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29일 화요일

[0729] 비기독교적 종교에 대한 이해 / 1965년 11월

비기독교적 종교에 대한 이해


《기독교사상》(1965년 11월)

[1] 종교는 절대 또는 절대자와 인간의 관계에서 수립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궁극의 설정 없이 종교는 성립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과의 관계라는 상대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느니만큼, 절대자 외의 관계로 된 모든 것, 말하자면 ‘교’, 경전, 교리, 교직, 교회 등 소위 신성하다는 것들을 그것이 아무리 신적이라 할지라도 그것 자체가 절대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관계라는 요소 없이는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이 ‘하나님’, 즉 절대자와 관계된 것이라 해서 이런 것 자체들을 신화(神化)하는 폐단이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자기 충족적이며, 따라서 다른 데서 배우려는 마음의 겸허를 용허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대화의 불가능을 가져오는 제일 원인이라 하겠다.

현대에 있어서도 불교, 유교, 회교, 인도교, 배화교, 시크교 등이 다 스스로가 유일무이한 최고, 절대의 종교라고 선언한다. 적어도 그렇게 느끼고 산다. 회교의 마호메트 알리는 그의 『코란』 영역 서문에서 “코란은 모든 종교들을 심판할 표준이며 하나님의 최고 완전한 계시다.”라고 했다. 인도교의 라마 크리슈난도 “인도 베단타(Vedanta)는 모든 종교들 중의 한 종교가 아니라, 종교 자체다.”라고 했다. 말하자면 가장 우월한 종교일 뿐 아니라, 최종 궁극의 종교라는 선언이다.

요컨대 아무리 미미한 종교라 할지라도 소위 종교치고는 이런 절대감을 갖지 않은 종교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거짓 절대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이 거의 항존 상태를 유지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기독교도 물론 그러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런 ‘거짓 절대’에서 벗어나 참된 절대자에게만 영광 돌리는 겸허에 대한 자각이 강할수록 그 종교의 우수성이 발휘될 것이라는 ‘역설’을 우리는 누구보다도 먼저 배워야 할 것 이다.

[2]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자세와 이해는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배격과 전투에 의한 승리를 지향하는 태도다. 겉으로는 신사적으로 대할 수가 있으며, 또는 타종교들을 연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략적이요, 탐색대적인 것이다. 기독교 변증론이란 것도 기독교를 옹호한다는 입장보다도 이교를 약화하려는 데에 더 많은 의도가 있었다. 그레샴 메이첸 박사도 기독교의 강점은 그 배타적(exclusiveness)인 데에 있다고 보아, 전선을 좁혀 돌격하라고 호소하고 있다.(cf. Christianity and Liberalism) 튀빙겐 대학 교수 슈링크(Schlink) 박사도 기독교와 타종교와를 예리하게 대립시켜 기독교는 진리요, 타종교는 허위라고 단정했다. 이런 것이 선교사 시대 한국 교회가 취해 온 태도였다.

2) 초월적인 태도다. 이것은 칼 바르트, 키에르케고르 등의 소신, 즉 하 나님과 인간이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으로 타종교가 아무리 기독교와 비슷한 점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대로 기독교에 연결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단절(discontinuity)’과 ‘타성(otherness)’을 강조함으로 말미암아 대화나 협력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크레머 박사나 프릭 박사는 이런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현존 기독교의 절대화를 말함이 아니라는 점은 밝혀지고 있다. 역사적 기독교는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심판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리스도의 복음에 접하려면 지금까지의 모든 존재양식에 전적으로 ‘아니다!’ 하는 부정을 선포해야 한다. 그 단절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은총의 손이 내게 체험된다는 것이다.

3) 포괄과 성취라고 보는 태도다. 이것은 배타(exclusiveness)가 아니라 포섭(inclusiveness)을 중심으로 생각하려는 자세다. 타종교에도 많은 단편적인 진리가 있다. 그러나 완전한 것이 못 되며 최선의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이것을 완성한다. 그들이 기독교에 들어올 때 단절이 아니라 성취를 체현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내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알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온전케 하러 왔노라.”(마 4:17) 한 것을 구약뿐만 아니라 모든 타종교에도 적용하려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라면 타종교와 마음 놓고 대화할 수 있을 것이며 서로 전적인 대립 의식을 지양하고 허심탄회하게 토론을 전개할 수도 있을 것

이다. 그리고 좋은 점, 공통되는 점 등을 있는 그대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3] 우리는 이상의 세 가지 태도가 제각기 성서적 교훈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1) 구약의 야훼 종교는 몹시 배타적이었다. 그리고 구약에 있어서도 그 당시의 헬라나 로마 종교에 타협 또는 대화를 의도해 본 적이 없었다. 다만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접촉이 있었을 뿐이다.

