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30일 수요일

[0467] 한국의 재래종교와 그리스도 / 1958년 8ㆍ9월

한국의 재래종교와 그리스도


《기독교사상》(1958년 8ㆍ9월)

[1] 민족의 바탕

지리적인 영향 : 지금부터 30여 년 전, 3ㆍ1 운동 직후에 동아일보사에서 당시 일본 동경 동양대학 교수로 있던 류종열 씨를 초청하여 중앙 YMCA 강당에서 우리 민족 문화에 대한 강연을 한 일이 있었다. 그때 장덕수 씨가 사회를 봤고, 나도 청중의 한 사람으로 참석했다. 그 당시에 일본 사람의 강연이란 것도 신기한 일이었지만, 그 강연 내용이 하도 신기해서 30년이 훨씬 지난 오늘에도 어제 일같이 생생하다.

그는 지리적인 원인들을 주로 말하였다. 우리 민족은 중국과 일본 두 나라 사이에 끼인 교량 구실을 했기 때문에 국제 파동이 있을 때마다 자기 나라와는 별 관계도 없는 전쟁에 휩쓸려서 남의 전쟁판이 되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백성들은 옹기종기 이 땅 위에서 잘살아 보려는 생각보다도 또 언제 망할지 모르니 그저 이럭저럭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하는 따위의 심리로 되었다고 했다.

중국은 동양의 큰 복판을 차지했기 때문에 자기 나라가 곧 천하요, 자기 임금이 곧 천자요, 변두리 나라들은 예외 없이 오랑캐라는, 대국으로서의 긍지를 대대로 이어왔다. 그리하여 그들의 땅이 곧 하늘이었으므로 그들은 그들의 현실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시종 현실주의적인 힘의 나라였다.

일본은 바다가 지켜주는 아름다운 섬나라여서 외부로부터의 침입이 없었으므로 그 백성들은 옹기종기 모여서 자연과 문화를 즐기며 살았다. 그러므로 그런 지리적 환경이 그들의 문화에 하나의 독특한 바탕들을 이루어 놓았다.

중국 문화는 현실의 힘을 상징하는 것이어서 넓은 지평선 위에 거대한 ‘형’을 굵직하게 심어 놓은 탑들을 보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은 자연을 즐기며 거기에 조화되는 예술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으므로 화려한 색채가 발달되어 일상복의 천에까지 그것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한국은 아름다운 자연을 가지고서도 그 자연을 마음대로 즐길 수가 없었고, 큰 나라 그늘에서 사니 긍지를 가질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현실에 관심이 덜한 대신에 피안과 영원을 동경하여 그 심정을 종교적인 데에 두고 살았다.

그리하여 한국의 미술품은 선으로 표시된다. 능묘의 벽화를 보아도 그림 자체가 하나의 힘찬 선의 종합이다. 여자의 버선목, 기와집 용마루, 상다리 할 것 없이 다 곡선의 미를 드러내려 하였다. 땅에 붙지 않고 하염없이, 그러나 끝없이 하늘을 향하여 고요한 선을 그리며 올라가다 사라지는 아침 연기에 마음을 붙여 살아가는 표정이다. 밑굽이 유난히 뾰죽한 도자기의 불안한 모습, 자기에 그리는 대표적인 그림인 소위 ‘포류수금(蒲柳水禽)’, 즉 수양버드나무 옆, 흐르는 물위에 떠다니는 물오리 떼, 그 어느 것이나 선 아닌 것이 없으며, 그 모든 것이 흐르고 흔들려 안정함이 없는 표지이다.

그러므로 중국이 실업적이라면, 일본은 예술적이요, 한국은 종교적이라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남겨 놓은 미술 공예품들을 들여다보면, 우리 무식한 소견에도 그런 것이 사실인 성싶어진다.

