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4일 화요일

김재준 목사님을 회상하며 말한다! / 이양구

김재준 목사님을 회상하며 말한다!- 주로 1965년 이후부터 강의와 설교 시의 모습을 회상하며 -


이양구 목사
(횡성 복지교회 담임목사)

[1] 천지안(天地眼)의 용모

김 목사님이 강의나 설교를 하실 때에, 그 분의 눈동자를 분명하게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분의 눈은 거의 언제나 넓은 눈꺼풀에 덮여 있어서, 바로 그분의 코앞에서 말씀을 듣고 있어도 그분의 눈동자를 확실하게 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강의를 하실 때에는 거의 언제나 의자에 차분히 앉아서 부드럽고도 힘있는 어조로 단어마다 분명하게 발음을 하셨고, 거의 언제나 강의 노트를 들여다보고 계신 듯이 눈을 아래로 내려 뜨고 강의를 하셨는데, 가끔 청중을 바라보시는 때에도 어느새 하늘을 한번 보았다가 다시 땅을 보시는 듯 눈꺼풀이 다시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런 눈은 하늘과 땅만을 보는 특수한 눈으로서 천지안(天地眼)이라고 표현할 수가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단어가 국어 사전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한 뿔은 하늘로 향하고 다른 한 뿔은 땅을 향한 소의 뿔을 천지각(天地角)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본다면, 김재준 목사님의 눈은 그만큼 관상학적으로도 비범한 특성을 지니고 계셨다고 말해도 크게 잘못은 아닐 것이다. 깊은 호수가 그 속을 쉽게 보여 주지 않듯이, 그분의 마음은 이미 외모의 그 눈동자에서부터 쉽게 희노애락의 감정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특수한 장치를 타고 나셨던 것이 아닐까?

[2] 강의하실 때의 모습

필자는 1965년 봄학기부터 1968년까지 그분의 강의와 설교를 비교적 자주 듣고, 질문도 하고, 식사도 몇 번은 함께 한 적이 있는데, 강의는 주로-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의자에 앉아서 차분하게 하셨고,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로, 그러나 야무지고도 분명한 발음으로 한마디 한마디를 마치 못을 박듯이 발음을 하셨고, 어려운 단어나 핵심적인 용어는 한자나 영어로 흑판에 써 주셨다. 한번 일어나 섰다고 해서 조금도 오래 서 계시지를 않고, 조용히 다시 의자에 앉으셨다.

세 시간 강의를 하신 다음에도 넓은 흑판에는 한 두 자의 글자밖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을 때가 많았다. ‘呪物 崇拜’(주물 숭배)는 ‘fetishism’(주물 :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는 물건)이라고 쓰시고, ‘seriph’(세리프, 영어 대문자의 위아래에 그은 가늘고 짧은 장식용의 선), ‘moratorium’(모라토리엄, 지불 유예 기간, 공백 기간) 등의 단어를 써 주셨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러나 신학교에서 그토록 흔하게 사용하던 독어, 헬라어, 히브리어 등의 단어나 문장은 쓰신 일도 없었고 읽으신 일도 없었다.

필자는 김 교수님에게서 “성서 해설”, “기독교 윤리”, “동양 사상” 등의 강의를 들었는데, 특히 불교의 백팔번뇌와 같이 복잡하고도 난해한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시고는 “이처럼 요령있게 정리해서 강의를 해야 이해하기가 쉬워진다”고 은근히 자화자찬도 하신 일이 있고, 강의를 준비하느라 애쓰신 노력도 은근히 알아주기를 바라시는 말씀도 하셨다. 그러나 그런 기억은 더 이상 없을 정도로 자기 억제를 하신 것이 명백하고, 언제 한 번도 큰 목소리로 열강을 하거나 흥분하시는 것을 본적이 없다. 우연한 기회에 조선출 목사와 뚱딴지(애자) 사건을 말씀하실 때에도 “그가 너무 똑똑해서 그런 실수를 한 것이지” 정도로 부드럽게 말씀하시고 넘어갔다. (뚱딴지는 사기로 만든 전기 절연체로서, 전주의 전선에 매달려 있는 사기 그릇과 같은 것인데, 학교에서 그것을 매점매석해 두면, 곧 값이 올라서 상당히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해서, 사 두었다가 오히려 큰 돈을 허비하고 말았다고 한다).

