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30일 수요일

[0129] 교리와 신앙 / 1946년 12월

교리와 신앙–정통의 도취


《새사람》(1946년 12월)

크리스찬이 된다는 것은 타고난 자기를 수양해서 그리스도처럼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는 전적으로 자기를 부정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은총으로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나를 따르려 하는 자는 자기를 이기고 제 십자가를 지고” 하신 말씀은 일종의 금욕적인 극기 단련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를 십자가에 죽이는 것을 의미한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신 것도 한번 죽고 거기서 다시 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의 말에 “내가 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어서 산다.”고 한 것도 그가 다만 율법에서 죽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살게 되었다는 교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은 순간 그의 정욕을 중심으로 한 본래의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못 박히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함께 그도 다시 살아서 그리스도로 충만한 새 인격이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신자가 되는 그때부터 자기의 의를 운위치 않는다. 자기의 선을 믿지 않는다. 자기의 사상이나 신앙까지도 의지하거나 자랑하지 않는다. “자랑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자랑하라!” 하고 바울은 말하였다. 지금도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산 인격이 성령으로 우리의 죽은 몸에 침입하여 다시 생기를 주실 때 우리가 전적으로 ‘아~멘’ 하는 그 길이 곧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다.

나는 얼마 전에 현대인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 지식 자체를 우상화한 결과로 자기 허망에 빠져드는 것을 말하였다. 이와 마찬가지의 허식이 교인들에게도 있음을 발견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심령의 자유를 획득하는 반면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마음 안에서 자기의 종이 된 것이다. 이것을 교리적 노예(Dogmatic bondage)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이념이 표현하려는 실현에 충성하려는 것보다도 그 이념 자체에 충성하려는 것이다.

속죄주 자신에게 부딪친 속죄받은 은총보다도 속죄에 대한 교리의 여하를 논하기에 전심으로 경주한다. 성경 공부에서도 지금 나에게 성신으로 말씀하시는 산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는 것보다 성경을 교리변증의 교과서같이 여기고 간 데마다 교리 구성 자료만 찾아내려 한다. 이것은 해부대에 오른 시체가 ‘사람’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천박한 의학생의 태도와 별로 다름이 없다. 교리 교조의 내용을 그대로 시인하면 그것이 신앙의 전부인 것같이 생각하는 것은 가장 교묘하게 위장한 ‘이단’이다.

이 ‘이단’은 자기를 과대하는 교만을 가져오는 것이 특색이다. 그들은 신앙의 내용을 지식적으로 객관화한다. 위대한 기독교의 교리를 망원경에 비치는 천체와 같이 다룬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는 교리주의자의 연구 대상으로 객관화한 채 그만 그에게 우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우상만 가지면 자기 자신이 전능화하는 듯이 뽐낸다. 그는 인간 된 데서 면제받은 자로 자처하며, 자기보다 다른 신조를 가진 자는 인간 취급을 하는 것까지도 거부하는 형편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자기네가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니는 주문인 것같이 생각하며, 나아가서는 이 교묘한 우상숭배자가 일약 하나님을 수호하는 수호신의 지위에 오른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존엄하심 앞에서 감히 설 수 없는 죄인이며, 무에 가까운 존재임을 심명(深銘)하고 남을 운위할 여유 없는 통회의 깨어진 심정을 가지는 대신에 자기 교만과 불평과 악심으로 악마적인 판관이 되어버린다.

이 현상은 다시 한번 더 깊이 따져보면, 그 속에는 더 무서운 악마성이 숨어 있다. 그것은 윤리적 속박이 풀어져 버린다는 그것이다. 즉 교리적 진리가 도덕적 선을 대신하며 이론이 실행을 대신하며 교리가 산 신앙생활을 대신하는 그것이다. 그리스도교 진리는 그 본성상 도덕생활과 분리 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교리적 진리를 위해서는 증오도 살인도 감행하려 한다. 진리는 선을 위해서다. 선을 행하기 위한 진리요, 선일 때에 진리가 되는 것이다. 주님의 교훈대로 보면 사랑이 없이는 의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 정통을 운위하여 교리 다툼이 생긴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성전 안에서 이 교리 싸움 때문에 신자끼리 도살, 분살, 학살을 감행한 것이 얼마나 지긋지긋하게 우리 기독교사를 피로 더럽혔는지 여러분은 알 것이다. 종교재판소의 독수(毒手)에 걸려 죽은 신교도가 과연 몇 백만 명인지 다 헤아려 보았는가? 이것이 곧 우상화한 교리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악을 마음껏 행해 온 기록이다.