바울은 그의 아데네 설교에서 우선 아데네 사람들이 극히 종교적이라는 것을 말하고 이어서 ‘미지의 신’에 대한 제단을 빙자하여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설명하였거니와 ‘종교적’인 민족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부여된 특징이라면, 그것은 우선 그런 것으로 받아두기로 하자.

그런데 종교적이라는 것과 기독교적이라는 것은 같은 범주에 들어 갈 수 없다. 폴 틸리히가 말한 바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종교를 박멸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거니와 사실이 종교적으로 되어 먹었다는 것이 고마우면서도 곤란한 대목이다. 그것은 그 종교적인 본래의 심경을 아무 심각한 결단 없이 그리스도교에 이주시키고 스스로 안심하기 때문이다.

[2] 한국의 재래종교들과 그 신앙

문화적인 유산 : 문서 이전의 한국 문화, 소위 ‘고조선’,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기 전 한국 고유의 문화라는 것을 연구하는 분들이 있음은 경하할 일이다. 그러나 그 정확한 내용을 학문적으로 단언하기에는 너무 재료가 부족하고, 따라서 주관적인 판단이 분외의 역할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어서 전문가도 아닌 우리로서는 왈가왈부할 처지가 못 되므로 애당초 거론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유교, 불교, 도교 등의 영향에서 자라난 우리 민족의 마음 바탕이란 것은 상식적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유교는 중국인의 기질을 말하는 현세적인 생활 정로(正路)를 가르치려는 교훈집이다. 그것은 철저한 복고사상이어서 공자의 소위 ‘호고민이구지자(好古敏而求之者)’라는 것이 그것을 잘 말하고 있다. 그것은 요순우탕문무 주공의 ‘덕치’를 유토피아로 여기고 언제나 그 질서에 돌아가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언제나 과거를 기준으로 현재를 심판한다.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그것은 옛 도에서 떠났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다시 옛 도에 돌이켜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교의 치하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창조라든가 혁명이란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자라나려는 움직이는 생명을 언제나 옛것에 맞추어 놓으려니 규격이 엄해야 하고, 교훈집이 자세해야 하고, 사회적 제재의 정신력으로 이용할 ‘예(禮)’를 강조해야 하고, 정치력에 최고도의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노라니 자연 ‘형식주의’, 기독교에서 말하는 바리새주의로 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정치 체제는 봉건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주종 관계’의 계급 질서가 강조되었다. ‘부재기위 불언기정(不在其位不言其政)’이라는 둥, ‘재하자 유구무언(在下者 有口無言)’이라는 둥 하는 것은 한 좋은 실례라 하겠다. 소위 삼강오륜이란 이런 봉건 질서를 세우기 위한 원칙을 말한 것이었다.

불교는 인도교의 분파로서 현세의 생 자체를 비참이라고 본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가 아니라 ‘비참’이다. 그러므로 다시 이 세상에 출생하지 않고 소극인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윤회전생의 숙명인 ‘업’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철저한 도피사상이다. 이러한 마음의 태도가 입산수도, 탁발행원의 길을 취하도록 하였다.

이 밖에 또한 초연자적하는 도인사상이 소리 없이 침투되어 있다. 이것이 도교의 영향인지 아닌지는 학식이 미천하여 연원을 밝히지 못하지만, 가령 시인 이태백이 평생을 술과 달과 바람과 하늘을 읊으며 초연하여 천자가 불러도 배에 오르지 않았다는 것이라든지 공자에게도 몇 사람의 제자들과 평생소원을 토론할 때에 점(點)이라는 분이 말하기를 “모춘자, 춘복기성, 관자오, 육입, 동자육, 칠인 욕호기, 풍호무우, 영이귀(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 六入, 童子六, 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다시 말하면 “늦은 봄날, 봄옷이 다 되거든, 어른 5, 6인과 소년 6, 7인과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에 바람 쐬고 읊으며 돌아오는 것이 내 평생소원입니다.”라고 하였을 때 공자께서는 감탄하셔서 “내가 네 편이다.”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윤리로 굳어진 도덕군자로서는 격에 안 맞는 풍류라 하겠다. 우리 국민에게도 이런 유교와 불교의 중간치기 비슷한 사상이 속속들이 배어 있는 성싶다. 술을 매개로 홍수같이 인심을 휩쓸어가는 유흥에의 향심이란 이런 생각의 타락한 형태가 아닌가 한다.

