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4일 화요일

그렇게 크신 분 / 이영민

그렇게 크신 분


이 영 민(서울노회 공로목사)

長空 金在俊 목사님은 사랑의 큰 스승이시다. 교회와 사회의 큰 지도자이시면서, 또한 과묵과 겸손과 다정한 삶의 모습으로 사람들과 함께 하신 어른이다. 그리고 청빈하셨다. 나는 목사님을 가까이 모시는 위치에 있었던 한 사람이었지만 제대로 잘하지 못하고 부족했던 것을, 그분이 가시고 난 다음 얼마나 뉘우치고 안타까워했는지 모른다. 그런 사람이 어찌 나 한 사람뿐이랴.

1.

나는 전후 13년 동안 기장 교단 총회 총무직을 수행하면서 임원선거 문제엔 관여하지 않으려 했다. 교단 목회의 자리라 생각할 때 그럴 수 없다고 믿은 것이다. 그러나 단 한번 1965년 9월 제50회 희년총회 때엔 장공을 총회장으로 모시는데 앞장섰다. 혹자는 학자가 복잡한 총회 안건을 어떻게 처리하며 사회할 것인가 하고 기우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공은 훌륭하였다.

잊혀지지 않는 일 하나는 그 희넌총회 때 일어난 극적인 일이다. 총회는 희년총회에 걸맞게 “교회갱신”을 주제 삼아 선구자적 자세를 논하고 그 사명이 고조되며 은혜스럽게 진행 되었다. 그러던 중 둘째 날 오후 회기 때 한 총대가 일어나 일본기독교단 의장을 총회 단상에 세울 수 없다고 발언함으로 문제가 생겼다. 그런데 그 일은 이해영 전 총회장 때 총회임원회 결정과 노회장 연석회의의 인준으로 공식초청장이 나간 상황이고, 또 전날의 총회개회 벽두에 절차보고가 채택됨으로써, 이미 총대 전원이 이를 이의 없이 인준하고 진행하던 사안이었다. 더군다나 그 시간에 일본의 오오무라 이사무(大村勇) 의장은 하네다 공항을 떠나 서울을 향해 오고 있었다.

한편 그해 6월에 조인된 “한일 기본 조약”은 한국 땅에 거센 반대의 물결을 일으킨바 있다. 장공은 그 격랑 속에서 이른바 “한일협정굴욕외교 반대 범국민위원회” 공동의장으로 굵직한 발자취를 남겼었다. 그러한 장공이 총회장으로서 그 미묘한 사안을 다루게 되였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만일 그때 총회장이 다른 분이었다면 어떻게 수습이 되었을 가하고 나는 생각해 본다. 총회는 그 일로 무려 3시간 반 동안 진통을 겪었다. 민족감정과 시기문제가 초점이 되고, 화해의 복음과 교회의 일치문제가 역설되었다. 나는 그 격한 논쟁 속에서 만감이 교래 했다. 실상 나로서도 어려운 시국에 일본교회 대표를 오게 하는 일에 염려가 없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교회의 본질상 그대로 진행할 것을 말했고, 또 이미 공식초청장이 나간 상황에서는 다른 선택이 없어 보였다.

그러한 와중에 총회 며칠 전 일본기독교단 회보를 보고 나는 주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오우무라 목사는 큼직한 머릿기사로, 자기가 한국에 가는 것은 “의례적인 방문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한국교회 형제들의 말을 듣고, 과거 일본이 저지른 죄과에 대해서 사과하러 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 교단의 상의원회(常議員會)에서 정식으로 채택한 사죄의 메시지를 가지고 간다고도 했다. 그럴진대 과거 20년간 공적인 교류가 끊어진 양국교회 관계를 위해서도, 우리 기장이 그를 초청한 것은 획기적이고 잘한 일이 아닌가.

총회는 그렇게 오랜 시간 격론 끝에, 그를 예정했던 대로 단위에 세우자는 동의와 그를 교회 구내에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자는 개의 등을 표결에 붙이게 되였다. 그 결과 아주 근소한 표 차로 증경총회장들에게 문제가 맡겨져 그들의 결정으로 오우무라 의장이 단상에 서게 되어, 김포공항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던 그를 총회장이 만나 경위를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

그날 밤 그 희년총회 기념식전에서 오우무라 목사는 자신의 역사적인 역할을 잘 수행했다. 겸손했고 메시지의 내용 또한 훌륭했다. 일본교회의장의 내방은 결과적으로 성공한 것이 되고, 후에 그 일의 잘못을 말한 사람이 없다. 하나의 “새 역사”의 이야기이고 “하나의 교회”의 명제에 충실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장공이 총회장이 아니었으면, 또 소신과 바른 판단력의 지도력이 아니었으면 교단은 크게 어려웠을 것으로 느껴진다.

2.