이에 대해서는 영계의 위대한 선배들이 절실히 경고한 바가 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말하기를 “내가 삼위일체설에 대하여 심오한 쟁론을 열심으로 전개한다 할지라도 너 자신이 겸비하지 못하여 삼위일체 자신의 노여움을 산다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그리스도를 본받아』 1:3)고 하였으며, 프린스턴 신학교의 창설자인 아치볼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도 「죽은 정통」이란 제목 아래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들은 정통교리를 줄곧 신봉하면서도 산 경건에 대하여 악독한 적의를 가질 수 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경륜과 성신의 사업에 반역하는 원수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 신학의 깊은 문제를 사색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아주 결정적인 영적 감화에 있지 않는 한 그가 진지한 신자이면서도 언제나 악의에 붙잡히는 것이다.”(The Log College)라며 신학자를 경고하였다.

프린스턴의 위대한 신학자 하지(A. A. Hodge) 역시 “인간적이요, 또 그리스도 심정을 가지지 못한 단순한 칼빈주의자는 차라리 정신병동에 가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가 인간적이요 선량한 크리스찬일 때 비로소 그의 칼빈주의도 좋은 것이 된다.”(프린스토니아지 소재)라고 말했다.

지식인은 지식과 자기를 분리시킨 상아탑에 살고 있다. 그와 같이 이 정통주의자들은 교리의 척도로 남을 재어보는 쾌감에서 스스로 부풀어 오른다. 자기를 심판하는 것보다 남을 심판하기에 상기되어 있다. 나는 이것도 믿고 저것도 믿으니 나는 의로운 사람이외다 하고 성전에서 자랑하던 바리새인처럼 되어 버린다.

이것을 ‘정통적 이단(Herecy of Orchodoxy)’이라 부른다. 나는 미국과 한국에서 이것 때문에 교회가 얼마나 분요했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교회로서는 이미 해결지은 문제를 지금 해방 후 한국에 재연시키려 함은 뒤떨어지기도 심한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정통교리를 무시한다거나 불필요하거나 또는 신봉치 않는다거나 하는 자는 아니다. 현대처럼 정통교리를 요구하는 때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틈을 타서 사탄은 사이비 이단을 정통으로 위장시켜 정통의 권위로 신도를 미혹하며 교회의 화평을 교란하려 한다. 소위 ‘신신학’이란 기독교의 탈을 쓴 인본주의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불신앙을 돌이키고자 힘쓴다. 정통신학은 이보다도 더 교묘하게 위장한 실제적 인본주의가 아닐까? 나는 이에 일부 정통 도취자들의 맹성을 촉구하며, 나 자신의 참회와 함께 삼가 주님의 시정을 빈다.

댓글 1개:

  1. 신학교에서 교회의 역사를 배우면서 많은 궁금증이 있었다.

    이단을 판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로 인해서 형성된 교리는 만고불변의 진리인가?
    정통은... 교리적으로 승리한 집단인가? 아니면 당시 권력과 (상대방을 제압할) 힘을 가진 집단인가?
    교회 역사 상 이단으로 판명된 집단들과... 오늘날 소위 말하는 사이비 이단과는 어떻게 구분이 가능한가?

    신앙적으로 기독교인이라면 이 정도는 서로 합의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약속이 교리인지도 모른다. 만약 교리라는 틀조차 없었다면... 기독교는 역사상 가장 복잡한 혼합종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교리는 서로간의 신앙적인 약속이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남을 판단하는 것까지 나가는 것은 상당히 조심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산상수훈에서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말은... 비판이라기 보다는... '판단', '심판'이기 때문에... 인간이 함부로 신의 영역을 차지하면서 다른 사람의 행위나 신앙을 심판하면 안된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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