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4일 화요일

고 김재준 목사님께 드리는 편지 / 이영숙

고 김재준 목사님께 드리는 편지


이영숙(서울노회 은퇴목사)

목사님, 그 동안도 안녕하십니까? 저희 곁을 떠나신 지도 벌써 여섯 돌이 지났습니다. 목사님께서 캐나다에 계실 때 주신 글월 가운데서, 그곳 록키산맥이 아무리 경치가 좋다 해도 우리 백운대만 못하다고 하시며, 고국의 산천을 사랑하시고 그리워하시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1ㆍ4 후퇴시, 집을 떠나 남으로, 남으로 천신만고 끝에 겨우 생명을 부지하여 부산에 도착했답니다. 그때 비로소 부친의 분부가 생각나서 비비 수녀님(2년 전에 별세 : 성공회 수녀원 창시자)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영등포 보육원 보모로 일하면서 틈틈이 독서에 전념하던 중 「현대인의 위기」라는 소책자에서 특히 역자(김재준)의 말에 감동되어 그때부터 저는 목사님을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1952년 4월에 한국신학대학의 학생이 되었답니다. 그때 목사님께는 한문학에 조예가 깊으셔서 강의하실 때마다 예수님의 교훈과 공자의 글을 비교해 주셨지요. 그것은 집에서 늘 저항감에 차서 듣던 “공자님 말씀에…” 하시던 아버지의 훈계를 또다시 들을 수 없게 된 저의 아픈 심정을 많이 달래 주었답니다.

목사님께서는 교회에서 설교하실 때는 물론 학교에서 강의하실 때도 앞에 있는 청중인 신도나 학생을 보시지 않으시고 늘 위를 바라보시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기숙사에서 때때로 언니들이 목사님의 흉내를 내면 어린 저희들은 무심코 웃기만 하였지요. 오랜 교역생활을 겪어 오는 지금에 와서 목사님의 하늘만 바라보고 사시던 그 모습이 마치 예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아시고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던(요 2:23-25)일과 함께 제 마음속에 깊은 교훈을 주고 있답니다.

환도하여서 목사님이 섬기시던 K교회에 저도 출석하여 교회 학교를 봉사할 때, 목사님께서 하시던 말씀을 지금도 늘 기억하면서 그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현실 교회에 대하여 안타깝게 여긴답니다. 그때 제가 대학원 졸업반인데 중학생을 지도하도록 하시면서 일반 중․고등학교 교사가 대학 졸업생이라면 교회의 교사는 영적인 교사인 동시에 지적으로도 일반학교 교사의 자격을 능가해야 한다는 목사님의 주장이셨지요. 참으로 그와 같이 사회에 대하여 힘있는 선교를 겸허하게 이루어 가야 할 텐데 오히려 천박한 사회 풍조에 질질 끌려가는 모습이 그저 답답하게 여길 뿐입니다.

목사님이 강의하실 때 특별히 강조하신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을 되새기며 그저 안타까울 뿐이랍니다. 우리가 누구보다도 건전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더욱 신앙과 사랑의 덕을 갖춘 생활의 본을 보여야 하며, 세상 사람들이 어딘가 이상한 눈으로 보는 그런 생활을 하는 것은 건전한 신앙인의 생활이라 할 수 없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요사이 대부분의 교회가 “철야 기도회”라 하여 가정주부들이 가족들의 취침 시간에 집을 나오고 이웃 사람들이 일어나서 하루의 일을 시작하려는 때에 들어오는(!) 아름답지 못한 광경들을 보게 됩니다. 이런 일은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교육적으로도 좋지 않습니다. 교인들을 열심히 돌보아야 할 일꾼들이 금요일에는 철야 기도를 해야 하므로 쉬어야 하고 토요일에는 철야기도 했으니까 쉬어야 하니 그저 한심스럽답니다. 힘들면서도 그저 신도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질질 따라만 가는 목사님의 수많은 제자들을 좀 책망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흥회에 대하여도 목사님께서는 우리의 일상적인 교회 생활을 “샘물”이라 하시고 부흥회를 통해 왕성해지는 모습은 “홍수”에 비기셨지요 그리고 그런 때에 열광적인 마음들, 특히 부인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금품을 많이 바치게 하는 것들을 “종교 사기꾼”이라 하셨지요. 그런데 요새 목사님의 제자들 중에 그런 종교 사기꾼들이 보여서 그저 답답하기만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저의 부질없는 기우이기만 바랄 뿐입니다. 이러다 보니 제가 마치 사마리아 사람들의 촌에 불을 명하여 멸해 주시기 바라던 야고보와 요한 같은 느낌입니다(눅 9:51-55) 오히려 저를 꾸짖어 주시기 바랍니다.

요사이 분주하다는 핑계로 사모님께 문안도 잘 못 드리게 되어 죄송스럽게 여기며 이전에 목사님께 자주 찾아가서 현실에 대한 불만과 울분을 터뜨리던 때를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목사님께서는 늘, 통쾌하게 웃으시며 미련한 저의 의사에 동감해 주셨지요. 그러면서도 더 좋은 길을 제시해 주시며, 저의 좁은 생각을 넓혀 주신데 크게 감사를 드립니다.

언젠가 목사님께서 새해 선물로 친히 써서 보내 주신 글월, “萬里長空 廣濶無涯”를 바에 걸어 두고 바라보면서 복잡하고 답답한 현실 가운데서도 먼 미래를 향해 한없이 마음을 넓혀 간답니다. 과연 하늘을 향해 초연히 서서 넓은 마음으로 보다 나은 앞날을 위하여 정성 어린 기도로써 쉬임없이 노력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전학석 목사님을 통해서 저에게 마지막으로 전해 주신 글월 “登高踏, 靑雲照流, 看白瑞, 水逝 雲彰移 落照 滿空山”은 목사님께서 백운대에 오르셨을 때 보시고 느끼신 그대로 적으셨다고 하셨습니다만 이 글이야말로 목사님과 전 목사님이 다 하늘나라로 가신 지금 유일한 저의 한 생의 기도 제목으로 방에 걸려서 좋은 안식과 격려를 하고 있답니다. “폭포수도 가고 구름도 옮겨지고 해도 떨어지니 붉은 노을이 온 산을 곱게 물들이듯” 주님과 함께 하는 저의 삶이 이 땅에서 다 할 때 주변이 주님의 빛으로 미화(美化)되기를 간곡히 기도하고 있답니다.

아울러 백운대의 정기를 안고 수유리의 임마누엘 동산에서 목사님이 정성들여 닦아 놓으시고 가꾸시며 걸어가신 길을 따라서 계속 힘들여 연마하고 있는 많은 하나님의 종들을 생각한답니다. 부디 저희들의 거룩한 순례 길을 통해서 이 삼천리 금수강산은 물론 온 누리에 널리 하늘빛이 확산되기를 기도 올린답니다. 목사님께서는 이미 멀리 바라보시며 소망 중에 큰 기쁨으로 기도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저도 주님 안에서 목사님을 만나 뵈올 때가 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전에는 목사님께서 사랑으로 좋은 지도를 해 주시던 K 형님의 전화를 받았답니다. 세상이 귀찮아서 목사님의 「범용기」를 읽으면서 요사이는 목사님과 함께 즐겁게 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이만 줄이렵니다. 놀라우신 주님의 은혜 안에서 영원토록, 하늘 평강을 누리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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