한국 사람에게 가장 오랜 원시종교라는 무당은, 말하자면 제사, 송가, 접신, 신탁 등 원시종교의 제 형태를 구비한 것이어서 지금도 여전히 그 신탁을 얻기 위해 그리로 찾아가는 사람이 많다. 소위 지식인들 중에서도 답답한 일이 생기면 곧잘 무당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3] 그리스도교의 전래

정통주의 신학의 아성 : 이런 고문화의 터전에 그리스도교가 심어졌다. 천주교가 들어온 이야기는 그만두고, 개혁교만을 말한다면 1884년 구한말에 비로소 미국으로부터 전해 왔다. 그들은 미구에 근대 선교사상 일찍 보지 못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온전히 이교적인 나라에서 선교 70년에 회심자 100만을 헤아린다는 것은 큰 기록이 아닐 수 없다.

그 주요 이유로는 물론 1916년의 대성령강림 때문이라 하겠지만, 그밖에도 불교, 유교 등 재래 종교가 인심을 힘 있게 차지하지 못한 까닭에 사람들의 마음이 공백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 정치적으로 질서가 바뀌고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려는 태세가 갖추어지고 있었다는 것, 민족 심리가 본래부터 종교적이었다는 것, 그리고 선교사들이 첫 시작에 독특한 선교 방법, 즉 중국에 와 있던 유명한 선배 선교사인 플레비우스 네비우스가 색다른 선교 방법을 채택하였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전래한 그리스도교가 어떤 체계의 신학을 가진 것이었던가? 유교에서 주자학파가 전권을 잡고 양명학파를 얼씬도 못하게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교에서도 17세기의 정통주의 신학을 의식적으로 고집하여 다른 체계의 신학은 아예 그 존재조차 제대로 소개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도대체 신앙이면 신앙이지 ‘신학’이 무에 그리 중요한 구실을 하기에 그렇게 신학 논쟁에 열심이냐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신학이란 마치 골격 같아서 그것이 없이는 ‘무골충(無骨蟲)’이 되기 때문에 우선 이것부터 바로 서야 거기에 제대로의 살도 붙고 피도 돌고 하는, 제법 뻣뻣이 서서 일하는 체격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종교개혁을 영어로 Reformation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재형성’이란 뜻이다. 그러면 무엇을 재형성하느냐 하면 그것은 관습이니 조직이니 윤리니 하는 것을 뜯어 고친다는 것보다도 제일 먼저 ‘신학’의 재형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학의 문제는 충분히 중요한 근본 문제로 먼저 다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천주교회 내에서의 반동개혁(counter reformation)이 우리가 말하는 개혁과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즉 윤리니 생활이니 하는 것을 고치고 신학 자체에는 터치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일종의 무마였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혁은 아니었다.

우리 한국 교회에 있어서도 이 신학의 연구와 논쟁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면 초대 선교사들에 의하여 한국에 심어진 정통주의 신학이란 어떤 내용이냐 하면 그것은 성서의 문자적 무오설을 토대로 하고 그 위에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피로 말미암은 속량, 육체적 부활을 시인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부같이 주장하는 신학이다.

