반도 남해안 정착민은 반드시 북방 민족의 직계랄 수는 없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북방 민족 도래 이전에 벌써 정착하여 독자적인 신화와 전설을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언어와 문화에 있어서 한국 민족 형성에 원조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조선 후반기 928년 동안을 ‘기자조선’이라고 하는데, 기자는 은나라 마감 임금 ‘주’라는 폭군의 아재비뻘 되는 어진 이로서 ‘주’가 죽이려는 흉계를 품고 있음을 알고 한반도에 망명하여 평양에 왕조를 세웠다고 한다.

최남선은 이 기자동래설을 부인할 뿐 아니라, ‘기자조선’이란 역사 자체의 존재를 부인했다. 그 당시의 문서 재료라도 발굴되지 않는 한, 뭐라고 단정하기는 어렵겠지만, 어떤 경로든 간에 그 무렵에 중국 문화가 우리나라에 전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 문화는 신석기 시대부터라는 것이 정설이었지만, 그 후에 웅기 패총 속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굴됨으로 해서 대륙문화와 시대적 차이가 별로 없었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흔히 단군은 ‘여요병립(與堯佛立)’이라 하여 중국의 고대 성군인 요임금과 동시대라 했으니, 중국 문화와 병행한 셈이다.

중국의 한나라 시대는 중국의 전성시대의 하나로서, 몽고, 서장, 청해, 인도, 유럽까지 그 위력을 떨쳤다. 그러니 한반도를 그대로 둘 리가 만무했다. 기원전 194년쯤에 한무제 유철은 한국을 침략하여 점령하고 평양에 ‘도독’을 두고 네 고을로 나누어 한국을 통치했다. 한국과 한국 민족은 중국의 피정복 국가와 민족이 된 것이었다.

그 후 침략자인 중국과 싸워 끝끝내 중국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우리나라를 독립시킨 것은 고구려였다. 남쪽의 ‘삼한’도 마음은 같았을지 몰라도, 한나라 통치세력이 남쪽에까지 속속들이 배어들지 못했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로웠고 또 서로 단합되지 못한 삼한은 한나라 군사력에 대항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일은 고구려가 맡을 밖에 없었고, 고구려는 수다한 분할 격파 끝에 마침내는 광복의 위업을 해치울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313년이었으니까 콘스탄틴 대제의 밀란조칙과 같은 해가 된다.

그 후의 고구려는 광개토왕의 전성시대를 거쳐 한반도 안에서의 삼국 통일을 밀고 나갔던 것이다. 고구려는 중국의 끊임없는 침입을 막아내면서 동시에 신라와 백제를 도와 ‘왜구’의 산발적인 약탈을 토벌하고 동시에 국내적으로 삼국의 통일을 달성하려는 두 겹, 세 겹의 민족적 의무를 수행해야 했던 것이다.

이 경우에 유일한 해결책은 삼국이 친화하여 불가침조약을 맺고 국내의 후환을 없앤 다음에 외세와 대결하는 것이었다. 신라의 김춘추는 큰마음 먹고 이 사명을 위해 고구려를 방문했다. 그런데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믿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 국정내사를 위한 스파이로 몰아 감금해 버렸다. 이것은 크게 유감스러운 비극이었다.

연개소문에게 알려진 ‘신라’는 당나라와 고구려에 양다리 걸친 불성실한 술책외교로 보여진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원교근공(遠交近攻)’이 동양 외교의 전통이었다지만, 삼국싸움은 집안싸움이었으니만큼 실패할 셈치더라도 ‘연개소문이 김춘추를 믿어줬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믿지 못하더라도 국빈으로 우대하고 회담의 여백을 남겨두었어도 그리 야박스런 처사는 면했을 것이 아닐까?

김춘추는 친구의 도움으로 다행히 탈출 귀국했지만, 다급해진 그는 앉아서 고구려에 망하느니보다는 당나라와 짝하여 고구려와 싸워 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보기로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연출됐던 것이다.

