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4일 화요일

장공 선생과 나 / 정용섭

장공 선생과 나


정용섭 목사(미국 캔사스 한인연합장로교회 원로목사)

「십자군」

내가 장공 선생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그가 발행한 「십자군」에서다. 1947년 봄이었던가. 그때 나는 일본에서 돌아와 시골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30쪽 분량의 얇은 잡지였는데 당시 한신에 다니던 매형이 보내 주어 읽었다. 계속 책을 받아들고 읽으면서 나는 장공 선생의 글에 매혹되어 갔다. 한번 손에 들면 끝까지 읽어야 놓게 되는 책이었다. 그 글들을 읽는 중에 나는 그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났다. ‘대체 어떻게 생기신 분일까? 이런 글을 쓰실 정도면 대단한 학자일 텐데 보통 사람과는 다르겠지. 나는 언제쯤이면 이와 비슷하게 흉내라도 내볼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매형이 방학에 내려와서 신학 공부를 해보란다. 나는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아버지가 목사요, 형이 목사요, 매형도 곧 목사가 될 텐데 나까지 뭘.”

목사의 가정에서 태어난 나는 어릴 적부터 엄격한 가정 예배와 교회의 규율 속에서 자랐다. 일본 도쿄에서 미션 스쿨을 다닐 때는 성경 시험에 늘 좋은 점수를 받았다. 외워서 답을 쓰는 것이기에 별로 힘들지 않았다. 그러나 성경을 배울수록 모르는 게 더해갔고 의문 투성이였다. 당시 유행하던 실존주의 철학 서적들을 있는대로 탐독했다.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성서와 기독교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교회에 가는 게 시들해졌고 이러다가는 누구처럼 신앙을 팔아먹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 문을 두드린 것은 아니었다. 그런 건 나보다 나은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고 다만 내가 가진 질문들과 신앙적인 고민을 신학교에 가면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1949년 봄에 서울 동자동 언덕 위의 신학교를 찾아갔다. 더 궁금한 것은 「십자군」의 주필인 장공 선생을 만나는 일이었다.

하늘 천 따 지

내가 만난 장공 선생은 그의 글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얼굴이 아니었다. 만우(송창근) 선생과는 딴판이었다. 입학한 지 한 달쯤 되었을까. 어느날 교정에서 “정용섭!” 하고 뒤에서 부르는 음성이 들려왔다. 만우 선생(당시 학장)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기겁해 버렸다. ‘아니, 저렇게 고고하게 생기신 학장님이 어떻게 시골 촌놈인 신입생의 이름을 아실까?’ 나는 그날부터 만우 선생에게 꼼짝 못했다.

그런데 이듬해 1950년 6월 25일 주일날, 인민군이 서울에 밀어 닥쳤다. 후에 들으니 만우 선생은 곧 이북으로 끌려가셨고, 장공 선생은 경기도 이천 어디엔가 숨어 계셨다고 했다. 시골 농부들이 입는 옷을 입으시니까 인민군이 알아보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나는 피난을 가서 부모님과 합류했으나 계속 남쪽으로 밀리다가 부산에서 UN군에 들어가 일본 큐슈로 갔다. 거기서 보조 군목으로 배속을 받았고, 원산 상륙, 부산으로 후퇴, 다시 북진하다가 휴전이 된 후 제대하고 복교했다. 교무과에서 3학년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지만 “5년 공부 3년하려다 10년 걸린다”라는 말을 누구에게선가 들었기에 2학년에 들어갔다.

당시 우리 대학은 신학교로서는 국내 최고의 교수진을 갖추고 있었다. 학생들은 모두 자부심을 가지고 강의를 받았고, 나는 평소에 갖고 있던 숱한 질문들을 거의 강의 시간마다 쏟아 놓았다. 그럴 때마다 교수님들은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고, 나보다 5, 6년 연하의 동급생들에게는 아직 문제도 되지 않았던 질문들을 해댔다. 그 덕분에 그들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다들 좋아했다. 그 중에서도 장공 선생의 대답은 아주 명쾌했다.

장공 선생은 기독론, 교회론, 기독교 윤리 등 여러 분야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셨다. 강의 시간에는 무슨 책인지 두꺼운 책 한 권을 들고 들어와서 펴지도 않고 강의하셨는데, 학생들의 눈과 마주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땅 한 번 내려다보는 ‘하늘 천 따 지’의 강의였지만 그 내용은 주옥과 같았다.