지금까지 교회에서 믿기는 하나님이 여러 사건들을 통하여 계시하고 그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 특별 계시는 유대인을 선택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예수에게서 그 절정에 달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 기록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를 계시하셨다든가, 성경이 영감으로 씌어졌다는 의미는 어떤 형식에서 하는 말인가 하는 등등에는 교회 지도자들이 그리 천착하지 않았다. 자유로 설명해도 좋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거스틴도, 오리겐도, 루터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가톨릭과의 논쟁에서 객관적인 권위에 의존할 필요를 절감한 신교학자들은 마침내 성경의 문자적인 권위, 그 일점일획이라도 절대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라는 것을 주장하게 되었고, 이것을 정통이라는 타이틀 밑에서 교권과 결부시켰다. 그들의 이론은 허심탄회한 진리 탐구, 성경 사실의 진상 파악 등에 선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 놓은 교리를 옹호하려는 조바심에서 하나의 전략적인 방법으로 사용했다. 단, 그들은 “만일 성경의 어느 점에서라도 의심하기 시작하면 비탈에서 미끄러진 것 같아서 하나님도 의심하고 예수의 신성도 의심하고 구원의 확실성도 의심하고 신자의 윤리도 표준을 잃을 것이다.” 하고 홍수같이 숨어드는 인본주의를 보고 머리카락이 빳빳할 정도로 두려워했다.

그들은 언필칭 ‘구원’을 말한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하고 누구에게나 질문한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면, 청산유수같이 곧장 대답한다. “사람은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원죄와 자작죄로 진노와 죽음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구약에서 동물의 피로 제사드린 것은 그 예표입니다. 사람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시인해야 합니다. 그러면 권능을 받게 되어 죄를 이깁니다.”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은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물으면, “그것은 기사, 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고 대답한다. “기적은 하나님이 인간과 교통하는 표적인데, 처녀 탄생, 병 고치는 것, 죽은 자를 일으키는 것, 자기 자신의 육신으로의 부활 등이 다 그가 하나님 아들임을 나타내 는 표적입니다.” 또 “이렇게 믿는 사람은 죽으면 천당 가고, 안 믿는 사람은 지옥 갑니다.”라고 말한다. “세상 끝에는 천년왕국이 있을 것이요(대체로 전천년설을 믿는다), 그때까지는 세상이 점점 더 악해질 것이며, 맨 나중, 즉 왕국 시대의 끝에는 악마와의 대충돌이 일어나고, 그것을 계기로 사탄이 망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영구히 임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똑똑하게 청사진이 그려졌으니 더 토론할 필요도 없다. 계시는 우리가 본 이것 그대로다. 이 계시를 시인할 때 하나님은 우리 편이 되고, 우리 아닌 자는 다 우리의 적, 즉 사탄의 무리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적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은혜의 독점, 성경의 독점, 교회의 독점을 선언하고, 그것을 이론보다도 교권으로 옹호하려 한다.

그러나 성서의 역사적, 문학적 비판 연구에 의하여 성서 문자무오설이 그 근거를 잃고 있다는 것은 이미 세계적으로 확인된 사실이니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그 토대 위에 세워진 정통주의 신학이 무너질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정통주의 신학에서 주장하는 내용 전부가 허구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들의 학적 체계가 무너진다는 것이다. 그 무너진 벽돌 중에는 쓸 수 있는 것, 써야 할 것이 많기 때문에 그것과 또 다른 새 재료들을 가지고 다시 더 좋은 신식 건물을 설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소 위 ‘신정통주의 신학’이란 그런 경우에서 되어진 것이 아닐까 한다.

하여튼 한국 교회의 정통신학이란 그 신학 태도에 있어서 그 자체 안에 ‘네메시스’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대략 지적한다면, 고루할 정도로 보수적이어서 새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 진리를 위한 진리가 아니라, 자기 변호의 도구로서의 진리를 논하고 있는 것, 축자영감이나 성서 절대 무오설이니 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실질적으로는 그리스도 신앙보다도 성경을 우상화하는 것, 감정과 교권으로 진실을 억압하려는 것, 자기 신학을 절대화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자기를 절대화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 실존에서 유리된 관념적인 것을 과도히 주장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서백서 아자아격(書白書 我自我格)’이 되어 생활에서 유리된 신앙을 묵인하는 것, 세계 교회와의 협동 발전을 도모하는 것보다도 배타, 독선을 능사로 하는 것 등 허다한 결점을 들 수 있다.