2) 단절론도 그렇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한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다. 바울도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유대교를 일단 전적으로 포기하는 태도를 취했다. “모든 좋다 하는 것을 분토같이 버렸다.”고 했다. 돌감나무를 ‘베고’ 거기에 참감람나무 싹을 접목했다.

3) 포괄과 성취라고 보는 태도도 성서적이다. 유대교를 온전케 하신다. 그리스도는 모든 타종교도 온전케 하신다.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시며, 만물이 그의 지은 바요, 그로 말미암아 그의 안에 서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의 안에 있고, 그의 것이라면 타종교라고 예외일 수가 없으며, 자기 몸을 제물로 주어 죽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신 그이가 불신자라고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할 리는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마리아 종교, 사마리아인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는 그대로 전 세계 인류와 그 각이한 종교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 가지 태도 중에서 그 어느 것을 택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비성서적이라고 논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셋을 동시에 택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처해 있는 역사적 정황이 요청하는 데 따라 그 어느 하나를 택할 자유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4] 현대 세계가 하나를 지향하고 있다.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다. 한 국련(國聯) 안에 같은 회원으로 앉아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세계를 불가피적으로 원하고 있다는 증좌라 하겠다. 교회도 하나의 교회를 향하여 노력하고 있다. 세계 교회 운동이 그 구체적인 표현이다. 이 일치 운동은 또한 기독교와 타종교들과의 관계, 신자, 불신자 관계에도 확대되고 있다. 나뉘는 데서 합하는 데로, 다투는 데서 화해하는 데로, 지배하는 데서 봉사하는 데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 아직 목표에 도달한 것은 물론 아니나 목표를 향하여 달음질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 일치가 자기 포기나 절충주의를 의미함이 아니라, 서로 다르면서 하나 되는 일치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 방향은 결코 잘못된 방향이 아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 볼 때 여기서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뚜렷한 타당성을 발견한다. 그 첫째는 우리의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시라는 그 신앙에 부합된다. 둘째는 그 한 하나님이 천지 만물의 창조주시며 역사의 주재자임과 동시에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신앙에도 합치된다. 온 인류는 하나님의 지으신 바며, 똑같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흑인이나 백인이나, 신자나 불신자나, 회교도나 유교인이나, 동양인이나 서양인이나, 문명인이나 야만인이나, 부자나 빈자나, 강자나 약자를 다같이 동등으로 사랑하시고 평등으로 그 인품 됨을 인정하신다 할 때 우리는 종교적 편협성을 주장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이 크리스찬을 사랑하신다면 그가 크리스찬이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보다도 그가 세상의 일원인 인간이기 때문에 사랑하신다는 말이다. 그리고 크리스찬을 특별히 불러 세우셨다면 그것은 이 하나님과 그 속량의 사랑을 세계 인류에게 알게 하기 위한 소명 때문인 것이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전자는 그 사실을 알고 후자는 그것을 모른다는 것뿐이다.

