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28일 월요일

[1073] 고난과 부활의 함수관계

고난과 부활의 함수관계


우리는 수난의 역사를 살아온 민족이다. 그러니만큼 고난의 도전에 대한 우리의 응전 태세는 우리의 운명을 좌우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 고난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어본 일이 있는가?

고난이 무서워서 피하기만 하는 경우도 있고, 사주팔자라고 체념하는 이도 있고, 달관한다고 웃어버리기도 하고, 번영으로 극복한다고 발악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것들은 인간이 되기 위한 진지한 사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조건반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이런 행동들의 배후에는 그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의 핵심을 폭파시킬 정도로 심각하지 못하다.

옛날 이스라엘 민족도 유별나게 수난의 험로를 걸었다. 그런데 그들은 고난을 지나가는 바람같이 하나의 환경 문제로 보아 넘기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자신들의 인간됨 속에 마셨다. 그리고 그것을 그들의 인간 실존에 소화시켜 새로운 가치를 만들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은 그 결과였으며, 고난이 인간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증명했다. 부활은 십자가의 역설적인 변질이었다. 죽어서 사는 참 삶이었다. 이것이 기쁜 소식이었으며,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전 세계에 메아리칠 소식인 것이다. 이제 이 좁은 문을 향한 순례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로 한다.

“땅이 슬퍼하며 마른다. 세계가 통곡하며 시든다. 하늘이 땅과 함께 통곡한다. 땅이 더러워졌다. 그 주민들 때문에. 그들은 율법을 범하고 규례를 거스르고 영원한 언약을 깨뜨렸다. 그러므로 저주가 땅을 삼켰다. 그리고 그 주민들은 그 죄과로 고통받는다. 그래서 땅의 주민들이 타서 남은 자 거의 없다.”(사 24:1~6)

“땅이 그 주민에게 더러워졌다.”는 것이다. 자연 질서가 도덕 질서에 함께 말려든다. 두 질서는 겹놓인다. 인간에게 내리는 심판에 자연이 고난받고 자연의 고난에서 인간이 고통한다. 범죄한 아담에게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낸다.”(창 3:18)

인간과 자연이 한데 어울렸다. 인간은 자연의 청지기다. 청지기를 잘못 만난 자연은 고난받고 그 청지기는 자신의 잘못으로 고난받는다. 이런 점 에서 고난은 인간의 죄와 관련된다. 그렇다고 모든 고난이 죄의 값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것을 위험한 속단이다. 부(富)는 복이요, 빈(貧)은 저주라고 단정할 정도로 ‘나이브’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수난자 자신이 고난 중에서 신앙적, 도덕적으로 자기 반성의 계기를 포착하는 것은 예외의 축복이라 하겠다. 그 고난이 인간 회복의 전환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애당초부터 고난을 기피하거나 고난을 웃어넘기거나 고난을 안일로 바꾸는 것 이상으로 ‘인간화’에 공헌하는 것이기 때문 이다.

“피로 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으라…… 정 할 때가 있으니 그 끝이 속히 오리라. 더디더라도 기다리라. 정령 그대로 되리라.”(합 2:12, 13)

내 나라의 악정과 외국의 침략에 극도로 괴로운 백성을 보며 “인간을 낚시로 채고 그물로 후려잡는 자들”이 어찌하여 심판대 앞에 서지 않는 가 하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하박국은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며 애타한다. 그러나 이 ‘망대의 예언자’에게 주어진 대답은 “비록 더디더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꼭 응하리라.” 하고 말한 것이었다. 괴로워도 참고 기다리라. 미래에 반드시 시정된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고통에 참고 기다리는 장기가 있다. 6・25 때의 그 끈덕지게 참은 것을 생각해 보라. 임진왜란 때, 몽고 침략 때 버림받은 백성들의 참고 견딘 것을 보라. 수난자의 참는 얼굴은 성스럽다. 우리는 사육신의 얼굴에서 그것을 본다. 그 참음에는 의가 죽음보다 강하다는 신념이 불타고 있다.