정규태 목사님은 충남노회를 오늘의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크게 기여한 한 분이다. 교단의 “새 역사” 전개를 위해 신념의 참여를 한 것이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우도 좌절도 적지 않았다. 교회를 위해 신앙부흥운동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그는 소신하였지만, 그러나 교단의 분위기는 이를 백안시하는 듯 해서 그는 “기장이 무엇인가”의 물음을 품게까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나를 만나 물었다. “교단의 현재와 앞날을 총회총무는 어떻게 봅니까.” 1970년 봄 이야기이다.

나는 말했다. “누가 기도와 영적 운동을 반대하고 소외시킵니까. 우리는 각자의 소신에 충실하면서, 이른바 보수나 진보나 간에 굳어져서 독선, 절대화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신앙양심과 학문의 자유’가 기장 이야기가 아닙니까. 어느 노회나 교회도 우리의 과제를 위해서 ‘책임 있게’ 생각하고 움직이고 행동할 ‘자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도 각자가 받은 은혜와 신념에 따라, 산을 찾기도 하고 사회문제에 관심하고 행동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각자 복음의 증언자로서의 모양은 달라도, 그러나 우리는 하나입니다. 이것이 내가 믿는 우리 기장입니다….” 이른바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를 피력한 것이다.

정 목사는 이야기 중에 표정이 밝아짐을 나는 느꼈다. 그는 공감을 표하면서, 그 내용을 교단을 위해 염려하는 자신들의 신앙부흥집회에 와서 그대로 말해 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초청을 받으면 김재준 목사님과 함께 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1970년 10월 장공을 모시고 정읍 남경산기도원에서 모인 “교역자 기도회”에 참석했다. 우리가 가는 일에 비판적 시각들도 있고 말린 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장공은 스스럼이 없었다. 그렇게 크신 분인 것이다.

장공은 “기독교 신비주의와 그 건전성”이란 제하의 훌륭한 강연을 했다. 교회사적으로 영성과, 신앙부흥운동의 발자취와 그 중요성을 말하는 한편, 흔히 빠지기 쉬운 교만과 그릇된 신비주의적 위험의 교훈을 상기시켰다. 그때 그곳에는 교단교역자의 삼분의 일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 후 그 신앙부흥운동은 1974년에 총회전도부의 전 교단적인 “선교대회”로 변모 발전되었는데, 남경산 모임에서의 분위기의 변화가 그 하나의 계기가 된 것으로 나는 안다.

1972년 총회에서 채택된 우리의 뜻깊은 “신앙고백선언서”를 마련하는 일에, 장공은 주역을 맡아 전경연, 서남동, 박봉랑 박사 및 그 밖의 위원들과 함께 수년간 많은 애를 썼다. 특히 신조연구위원회 활동의 막바지 기간에는 장공이 거의 매주 하루씩 몇 분들과 함께 당시의 좁다란 총회 총무실에서 토의할 내용을 가지고 와서 땀을 흘렸다. 어딘가 좋은 데로 갈 생각을 안하고 그저 차 한잔을 마시며 겸허하게 열심히 봉사하는 모습들이 깊은 인상으로 남는다. 장공의 총회장 시절 그분의 품격과 삶의 모습을 지켜보며 실로 나는 많은 것을 느끼며 배운 것이다.

3.

장공의 사랑과 보살핌은 깊고 변함이 없다. 1980년 정초에 장공은 내게 편지를 쓰셨다.

“…와싱톤에서 봉사센터 일을 맡아 보신다니 기쁩니다. ‘섬기려 오신’ 그리스도 아래서 ‘섬기는 제자직’에 몸 바치신 것은 당연한 본분이라 생각합니다….”

그 무렵 장공은 토론토에 머물며 나라의 민주화운동을 위해 힘쓰며 나그네의 날들을 보냈는데, 그러한 가운데서도 격려의 편지를 아끼지 않은 것이다. 장공은 타고난 상담가이기도 하다. 그는 설교하지 않는다. 오히려 깊은 인간이해의 귀를 기울여 경청해 줌으로써 도움이 되게 한다. 경청(Listening)의 상담이라고 할까. 사람들은 곧잘 장공을 찾아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스스로 결론도 내리는 듯 했다.

1985년 정초에 나는 장공으로부터 신년휘호 글을 우편으로 받고 가슴이 뭉클했다. 하나님의 사랑의 소중한 사역을 격려하기 위해, 이사야서 42장의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말씀을 한문성경 문장으로 써보내신 것이다. ‘생명의전화’ 聖業을 위해서라고. 돌아가시기 2년 전 일이다. 실로 깊은 사랑과 보살핌의 큰 어른이시다.

“己傷之葦 不折 燃餘之炫 不滅 必循其原理 以傳眞法 不衰微 不困憊 迨設眞法於 世洲島居民 俱仰望其訓 以生氣賦 地上之生民 以賽亞四十二章所記之句
爲生命의電話 聖業 一九八五年乙丑元日 於白雲山家八五叟 長空 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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