[4] 현 단계 한국 교회의 신앙 상태

이런 체계와 분위기 가운데서 한국 교회는 60년을 자랐다. 그리하여 그것이 하나의 성격으로 되었다. 유교의 복고사상은 정통주의 신학의 보수주의와 통한다. 그리하여 새것을 배제하기 위하여 유교에서 소위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정치력으로 처단하던 것처럼 정통주의 교회에서도 ‘이단’이라는 명목으로 교권을 이용하여 처단한다. 유교에서 정치에 중심 적인 관심을 가지는 것처럼 정통주의 교회에서는 교권에 우선적인 관심을 가진다. 유교가 형식주의 ‘번문욕례(繁文縟禮)’에 빠진 것같이 정통주의 교회에서도 신조, 규례, 생활 관습 등에 말초신경적이다. 그리고 실생활 운동에서 유리한 이론 체계, 그것도 이미 진부한 것을 억지로 유지하려는 것 때문에 일종의 암흑시대를 재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한 데에 모든 사람이 다 만족하고 얌전할 수는 없는 것이어서, 그 반동으로 교회에서 물러나가 세속 질서에 온전히 합류하는 사람, 불교의 도피사상에 향수를 느껴 수도원(修道院)이니 수도원(修禱園)이니 하는 데로 물러가 숨는 사람, 모든 조직과 기관을 냉소하고 홀로 초연하여 도인이나 신선으로 자처하는 무교회주의적인 사람, 그렇지 않으면 무당 종교에서의 본을 따서 노래와 손뼉 따위로 군중 심리를 흥분과 도취에 이끌어 입신 또는 접신을 경험하게 하고 그것을 빙자하여 치병, 기적 과시 등 혹세무민적 행위를 감행하는 사람 등등이 버섯처럼 번성한다.

이렇게 말하면 한국 교회는 온통 병적이요, 아무 생명적인 것도 없는 것같이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물론 건전한 면이 병든 면보다 더 많은 것은 사실이다. 나는 지금 마치 의사가 병을 찾아내려는 것처럼 한국 교회의 병을 들추는 데 치중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시기 바란다.

이리하여 현 단계 한국 교회의 생태는 유교가 대표하는 중국의 복고 사상에 영합하는 정통주의 신학 지지파가 다수를 점한 데다가 불교를 대표하는 인도의 도피사상, 초연자적의 도인 사상, 봉건 시대의 주종 관계, 샤머니즘적인 흥분과 도취 등이 한국 민족 본래의 ‘종교성’을 호기로 서로 영합, 반발하면서 혼선을 이루어 그리스도교 복음의 순수성을 침략하고 있다.

[5] 새로운 신앙 운동과 그 방법

우리는 우선 한국 교회의 개혁에 있어서, 16세기의 종교개혁 시대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정도의 차이는 있다 할지라도 신학의 재형성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겠다. 우리가 성서 문자무오설을 토대로 한 정통주의 신학을 거부한다면(그것은 이미 세계 교회적으로 거부된 것이다), 우리의 신학은 자세한 점에서 어떠한 내용의 것이냐 할 때, 우리에게 공동으로 고백할 신앙 고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또다시 어떤 체계 안에 농성하여 또 하나의 기계적인 ‘유니포미티’를 조성하는 과오는 범하지 않으려는 것이 우리의 겸허한 심경이다.

우리에게 제시되는 살아 움직이는 신학은 전 세계 교회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분위기 가운데 끊임없이 발표되고 검토되면서 저절로 어떤 주류를 형성해 가는 것이므로 결코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부단히 연찬하는 학도로서 이 주류를 포착하여 그것을 겸손하게 자기 신앙의 양식으로 취사(取捨)할 것이며, 그 신학은 언제나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확보하고 복음의 본질을 구명함과 동시에 그 시대의 언어와 정신을 사로잡아 그 세대를 복음 안으로 이끌어오는 신학이어야 한다.

