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4일 화요일

민족 화해의 물꼬 트기를 원하시던 목사님 / 김윤옥

민족 화해의 물꼬 트기를 원하시던 목사님


김윤옥
(한국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 공동대표)

김재준 목사님은 내가 13년간의 오랜 독일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던 해에 돌아가셨다. 6개월 먼저 귀국했던 나의 남편, 손규태 교수는 목사님의 임종을 지키는 축복을 가졌지만 늦게 귀국해서 장례식도 참석하지 못했던 나는 남편이 전하던 목사님의 말씀에 기쁨과 그리움을 안고 울었다. 그 말씀은 병실에 들어오는 남편에게 반기시며 “윤옥이는 안왔어?” 하고 찾으셨다는 것이었다. 그 한마디를 전해들은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것은 한국신학대학 시절부터 독일에서 귀국한 당시까지 25년여의 세월을 인생의 스승으로, 마음의 아버지로 의지해 오던 목사님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학교시절에는 윤리학과 설교학 강의를 목사님에게 들으면서 학문의 자유가 무엇인지를 배웠다. 졸업 후에는 수유리의 목사님 댁 가까이에 살면서 목사님의 큰 나무 그늘과 같은 인품의 근본이 어디에 있는지를 많이 경험했다. 책으로 엮을 수도 있을 만큼 내가 듣고 경험했던 수많은 목사님의 에피소드는 허식이 없는 인간다움과 큰 비전을 위한 끊임없는 의지력의 조화가 어떤 것인지를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하게 떠오르는 목사님의 추억은 아마도 독일 생활 때에 만났던 목사님의 모습인 것 같다. 우리는 1975년부터 1988년까지 독일에서 공부도 하고 목회도 하고 했는데 그 시기는 국내에서는 기독교의 민주화운동, 특히 한국기독교장로회(PROK)의 활약이 세계교회의 관심을 끌고 있었고 해외 민주화 네트워크도 활발하던 시기였다.

우리 집은 공항이 있는 프랑크푸르트여서 우리 스승인 안병무, 문동환, 이우정, 서남동 교수님들을 비롯하여 한승헌, 송건호 선생님 등 많은 민주 인사들이 숙박하고 담소를 나누고 떠나고 했다. 그 중에서도 지금 회상해 보니 해외 목회와 공부의 고달픔과 외로움에 피곤했던 우리 부부에게 가장 위로가 되었던 분은 역시 김재준 목사님이었던 것 같다.

군사독재정권의 심한 탄압으로 국내에서는 ‘통일’이라는 언어가 타부로 되어있던 70년대 말이었다. 강대국들의 군사적 편의로 분단되어 민족이 적대하며 남북사회가 모두 파행으로 치닫는 현실타개를 위해 해외 민주운동 네트워크는 통일 세미나를 여기저기서 시도하고 있었다.

독일에서도 한인 민주화운동의 세력화를 위한 통일 세미나 재정을 위해 당시 헤쎈 나사우 교회 목사로 있던 남편은 봉사국(Diakonischeswerk) 바이씽거(Weissinger) 목사에게 부탁하여 체제 경비를 위한 5,000마르크 정도의 지원금을 얻었다. 독일 고백교회 출신인 바이씽거 목사는 우리 부부가 부탁하는 한국민주화를 위한 지원금은 언제나 쾌히 만들어주던 분이었다. 내가 재독교회여성연합회 창립을 위한 지원금을 부탁한 것도 바이씽거 목사였고 귀국 후 여성평화운동을 위한 ‘기독교여성평화연구소’를 세워나간 재원도 역시 바이씽거 목사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어쨌든 그 통일 세미나에 당시 해외 민주세력의 얼굴이셨던 김재준 목사님은 강사로 초빙되어 독일에 오신 것이다. 세미나는 프랑크푸르트 근교 타우누스 속의 세미나 하우스에서 개최할 예정이었는데 목사님은 일주일전에 우리 집에 도착하셔서 쉬시면서 지내시다가 어느 날 갑자기 스위스 제네바에 다녀오시겠다고 떠나셨다. 스위스 제네바에 다녀오신다고 하시니 우리는 ‘세계교회협의회’ 본부에 가시거나 세계개혁교회연맹에 가시는 것으로 짐작했다. 그러나 며칠 후 돌아오신 목사님은 제네바에서의 생활을 묻는 나의 물음에 주저없이 솔직히 대답하시는 것이었다.