이 기존 사실을 의식화하기 위한 대화가 요청되는 것이며, 또한 그 대화는 이해와 결단을 가져올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것은 피차 진실을 교환하는 가운데 피차의 공통점이 발견될 수 있을 것임과 동시에 완전을 위한 새로운 요청이 또한 싹틀 수 있고, 그것이 어떻게 또는 어디서 충족될 것을 모색하게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교에서의 원시사상 및 공자의 천명사상 등이 기독교의 창조주 신앙 및 인간 신상론(神像論)과의 대화를 통하여 더욱 명백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며, 유교의 윤리와 기독교의 윤리를 항목별로 피차 논의할 때, 거기서도 좀 더 새로운 창조적인 윤리가 착상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의 해설에 의한 자비행과, 기독교의 신생에 의한 영의 열매 등도 서로 교환할만한 진실이다. 행동면에서 볼지라도 현대의 살벌한 현금주의적 경쟁 속에서 인간 본질의 자세를 회복시키며 인간성의 퇴화를 막기 위해서는 역사적 종교들의 공동전선 조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얼마든지 동의할 수 있다. 유교가 가족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각개 가족권내에서의 ‘효’와 총집권 가족인 왕에의 ‘충’을 연결시키고, 전체 국민이라는 공동 사회권 조성에 실패한 것을 인정한다면, 기독교의 하나님 나라, 그 지상적 에이전시(agency)로서의 ‘교회’, 그리고 그 교회와 사회의 관계성 등에서 유익한 참고 자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불교가 아직도 중세기적 승려 종교에서 민간 종교에로 개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현대 사회 실상에 도전하기에는 그 체질이 너무 비사회적이라는 점 등도 피차의 긴밀한 접촉과 대화에서 시사되는 바 있으리라 믿는다. 원불교는 이 점에 있어서 새로운 시도라 아니할 수 없다. 도교는 우리나라에 구체적인 감화를 주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담담소탈한 심경, 자연에 우유(優遊)하는 풍류, ‘멋’의 예술감 등은 주로 도교의 영향이 아닐까 한다. 이런 것 역시 기독교에서의 성령의 내주에 의한 심적 평화와 희열, 거룩한 아름다움 등과 교환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우리 한국인은 원시 종교인 무교는 논외로 하고, 유교, 불교 등 기독교 아닌 타종교를 받아들인 이후만 하더라도 약 1500년의 긴 역사를 이룩해 온 것이다. 좋든 궂든 이것이 한국인의 체질을 형성하고 있으며, 한국 사회생활의 전형을 조성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5] 복음을 전하는 자와 그것을 받을 자와의 교통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우선 접촉면이 만들어져야 한다. 여기서의 접촉이란 물리적인 의미가 아니다. 인격과 인격의 만남, 마음과 마음의 통함을 의미한다. 마음문이 닫힌 곳에 인격의 만남이 있을 수는 없다. 우리나라에 온 초대 선교사들은 이 점에서 너무 고자세였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한국인과 한국 문화를 하나의 공백과 같이 다루고 있었다. 무엇이 있었다 해도 그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악의의 소산이라 하여 일망타진을 기도했던 것이다. 불당의 불상이나 유가의 제사를 단순한 우상숭배로 치부하여 그 박멸을 기도했다. 유교 윤리의 초석인 ‘효’가 제사에서 추원감모(追遠感慕)의 정을 표현한 것임을 미처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이런 것이 불필요한 ‘거침돌(Stumbling block)’이 되어 한국인의 복음 이해에 막대한 지장을 가져왔던 것이다.

나는 중국에 들어온 ‘제수이트’ 선교사들이 중국 풍토에 기독교를 토착시켜 크게 성공한 사실을 회상하면서 그것을 파괴한 법왕청의 판결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인도에서 두 서양 선교사가 함께 길을 걸어가다가 한 거대한 건물이 세워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인도 교회당이었다. 한 선교사는 낯을 찌푸리며 “또 하나의 마귀당이 느는구나.” 하고 저주했다. 그러나 다른 하나의 선교사는 기쁜 표정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또 하나 나타난다!”고 축복했다 한다.

만유주 하나님, 천하 만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해를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같이 비추시고 비를 의인과 악인에게 함께 내리시는” 하나님을 예수는 가르치고 계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4~48)고 하셨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또한 ‘말씀’, 즉 ‘로고스’로 창세 이래 무수한 지자, 현인, 선인 등에 역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믿는다. 이런 견해는 2세기의 순교자 저스틴, 3세기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등 유명한 기독교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었다. 동양 고전에도 ‘천생만민, 작지군, 작지사(天生萬民, 作之君, 作之師)’라 하여 어진 임금, 고명한 스승들이 다 하늘의 명을 받들어 만민을 교도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라 했다.

우리는 타종교가 악마의 소산이라는 것보다도 자유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의한 하나님의 단편적인 말씀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받는 인간의 정황이 어스름 달밤처럼 희미한 데서 그 나타남이 흐리고 또 단편적인 것으로 된 것이라 하겠다. 이것이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함을 이루었다. 그러나 각자가 그 이미 가진 바를 절대화하는 데서 ‘더 좋은 것이 제일 좋은 것의 원수가 된’ 것뿐이다. 기독교가 유대교의 원수로 화한 것도 그 좋은 예일 것이다. 그래서 상호 이해에 대화가 필요하다 는 것이다.