우리의 새 신앙은 우리가 발명한 시대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과 원시 그리스도교의 산 원천에 돌아가서 그 샘터의 협잡물을 제거하고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막힘 없고 더러워짐 없이 현대 우리에게 제공되도록 하는 것뿐이다. 이것도 복고 사상이라면 그렇게 불러도 좋다. 그러나 이것은 옛것임과 동시에 언제나 새것이다. 고와 금에 구애되지 않는 영생의 흐름이다. 이것을 위하여 우리는 아직도 그리고 언제까지나 배우는 학도로 일하는 것이요, 심판하는 완성자로 자처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신앙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내가 말씀과 교회 안에서 성령으로 사귀는 생 자체다. 이런 생이 역사 안에 있을 때, 그것은 그 역사를 변혁하는 빛, 소금, 누룩의 구실을 하게 된다. 이런 믿음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반영한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전 세계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협력하며 그 사랑으로 전 세계 역사에 도전하는 것이다.

이 신앙을 증거하는 방법은 처지와 형편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고안해 낼 수 있다. 방법에 사로잡혀서 그 본의를 희생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믿고 기도하고 성신이 함께하실 것을 확신하면서 교역자뿐 아니라, 전 회원이 합심 협력하여 각자의 가족, 친척, 각자의 직장을 그리스도에게 오게 하며 ‘전적인 그리스도를 전적인 사회’에 산 ‘다이내믹’이 되게 하는 일에 전 심신, 전 소유, 전 시간을 지향시키려는 부단의 노력이 필요하다. 설교, 교수, 강연, 문서, 음악, 영화, 라디오, 연극 등등을 자유로 사용할 달관을 가져야 하며, 산병전(散兵戰), 포위전, 돌격, 잠입 등 온갖 전술을 적시 적용해야 할 것이다.

노방 전도나 외마디 전도 ‘예수 믿으시오’, ‘예수!’ 등도 좋을지 모르나 각개 인격의 과녁을 똑바로 쏘아 맞추는 카운셀링에 비하면 낭비요, 웃음거리밖에 안 되는 원시적 방법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자동차에 마이크를 달고 시가지를 돌아다니면서 무어라고 전도 방송을 하는 것도 더 나은 것이 없는 난센스로 보인다.

이제 가장 건전하고 광범위하게 사용될 전도 방법은 물론 기독교 교육을 통한 훈련이다. 그것은 반드시 어린이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도 들어야 하며, 가정, 학교, 교회를 그 교육 본거지로 하고 각양 문화 기구를 통하여 크리스찬 인간 형성을 추진하는 것이다.

한국 민족의 전통과 자연적 경향에 영합하는 것을 일삼을 것이 아니라, 그 결함을 보충하며 진취적이요, 자유롭고, 실존적이며 세계적인 태도를 고취하여 전적인 한국의 구속 사회화를 기도(企圖)하여야 한다.

댓글 1개:

  1. 한국의 재래종교는 당연히 유교, 불교, 도교, 그리고 샤머니즘이 복합적으로 혼재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가 전래되었는데, 기독교가 이런 재래종교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볼 수도 없다. 기독교 안에도 유교적인 사상이나, 불교적인 사상, 도교적인 사상, 샤마니즘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오늘에 이르렀다.

    이것에 대해서는 아마도 '토착화 논쟁'에서 다양한 논의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토착화 논쟁이 자연스럽게 '종교다원주의'로 확장되기도 했다.

    1950년대 말, 장공 김재준 목사는 당시에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해서는 '신학의 재형성'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나아가 올바른 전도를 위해서는 '기독교 교육'을 통한 훈련이라고 보았다.

    올바르게 알아야 올바르게 전할 수 있다.
    잘못 알고서 전했을 때... 기독교는 변질될 수 있다...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