“나는 내 변호자가 살아 계신 줄 안다. 결국 그는 땅 위에 서리라. 그리 하여 내 가죽이 후패하고 내 살이 없어진 후에 나는 하나님을 보리라. 내 옆에서 내 눈이 그를 보리라.”(욥 19:25~27)

욥기 중에서도 무던히 문제 많은 구절이지만, 키세인(Kissane)의 설명에 의한다면, 욥은 최악의 경우 죽음 가운데서도 자기의 순결한 양심은 그대로 기억될 것이라고 믿었으며, 하나님이 그를 위해 행동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고통에 지친 욥은 더 오래 참고 기다릴 여백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이제 죽음이란 종점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결백한 양심은 죽음에 삼켜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변호자로서의 하나님을 보았다. 고통이 죽음에로, 그러나 ‘스올’의 문전에서 그는 하나님을 본다. 고통은 하나님께로 가는 순례의 험로였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다.”(사 53:5)

고통이 회개의 기회도 되고 참음의 훈련도 된다. 신앙에의 관문도 될 수 있다. 사랑하는 아들을 채찍질한다. 그것은 고통이 인간을 단련하기 때문이다. 하와이 대나무는 보기에 미끈하지만 물러서 용재(用材)가 못 된다고 한다. 고난의 기후가 대나무를 탄탄하게 만든다. 그러나 고난의 윤리는 속량고(贖良苦)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남의 죄를 내가 대신 지고 고난을 겪는다. 그보다 더 숭고한 사랑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인간 구원의 능력이란 것은 이것이 인간애의 극치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생각한다. 고통의 가치는 그 고통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고통을 받느냐 하는 데 있다. 범죄의 결과로 오는 고통은 죄의 값과 상쇄된다. 그중에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돌이키면 하늘나라 가치로 전환된다. 자연 질서를 무시함으로 오는 고통은 불을 만져 손 데우는 어린애와 같다. 무지하지만 죄는 없다. 징벌보다도 계몽이 요청된다. 이기 일변도에서 오는 고통은 자업자득이다. 행악에서 오는 고통은 심은 대로 거두는 악과다. 그러나 선을 이해한 고통에는 영광이 머문다. 남을 위해 수난하면 남과 내가 어울려 즐겁게 된다. 거기에는 감사와 보람이 어울린다.

불의한 환경 속에서 의를 말하면 고난이 온다. 그래서 세대가 악하면 의인이 잠잠하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에게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라고 분부했다. ‘예’와 ‘아니오’를 똑똑히 하는 것만도 큰일이다. 여기서 불의가 가면을 박탈당하게 되기 때문에 발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래서 왔다. 그러나 그 고난 없이는 의가 서지 않는다. 이런 고난은 다음에 올 부활의 씨앗이다. 심지 않은 씨에서 새싹을 기대할 수 없는 것같이 고난 없는 부활은 기대할 수 없다.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교회가 무사주의로 나간다는 것은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어서 거짓 메시아의 신도밖에 되지 않는다. 고난 없는 십자가는 공허하다. 그것은 하나의 예술품이거나 노리개일 수는 있어도 예수가 진 십자가는 아니다. 제자들이 진 십자가도 아니다. 거기에는 피도 살도 생명도 없다. 허수아비다. 십자가가 교회라는 무덤 앞에 선 비석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고난은 진짜 내 살을 찌르는 가시다. 내 손발에 박는 못이다. 긴장과 각오 없이 말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다.

고난은 교회를 심판한다. 신자의 시금석이다. 교회는 고난 앞에서 긴장한다. 그러나 교회는 거기서 미화된 속죄론 속에 도피하여 거룩한 안 일을 탐한다. 신학이 십자가의 도전을 막는 방패가 된다. 이런 표현은 과 한 말일지 몰라도 대체로 타당한 충고일 것 같다. 고난이 오면 교회는 둘로 갈라진다. 피하거나 타협하여 무사하려는 다수와 고백하고 믿음을 지키려는 소수가 생긴다. 수의 다소는 반드시 그럴 것이 아니겠지만 히틀러 시대의 독일 교회에서도 그렇게 나타났다. 알곡과 쭉정이가 갈라지는 모양이니 심판이 아닐 수 없다. 무풍지대에서 외치기는 쉽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 고백하기는 어렵다.