[6]

1) 대화의 방법은 물론 상대방을 굴복시키거나 개종시키려는 예정된 의도를 전제로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스스로 우월감을 갖고 있어도 안 될 것이며, 자기가 상대방에게 설복될까 봐 경계하는 태도로 임해서도 안 될 것이다. 다만 성실한 진리 탐구자로서 서로 배우려는 겸손한 심정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

2) 대화에서 교리적 논박이나 그 우열을 가리려 들어서는 안 된다. 민족, 지위, 문화 정도의 차이들에서 사념을 품은 채 대화에 임해서도 안 된다. 지론(知論)은 교만을 가져오는 것이며, 교리적 논쟁은 감정적 반발을 동반하기 때문에 대화에 역효과를 가져온다.

3) 대화에서 조급한 타협도 삼가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이도저도 아닌 천박한 절충주의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피차 겸손하게 듣고, 그 공통점이나 차이점을 정리하면서도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피차 오랜 시간을 두고 음미할 것을 약속해야 한다.

4) 성실과 존경과 친애로 대화했다면, 그 결과에서 아무 합치점도 발견 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인간으로서의 성실과 경애는 남는다. 그리하여 오래 가는 동안에는 결국 더 참된 것을 용납할 수 있을 정도로 고집이 해 소되는 경우가 많다.

[7]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의 입장을 정리해야 한다. 기독교를 설명한다 해도 각파, 각양각색의 교리 주장이 있어서 스스로 혼란에 빠지기 쉬우며, 기독교로서의 주조(主調)점을 신조에 두느냐, 윤리에 두느냐, 원시 기독교에 두느냐 등에 따라 또한 엄청난 차이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1)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의 삶의 모습을 중심으로 하고 기독교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부터 말해야 할 것이다.중세기의 사변 신학이나 오늘의 허다한 신학 이론으로 대화의 테마를 삼는다면 반드시 실패할 것 이다. 그것은 상대방으로부터 이해받기가 어려우며 이해된다 해도 논쟁의 씨를 뿌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한 것과, 그리스도 자신이 인간을 위하여 어떻게 사셨으며, 어떻게 죽으셨으며, 그 의미가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그가 죽음에 매이지 않는 생명에의 영원한 증거로서 어떻게 부활하셨으며, 그 의미가 무엇인가 등은 점차적으로 대화의 과제로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부활 같은 것이 난제라면 다음으로 미루고 그리스도의 삶과 일과 죽음의 모습, 그의 인간애, 속량애가 오늘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등에 대화의 중심을 옮길 수도 있을 것이다.

2)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삶의 종교, 즉 생활종교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삶이란 물질과 정신의 합일된 몸으로서의 생명활동이다. 살기 위해서는 빵과 하나님의 말씀과를 함께 먹어야 한다. 하나님은 창조주시다. 무에서 유를, 그리고 그 유를 더욱 풍성한 유로 만들어가는 하나님이란 말이다. 기독교는 어디까지나 삶을 긍정하고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기 위한 종교다. 따라서 기독교 신자는 모든 부문에서 생산적이어야 하며, 건설적이어야 한다. 죽음까지도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는 것이 기독교의 삶이다. 그러므로 도피나 환몽이나 신비경의 도취를 배제하고 현실생활 자체를 종교로 삼는 것이다. 창조가 없고 생산과 건설이 없는 기독교도는 창조주 신앙을 가졌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속량주를 믿는다. 인간성을 상실한, 요즘 말로 한다면 비인간화한 인간들을 찾아 그들을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이키려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업이었다. 그는 세리와 창기와 악인과 빈자, 병자, 버림받은 자들을 찾았다. 잃은 양을 찾아 목숨을 모험하는 선한 목자로 그 생애를 보냈다. 그렇다고 바리새인이나 부유층을 제외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들의 교만이 좀처럼 그리스도를 만나려 하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는 인간의 삶의 문제 중 가장 근원적인 죄와 사망을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로 대답했다. 모든 인간들의 문젯거리를 온통 스스로의 몸에 짊어지고 속죄의 제물로 그 피 한 방울까지 속죄 제단에 쏟아 놓은 것이 그의 인류를 위한 삶의 정열이었다. 그리스도 모습을 인간으로서의 이미지로 삼고 역사 안에서 그의 삶을 계승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종교이며 따라서 그 종교는 오직 생활 전체로 움직이는 생활종교로 움직이는, 생활종교가 아닐 수 없게 되는 것이다.