“나 말이야 북한 대사관에 다녀왔어.” 놀래는 우리에게 목사님은 말씀하셨다. “북한 사람들 말이야, 참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이더라 … 대사를 만난 건 아니고 북한에서 나온 고위층 사람이라는데 참 점잖고 민족의 운명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더라 … 나더러 고향에 가고 싶으면 언제든 오라고 하는 거야. 연세도 드셨는데 한번 고향에 가보셔야지요 하고 말이야 참 따뜻하게 말하는거야 … 우리 민족이 서로 적대해서 엄청난 무기를 가지고 싸워보았자 누구 좋은 일 하는 거겠어? 나는 그래서 말이야 늙은이답게 인간이 만든 휴전선이고 반공법이고 다 무시하고 헐훨 자유롭게 고향에 가보고 싶어. 그리고 김일성을 만날 수 있으면 만나서 말이야, 우리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대화도 해보고 싶단 말이다.”

사실 신학영역에서 학문의 자유를 주장해서 이단으로 몰렸던 목사님이니 그의 영혼에는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울타리나 벽은 하찮은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젊을 때 떠나셨던 고향, 함경북도 경흥군 창골의 개천 위 돌다리를 목사님은 어슬렁 뒷짐지고 건네시고 싶으셨을 것이다.

제네바에 다녀오신 이후 며칠간, 밤이면 늦은 2시까지 고향 이야기, 젊은 시절 이야기에 주무실 생각을 하지 않으셨다. 내가 주무시자고 하면 섭섭한 표정으로 방으로 들어가시곤 하셨다. 80을 눈앞에 두시고 고향을 그리시고 민족분단의 벽을 허물어보고 싶어하시던 목사님의 모습은 지금도 나에게 강한 아픔으로 남아있다. 목사님은 가실 수 있었지만, 가고 싶으셨지만 해외민주세력을 위해서 가지 못하신 것이다. 해외민주네트워크의 대표자이신 목사님이 북한에 다녀오시면 우리들 모두는 귀국도 민주화운동도 포기해야 할 사정이었다.

타우누스에서 열렸던 통일 세미나에는 150명 가량의 초청장을 보냈으나 40여명이 참석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한신대 출신과 서울대 출신만이 모였다. 당시 독일의 민주화운동의 기수들은 주로 한신 출신과 서울대 출신들이라는 것이 드러난 모임이었다. 여기서 목사님이 미국의 선우학원 박사의 권유로 북한대사관에 다녀오신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되었고, 우리 부부는 캐나다의 이상철 목사님을 비롯한 어른들에게 심한 꾸중을 듣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내내 우리 집에서 목사님이 밤마다 나에게 들려주시던 생각들, 민족애와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잊을 수 없다. 그 모임을 마치고 가셔서 정월 초하루에 목사님은 우리에게 우리 이름을 넣어 가훈을 삼을 족자를 보내주셨는데 ‘80옹 장공’이라고 서명하셨으니 아마도 통일 세미나의 해는 목사님의 70대 마지막 해였을 것이다.

그 후에 문익환 목사님이 훨훨 북한으로 단신 넘어가셔서 온통 난리가 났다. 나는 그때 김재준 목사님의 북한대사관 방문을 떠 올렸다. 우리 스승들의 자유혼, 해방된 영혼과 실천의 의지가 한신 출신들의 강한 기둥이 되고 있는 것이리라. 90년대 초 이우정 선생님이 남한의 여성대표단 20명을 이끄시고 분단 후 처음으로 휴전선을 육로로 넘어 평양에 가셨다. 민간교류로는 첫 물꼬를 트신 것이다. 김재준 목사님의 염원이 이렇게 한신 후배들에 의해 전수되었고 그것은 조금씩 어름을 깨는 햇빛이 되어 오늘날의 화해무드, 평화무드로 숙성이 된 것이다.

김재준 목사님의 영혼은 이제 고향 창골의 돌다리, 밤마다 나에게 설명해 주시던 그 돌다리를 훨훨 넘어 다니시며 아직도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미국의 군사적 전략기지로, 세계화의 시장경제 우위의 혼탁 속에 있는 우리에게 인간욕망을 버리고 민족의 통일과 평화, 맑은 인간 생명 우선의 정의로운 사회, 하나님 나라 건설의 일을 촉구하고 계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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