지금 구미 신학자들은 혁명을 입버릇같이 말한다. 그러나 고난 없는 혁명이 어디 있겠는가? 혁명은 안락의자에 앉아 논하기에는 너무 거친 어휘다. 충족된 자기 안전에서 한 걸음도 내디디질 않으려는 중산층에 머물면서도 혁명은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다. 생각만이라도 고맙다고 해두자. 하기야 행동주의 이전에 두뇌가 필요할지 모르지만 실질적으로는 행동과 브레인은 동시에 서로 작용한다.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자동차는 운전사(두뇌)와 차가 동시에 일한다. 행동하면서 결단한다. 듣건대 미국에서는 그 사회 전반의 심층부에서 가장 근본적인 혁명이 진행되는 중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부르주아 혁명이나 공산 혁명 따위가 아닌 진짜 밑바닥 인간 혁명이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경하할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서운 고난의 길을 통과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카타콤 없는 크리스찬 로마를 상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부활은 고난에 활력을 제공한다. 부활 신앙 없는 고난은 인간을 좌절 시킨다. 희망없는 인내는 굳은 떡같이 딱딱하다. “진리는 단두대에 오른다. 그러나 미래는 그의 것이다.”라고 할 때 우리는 진리의 부활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선 속에 내포된 부활력을 믿는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나 주의 말씀은 영세토록 있다.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다.”(벧전 1:24~25)

이 영세토록 있는 주의 말씀이란 박물관 진열장에 간직된 골동품처럼 영구 보존의 딱지가 붙었다는 말이 아니다. 주의 말씀은 역사의 토양 속에 심어진다. 변천하는 세속의 물결 위에 주의 말씀은 던져진다. 심어진 주의 말씀은 부실한 종자가 아니다. 반드시 싹이 나서 5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가 또 심어져서 이번에는 몇 천 배가 된다. 이리하여 주의 말씀은 영세토록 있는 것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심어져 몇 백 배로 결실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말씀의 부활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리스도는 몸을 이룬 말씀이다. 몸을 이룬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다. 죄과도 허위도 없는 몸이 속죄 제물로 제단에 던져졌다. 죽어서 무덤에 들어갔다. 그러나 거짓이 진리를 이길 수 없고, 악이 선을 이길 수 없고 죽음이 생명을 이길 수 없다. 일시 이기는 것 같아도 그것은 ‘이김으로써 지는’ 역설이다. 우리는 그것을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처음 익은 열매로 받았다. 참 크리스찬은 적진에 둘러싸여 진다. 죽음에 삶을 던진다. 무덤 속에 몸을 묻는다. 그러나 부활의 씨가 그 속에 심어져 있다. 결국에 적은 흩어지고 죽음은 생명에 삼킨 바 되고 무덤은 열린다. 고난과 부활은 연속극이다. 그 어느 하나도 다른 하나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교회는 부활을 찬미한다. 죽었던 주님이 다시 살아 우리를 만나 주시니 기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찬미한다. 이제 또 하나의 과제가 있다. 부활이 우리 자신의 실존에 사건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죽어도 산다’는 것은 영혼 불멸을 의미함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들의 부활을 보며 하는 말이다. 우리가 진정 부활을 믿는다면 불의 앞에서 비겁하지 않을 것이다. 참과 거짓을 바꿔치고서 무사하다고 좋아할 수도 없을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잡힐 줄 알면서도 부득부득 예루살렘으로 갔다. “내가 그리스도 때문에 죽는 것도 사양치 않는데 잡히는 것쯤이 문제냐.”라고 했다. 그는 어떻게 하든지 그리스도처럼 고난을 받고 그리스도처럼 죽고 그리함으로 그리스도처럼 부활에 참 여해 보겠다고 결심했다. 그런 사람을 이겨낼 힘이 있겠는가? 그는 혼자서 로마를 이기고 만 것이었다.

오늘의 크리스찬은 역사를 맡았다. 그리스도가 역사의 주라면 크리스찬이 역사를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하나님은 역사에 근본적인 혁명을 일으키고 계신다. 크리스찬이 이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크리스찬 이외의 사람들을 불러낼 것이다. 그런 경우에 새 역사는 크리스찬을 멸시하고 제외하고 또 짓밟고 넘어갈 것이다. 이것이 크리스찬에게 임할 심판이 된다. 말하자면 심판의 대상이 뒤바꿔진 셈이다. 그리스도는 새 역사 속에 새로운 형태로 부활할 것이며, 새 역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형성될 것이다. 그러나 “악하고 게으른 종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이를 갈며 통곡할” 것이 아닐까?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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