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4일 화요일

나지막한 음성으로 키워주신 스승님 / 나선정

나지막한 음성으로 키워주신 스승님


나선정 장로(한신 20회)

40년 전으로 돌아간다. 수유리 백운대 기슭 넓다란 숲속에 자리한 우리 한신, 교사와 기숙사가 아직 새 건물일 때 나는 늦깎이 신학생으로 임마누엘 동산의 가족이 되었다. 잔디밭도 채 조성되기 전이었지만 뜨락에서 피어나는 화초들로 여학생 기숙사에서 학생관(식당겸용)까지를 거닐 때면 꽃길이 이어졌다.

숲속에 한 동 한 동 자리 잡았던 기숙사는 너무 환상적이었고 곳곳에 교수님들 사택이 섞여 있어 오가는 길에 교수님과 그 가족들을 만날 수 있던 것도 한신이 지닌 축복이었다.

지금은 효촌관이 서있는 그 자리는 그 때는 학장님 댁이 서 있었고 계단을 오르내리시는 학장님과 여학생 기숙사의 내리막길을 따라 등교하던 우리들은 학교 현관 앞에서 마주치기에 알맞는 거리였다. “학장님 안녕하세요?” 우리 학장님은 자그마한 체구에 옆에 책을 끼시고 눈길 한번 위로 떴다 내리시는 답례뿐이시다. 그렇지만 우리는 무안해 하지도 않고 학장님의 뒤를 따라 킥킥거리며 따라 들어간다. 그 따뜻하셨던 눈길, 겸손하시고 온후하셨던 스승님 그분이 우리 학교 학장님이실 때 학교에 다녔던 행복감에 나는 지금도 목사님이 뵙고 싶다. 김재준 목사님. 자랑스러운 장공 선생님의 슬하에서 신학생 생활을 하였던 것이 새삼 감사하다.

목사님의 강의시간 서둘러 앞자리에 앉는다. 음성이 작으시니까. 나는 늘 급우들에게 말했다. “김 목사님 강의는 기침도 받아써야 해” 어느 동기는 내 노트를 잘 빌려갔는데 아마 그래서였을까?

4ㆍ19는 우리 학교 개교기념일이다. 학생회에서는 푸짐한 행사를 준비했고 교수님들께 여장을 하시도록 주문했다. 김재준 학장님의 다소곳하시던 어머니 모습의 여장. 박봉랑 박사님의 키도 훤칠하고 동양적이던 예쁜 아줌마 모습. 나는 어쩌다 그때 그 분들의 사진이 내 손에 있어 간직하다가 우리 교단 역사를 쓰시는 주재용 박사님에게 드렸는데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수학여행으로 전라남도 일대를 돌았다. 물론 학장님을 모시고 갔다. 호남선을 타고 목포에 내려 이국선 목사님(목포중앙교회)의 환대를 받으며 일박하고 배편으로 우수영(울돌목)에 갔다. 학우들은 갑판에 올라와 가무를 즐기는데 나는 멀미가 나서 다 죽게 되었다.

토하고 어쩌고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누가 목사님께 보고했던지 다 죽어가는 내 손을 꼭 잡고 기도하시고 자리를 뜨지 않으시던 인자한 아버지, 우수영에 내려 대지를 밟고서야 살아난 내게서 눈을 떼셨던 목사님. 우리는 해남으로 가서 이준묵 목사님의 환대를 받고 대흥사 가까이의 숙소에 묶었다. 다음날 두륜산 등산이라는데 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내게 다가오신 목사님 “갈 수 있어?”, “저는 여기서 쉬겠어요”, “그래 무리하지 말고…” 자상하신 학장님의 제자를 향하신 배려, 이는 목회할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목회의 도였으리라. 말은 없으신 편이고 조용하시지만 가장강한 호소력으로 다가왔던 스승님의 인품을 닮았어야 했는데 말은 많이 하고 빈 소리만 크게 살아왔노라고 고백 할 수밖에 없는 내가 부끄러운 데는 어이하랴!

마지막 학기면 그룹으로 교수님 댁에 초청받는 순서가 있었다. 내가 속했던 그룹이 학장님댁의 초청을 받던 날, 목사님은 안경을 벗어 앞에 모으시고 우리들은 보시지도 않고 안경만 바라보시며 나즈막한 목소리로 “과일을 들면서 내 얘기 들어봐, 콩나물이 물을 먹고 자라는데 물은 콩나물 시루 속에 머물지 않고 흘러내리지? 그러나 콩나물은 자란단 말야. 목회할 때 아무리 해봐도 안 된다는 느낌이 오거든 콩나물을 생각해, 열심히 깨끗한 물을 준비했다가 시간 맞춰 주면 콩나물은 자라지. 열과 성을 다해서. 교회를 섬기면 때를 놓치지 말고 물을 주면 자라게 하는 분은 조물주니까.”나는 이 콩나물 신학을 잊지 않고 40년을 자신을 격려하며 살아왔다.

70년대 목사님의 사회활동을 뵈면서 우리 제자들은 아니 나는 무언의 교훈을 받았다고 자부한다. 70년대, 80년대 여신도회 총무로서 섬기면서 용기를 내어 하나님의 선교정신에 입각하여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나는 장공의 제자’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목사님은 캐나다에 계실 때도 휘호를 쓰셔서 인편으로 두 번이나 보내주셨고, 귀국하셔서도 때를 따라 주셔야 할 말씀으로 휘호를 남겨주셨다. 목사님께서 캐나다에서 귀국하신 그때 차량이 없어 불편하신 것을 보고 지나칠 수 없어 당시 교단 총무였던 박재봉 목사님께 말씀드려 김 목사님의 차량을 위해 함께 모금했던 일은 지금도 흐뭇하다. 목사님의 탄신 100주년에 즈음하여 목사님의 그 수많은 제자들이 뜻 깊은 열매를 거두었으면 한다.

오늘도 장공 김재준 목사님의 뜻이 한국의 구석구석에서 열매 맺기를 기원하며 목사님께서 써 주신 휘호를 어루만져 본다. 글귀마다 힘 있으셨던 스승님의 글을 읽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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