통일신라는 그리 자랑스러운 통일이랄 수도 없으니, 왕건의 통일 고려로 뛰어넘어 본다면 그의 정치적인 꿈은 무던히 큰 범위였다고 하겠다. 그는 고구려의 후계자로 자처하고 고구려의 실지, 즉 만주를 회복하려고 중국 왕조의 변동에 예의 주목하면서 북벌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회는 끝내 오지 않았다. 고려 마지막 왕인 공민왕은 백전백승의 기록을 가진 명장 이성계에게 북벌을 책임지도록 해 신의주까지 가게 했으나, 그 군사가 장비도 훈련도 없는 오합지졸인 데다 여름의 만주는 홍수와 교량 불비로 군용도로가 막혀 수송기능이 마비될 우려가 짙으며, 이 거국적인 원정을 기화로 왜구의 본격적인 침입이 유발될 공산도 큰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국정을 전단하던 최영의 이성계 제거 음모도 계산에 넣고 봐야 했던 것이 아닐까? 이성계는 마침내 회군을 결성했다. 그 당시 고려는 귀족이 판치고 국민은 농노로 착취만 당하는 판이었다. 이런 때 백전백승의 명장 이성계가 농민들 편에 선다면 귀족사회는 당장 뒤집혀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는 신중했다. 그는 끝까지 고려조에 대한 충성을 지키려 했다. 적어도 지키는 체했다. 그러나 고려조는 이미 기울어져 다시 세울 가망이 없었고 괴승 신돈의 장난과 원나라의 압정 때문에 점점 원기가 소진됐다. 결국 이성계 왕조가 서고 이조 500년 역사가 한성을 수도로 시작됐다.

위에서 대강 추려본 우리 역사에서도 우리가 반드시 반성해야 할 몇 가지 ‘얼굴’들이 발견된다. 그 첫째는 우리 민족의 샘줄기가 무척이나 길고 오랜 데서 흘러흘러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나무로 비겨 말한다면 적어도 6000년 자란 거목이라 하겠다. 그동안에 폭풍과 한설과 병충해와 살벌의 재난이 자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생명이 끈덕지게 연륜(年輪)을 창조하고 있다는 민족적 ‘믿음’을 자랑할 수 있겠다. 둘째로는 삼국시대에 세 나라가 연맹체, 즉 공동운명체로서의 연방제 같은 기구 조직에 실패했다는 데 대한 유감이고, 셋째로 외세에 빌붙어 동족을 멸망시켰다는 사실이 민족적으로 부끄러운 처사였다는 데 대한 의식이 아직까지도 흐리터분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파헤쳐야겠다는 것이다. 넷째로 고려 태조 왕건은 예외일지 모르나, 대체로 보아 폭넓은 대정치가라기보다는 자기 목전의 권력 유지에 조바심하는 정략가 정치꾼에 머물고 마는 좀스러운 행정가가 거의 전부였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섯째로 국가와 민족 전체로서의 구원한 나라 설계보다도 당면한 왕조에 충성, 또는 굴종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경향이 습성화했다는 것여섯째로 왕조가 변혁될 때에 시정 방침에는 새로운 포부가 제시되고 실천되지만 황금시대는 언제나 과거에 두고 결국은 복고주의에서 안주를 찾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왕조’ 변혁은 혁명이 아니었다는 것 등이 지적될 수 있을 것 같다.

또 하나 부록같이 붙여 쓰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삼국시대에 다른 나라로 옮겨 산 우리 민족들 기록이라 하겠다. 특히 동해를 건너 일본에 이주한 사실이다. 그 당시 우리 민족은 비교적 높은 문화를 갖고 있었다. 끊임없는 전란을 피하여 우리 문화기술인들이 우리 문화재를 갖고 일본에 가서 그것을 전했다. 이것은 그리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이기 때문에 그 당시의 작은 목선에 귀중한 문화재를 싣고 바다를 건넜다는 것은 목숨 걸고 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험적인 문화 보존과 전달이 일본 민족의 문화 의욕을 돋우어 일본 문화를 촉진시켰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며 구태여 부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일본 군벌들이 그것을 일본 민족의 위신에 관계된다고 일부러 말살하려 했다면, 그것은 옹졸한 마음가짐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민족은 일본에 문화를 전했다. 그런데 오랜 후일에 일본은 총칼로 우리 민족을 찌르고 나라를 통째로 먹었다. 소화능력이 모자라 뱉어버리긴 했지만 지금도 뱀처럼 두 가닥 혀끝을 남실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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