한번은 “기독교 윤리” 시간에 필자가 질문을 하였다. 그 강의 시간이 오후 3시 경부터 5-6시까지 졸리고 피곤한 시간대여서 강의 종반에 가서 좀 분위기를 새롭게 바꾸고 싶은 마음으로 “세례”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다 : “세례가 초대 교회에서 어떤 기능을 하였나요? 도대체 세례가 무엇이기에, 초대 교회의 성도들에게 목숨을 건 중대한 사건이 되었나요?” 교수님은 천지안으로 질문자를 한번 훑어보시고서, 마치 준비한 원고라도 읽어 내려가시듯이 이엄이엄 설명해 나가셨다. 그런 설명을 하실 때의 모습은 특히 입모양에서 특색을 나타내셨는데, 마치 맛있는 음식을 먹는 듯이 입술을 약간 옆으로 밀어내 가면서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물론 그렇게 늦은 시간의 강의에도 거의 모든 수강자들이 다 출석하여 강의에 경청하였다. 강의가 끝나면, 홀로 천천히 걸어서 교정을 빠져 나가셨고, 때로는 어디서 기다렸다가 나타난 듯이 이우정 교수가 동행하고 나가는 모습도 보였다.

[3] 지극히 겸손한 강연자의 모습

그 때가 분명 1961-2년 겨울이었을 것이다. 충남 서천군의 판교 교회에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며 시무하시던 백형기 목사님이 겨울 방학 동안에 김재준 목사님을 초청하여 약 4-5일 동안의 성경-신학 세미나와 같은 것을 개최한 일이 있었는데, 그 참석자들이 겨우 4-5명에 불과하였다. 그런데도 김 목사님은 교회 옆의 작은 기숙사에 모인 그 소수의 수강자들 앞에서 조금도 실망스런 표정이 없이, 조금도 자세를 흐트러뜨림이 없이 예정된 기간 전체를 정성스럽게 강의하고 떠나가셨다. 그때 그 쓸쓸한 집회를 마치고 판교 역에서 디젤 기관차를 기다리며 외로히 서 계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토록 아득한 4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그 시간의 자욱한 안개 너머로 그 잔잔한 미소의 스승이 어른거리고 있다!

[4] 냉정하지만 사태 수습에 과감한 지성인의 모습

필자가 한번은 서울 시내의 어느 강연회에 참석하였다. 귀가 시에는 교수님의 택시를 함께 타고 오게 되었다. 그 때 나는 한신 기숙사에 살았다. 그런데, 매우 어둔 그 밤에, 택시는 어느새 수유리 신학교 앞을 지나서 교수님의 집이 있는 창동쪽으로 휘달려 가고 있었다. 나는 학교 기숙사로 가야 된다고 당황한 모습으로 허둥대자, 그분은 즉각 그토록 어둔 밤에도 택시를 멈추게 하고, 무조건 어서 내리도록 내게 재촉하셨다. 거의 떠밀어 내신 것이 분명하다. 그날 저녁 나는 그분을 몹시 섭섭하게 생각하면서 그 먼 길을 걸어서 기숙사로 왔다. ‘저토록 냉정하고 무정한 사람을 어떻게 우리 신학교의 가장 훌륭한 스승으로 존경할 수가 있을가?…’ 그 날 저녁에는 내가 그 분을 몹시 섭섭하게 생각하고, 실망한 마음을 달래가면서 그 먼 길을 걸어왔지만, 나는 지금까지 그 어둔 밤의 체험으로부터 많은 교훈과 유익을 얻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아마 그보다도 수백 배는 더 냉혹하고 과감하게 어려운 일들을 처리하고 수습해 왔을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유익을 얻었다.

[5] 김 교수님의 제자 사랑

1958년경에 이영엽이라는 신학생이 시골에서 마늘을 가지고 와서 김 교수님을 집으로 찾아가 사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다는데, 방에 앉아서 책을 보시다가 6ㆍ25 이후의 그 어려웠던 시대에 자신의 어려움보다도 신학생들의 어려움을 더 생각해서 그 마늘을 사 주셨다고 한다. 그 특유의 깊고 잔잔한 미소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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