내가 도와줄 테니

내가 학부 4학년이 되던 해였다. 당시에는 각 대학마다 학도호국단이라는 게 있었다. 학생회장도 겸한 선거로 학생총회가 열렸다.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나를 운영위원장 겸 학생회장으로 뽑았다. 나는 즉석에서 “하고 싶은 사람이 따로 있으니 그를 시키라”고 사양했다. 그러나 상급반의 운영위원회가 결정해서 천거한 것이라고 총회에서 뽑았으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총회가 끝나고 나는 장공 선생 댁으로 처음으로 찾아갔다. 경위를 다 듣고 나서 그는 내게 물었다. “안 하겠다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네, 저는 6ㆍ25 전에 입학했다가 군대에 가싸 왔습니다. 공부가 늦었는데 공부에만 전념하고 싶습니다.” 그러자 장공 선생이 말씀했다. “전교생이 뽑아 줬는데 피할 수야 없지 않나? 회장이란 앞에서 뛰는 게 아니야. 임원들을 앞에 내세워 뛰게 하고 뒤에서 밀어 주기만 하면 돼.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내가 도와줄 테니 사양 말고 해봐.” 그의 이 말은 내게 지혜와 힘이 되었다. 그때 나는 학생 신분으로 이것 말고도 다섯 개의 ‘장’을 더 맡았던 기억이 난다.

이게 무슨 뜻이지?

내가 대한성서공회 성서번역실장으로 신약 새번역을 하고 있을 때였다. 1960년부터 시작해서 1965년 봄에 초역과 번역위원회의 독회가 끝났다. 헬라어 원문에서는 처음으로 번역하는 일이어서 역사적인 사업이었다. 1965년 7월에 일본 도쿄에서 동북아시사 성서 번역자 세미나가 한 달 동안 열렸다. 번역위원들과 함께 갔다. 워크숍까지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 후 문장위원회가 구성되어 번역한 글을 다듬어 갔다. 그때 장공 선생이 문장위원의 한 분으로 들어오셨다. 은사와 함께 성서 번역 작업을 하게 된 것이 내게는 기뻤다. 장공 선생은 헬라어 신약성서를 한쪽으로 펴놓고 번번이 “이게 무슨 뜻이지?”라고 내게 물으셨다. 나는 대답을 해드려야 하기에 헬라어를 더 열심히 파고 들었다. 성서공회 총무도 동석을 했는데 그는 나에게 “Mr. Greek”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장공 선생은 가까운 이들에게 내 얘기를 좋게 해주셨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문장을 다듬는 과정에서 신학자요 문장가이신 장공 선생의 고견이 새번역 신약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성서공회로서나 그 성서를 읽는 신도들에게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Syntax를 공부해 오면 좋겠어

신약성서 새번역은 1967년에 완성되어 성탄절 무렵에 출판이 되었다. 번역을 시작한 지 7년 만의 일이었다. 문장을 다듬는 작업이 끝날 무렵, 장공 선생이 내게 말씀하셨다. “정 목사, 프린스턴 신학교에 가서 헬라어 Syntax를 공부해 오면 좋겠어, 거기에 메츠거 교수(Bruce M. Metzger)가 있지. 우리나라엔 아직 그 공부를 한 사람이 없으니까.” 메츠거 박사는 세계성서공회가 공인한 헬라어 신약성서(1965년 판) 4인 편집위원 중 한 분이었다.

그런데 신약이 끝나면서 가톨릭과의 공동번역이 시작되었다. 그쪽과의 접촉 임무가 내게 주어져서 여러 차례 대표들과 만났고 먼저 구약성서 번역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나는 장공 선생의 권유대로 프린스턴에 가려고 하는데 가톨릭 측에서 나를 못 가게 했다. 신약도 동시에 시작해야 하고 원문을 다루는 데 내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공동번역 신약은 새번역보다 진도가 빨랐다. 그런데 번역이 끝날 무렵에는 이미 메츠거 교수가 프린스턴에서 은퇴하고 없었다. 공동번역 작업은 주로 가톨릭 대학에서 했는데 그 동안 가톨릭 교회에 대해 궁금했던 것을 알게 되었고 예배학에 대한 관심도 커져 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의 신학계는 조직신학만이 신학이요 정작 일선 목회에 필요한 실천신학은 냉대했다. 졸업생들이 교회에 가서는 배운 것을 보자기에 싸서 선반에 얹어 놓고 목회를 했다. 예배신학을 배운 일이 없어 예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예배를 인도하는 것이 목사인데 교인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예배 인도자는 그저 선배 목사들이 진행하는 예배 순서를 흉내내었고 교인들은 모두가 예배를 보는(?) 구경꾼이었다. 지금은 많이 달라져 가고 있겠지만.

이 글을 끝맺으려는데 생각나는 게 하나 있다. ‘만일 장공 선생의 권유대로 곧장 메츠거 교수에게 가서 헬라어 Syntax를 공부했더라면 나는 어떤 길을 걷게 되었을까? 나도 한때 서울에서 신학교 교수 생활을 했으니까 그대로 지내다가 은퇴를 했겠지. 미국에 다시 와서 이민목회를 하거나 미국 시민권자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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