3) 이상에 말한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사는 종교, ‘살리는 종교(타계의 삶만을 의미함이 아니라 현실 역사에 깊이 뿌리박고 하늘을 향하여 풍요하게 자라는 상수리나무같이)’임과 동시에 그 삶을 사랑으로 순화하여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삶으로 건설하는 종교임을 말한 것이다. 이 ‘사랑’이란 협조와 봉사의 생애로 나타난다. 개별적인 작은 사건들에서뿐 아니라 사회나 국가 전반으로서의 기구 자체의 큰 사건에 이르기까지 이 원칙 아래서 적극 참여하는 선한 생활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 진지한 참여 자체가 그대로 그의 종교며, 그의 신앙이기 때문이다.

이런 방향에서 우선 기독교를 이해시키는 것이 효과적이며, 또한 근원적인 것이라 생각된다. 기성 교회의 흠집, 기독교사에 나타난 온갖 참극들, 그런 암흑면만을 들추는 것보다도 그리스도 자신의 이미지에서 그리스도인의 이미지에로 그것이 현대의 삶에 나타나는 전형 등을 전시하는 것이 건설적이며, 생명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8] 타종교와의 이해와 대화를 위하여 결론적으로 한마디 말하고 이 글을 마치려 한다. 어느 종교든 간에 그것이 고등 종교인 한, 거기에는 높은 윤리성이 강조되고 있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이다. 그런데 그 근원에서 인간과 신과의 화목을 앞세우는 것이 기독교의 입장이다. 유교에서도 ‘천명지위성(天命之爲性)’이라 하고, ‘순천자흥 역천자망(順天者興 逆天者亡)’이라 하여 ‘천’과의 관계를 앞세우고 있다. 불교에서는 해탈이 자비에 앞선다. 어쨌든 결국은 인간과 인간과의 화목을 성취하는 것을 제일의 적인 것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이름으로 또는 종교를 참으로 종교답게 한다는 구실로, 한사코 담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하여 서로 넘나들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그 출발점에서 자기 파멸을 초래할 자가당착을 저지른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기독교 역사 안에 허다한 종교 전쟁을 경험했다. 십자군 전쟁은 가장 두드러진 실례일 것이다. 이교도의 피에서 종교적 감격을 느끼는 그 심경이 어떻게 종교적일 수 있느냐 하는 데 대하여 미처 생각할 사이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 인도와 파키스탄 전쟁도 종교전쟁의 한 토막이라 할 수 있다.

전쟁 행위가 종교의 이름으로 절대화하고, 그것이 ‘성전’이란 명목 아래서 신성화되는 때, 그 전쟁은 가장 무자비하고 가혹한 형태로 나타난다. 직접 칼을 들고 싸우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교파간에서의 분쟁(주로 교리 논쟁), 타종교 간의 비인간적 냉담 등은 하나의 음성적인 종교전쟁이다. 그리스도가 칼을 사용한 베드로를 책망하고 십자가의 길을 택한 뜻은 종교에 있어서의 전쟁 행위, 또는 분쟁 행위를 부정한 표정이었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십자가의 사랑의 제물에서 화목을 이루어, 가로세로 교차되어 하나를 이룬 것이 기독교였다면, 이 사랑의 종교가 타종교인이나 불신자를 원수로 치부하고 강압으로 대할 수 있을 것인가? 타종교인이 타종교인으로 있기 때문에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면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바울의 감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우리가 타종교인을 개종시킨다는 고자세는 서구인의 제국주의 침략에 편승했던 선교사의 종교적 침략 기분에 유사한 바 없지 않다. 우리 자신이 먼저 ‘지배욕’의 종교에서 ‘사랑과 봉사’의 종교에로 개종해야 할 것이다. 이 겸허한 사랑, 봉사와 존경의 마음이 언제나 대화와 이해 이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두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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