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4일 화요일

장공에게서 남은 메아리 / 김학운

장공에게서 남은 메아리-노트를 꿰매지도 않고-


김학운(충북노회 은퇴목사)

(1) 『낙수』(落水)를 통하여

내가 이 책을 얻어 읽은 것은 6․25동란 직전인 듯 싶다. 고 윤반웅 목사님의 권유로서 「십자군」 몇 권과 이 『낙수』를 얻어 밤을 새면서 읽고 또 읽었다. 40여 년 전에 읽은 탓으로 지금은 정확한 내용이 기억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유려한 문체, 그 삽상하고 간결했던, 그러면서도 논리 전개의 날카로움이 비수같이 세련된 내용을 잊을 수 없다.

장공에 대한 이러한 영상을 갖고서 동자동 교사에서 개학식에 임했던 것이다. 바로 6․25가 나던 해 故 송창근 박사님이 개학식 순서에 따라 교수들의 프로필을 소개하셨다. “김재준 목사 목사 하니까 키가 전봇대만큼이나 크신 분일 줄 아는데, 보세요! 제일 초라하신 분이지 키가 작고!” 그만 일동이 박수갈채로 이 유머를 더 크게 환호하였고 나도 처음 장공을 뵙게 된 터였다. 그러니까 내가 지면을 통해서 그의 문장처럼 위풍이 당당한 분으로 가상하고 있던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송 박사님도 안티테제식으로 인물 소개를 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송박사님의 마지막 모습을 특히 해 두고자 한다. 동란이 터진 바로 그 다음 아침에 흰 모시 두루마기를 입으시고 교정에 우뚝 서시어 “남쪽으로 떠나라! 남쪽!” 고성을 외치시면서 지시하셨던 송박사님! 송박사님의 이미지는 참 순교자이며 목자상으로 부각되어 도시 나의 망막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다.

(2) 부산 남부민동 교사에서

“노트를 꿰매지도 않고 내는 사람은 어디 있소?” 잊혀지지 않는 장공의 말씀이다. 부산 남부민동 천막교사가 시절이었다. 이때는 누구나 다 피난민으로 고생하던 때였다. 유달리 내성적이었던 나는 좀처럼 교수님들을 찾아가 상담하길 매우 주저주저하였던 시기였기도 했다. 더구나 강의가 끝나자마자 나는 직장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고달픈 때였다. 다른 학우들, 이상철, 신현균, 이정학 목사 등은 으례 교수님들과 한참씩 담소들을 하는 게 여간 행복스럽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일주일에 세 번 장공 선생님의 강의 시간만은 빼먹을 수가 없다는 게 그 당시의 집념이었다.

기독교윤리, 조직신학, 요한계시록 강해 등 아직도 눈앞에 삼삼하다. 조향록 목사님 표현대로 천지자(天地字)의 제스츄어 그대로였던 것이다. 마치 수업 시작 종이 울리자 강의는 시작됐다. 그리고 결론을 내리게 되는 마무리 말. “…입니다”가 끝날 때 수업 종료 종이 땡땡 울렸던 것은 너무나도 감명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당시 나는 기적적(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으로 학교엘 나가고 있었다. 150명의 종업원들을 거느린 미국인 회사 통역 일을 보면서 아침 7시 반에 출근하여 점호를 마친 다음 각 반장들에게 그날의 일거리를 맡기고 나서 나는 학교로 줄행랑을 쳤다. 물론 상부의 허락을 받고 한 일이지만 너무나도 기적적인 일이어서 여기 잠시 술회함을 용서하길 바란다. 이때 나와 같이 고학을 하여 지금은 대한방적 전무가 된 정양수 장로도 있다. 이는 우리 동문 정길수 박사의 계씨이다.

그러므로 거의 노트를 또박또박 재정리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따라서 강의 시간에 베껴 쓴 난 필체 그대로를 누런 봉투에 간직하고 있었다. 이런 판국에 학기말이 되어 〈요한계시록〉강해는 노트만을 정리해서 제출하라는 시달을 받았던 것이다. 무심코 나는 그 누런 봉투에 보관하고 있던 시험지 꾸러미 ‘타자지’를 적당히 핀만 꽂아 제출해 버리고 말았다. 그야말로 유치원 아들의 철부지 소행과 방불한 짓이었다.

수일 후 노트들이 모두 반려되었다. 나의 종이 뭉치 노트도! 그러나 책상 위에 부채 화살처럼 쫙 퍼져 있으면서 게으른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 흰 종이 쪽지에 “노트를 꿰매지도 않고 내는 사람은 어디 있소?”가 붙어 있었다. 순간 전기에 감촉 되는 충격과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해운대 앞 바다 파도처럼 치솟아 올라왔던 것이다. 나는 그 길로 문방구를 찾아가 새 노트를 사가지고 정성껏 재정리를 하였다. 일주일 꼬박 걸렸을 것으로 기억된다. 물론 회개하는 마음이 뒤따라 간 것이다. 개학이 되자마자 나는 의기양양하게 장공 선생님의 교수실에 찾아가 묵묵히 제출하였다. 씽긋이 웃으시기만 하시던 장공 선생님… 학적부에도 곱게 고쳐 놓으셨다. 60을 80으로.

8년 후 내가 서울 T고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교직원 하기 수양회에서 장공 선생님을 강사로 모시게 되었다. 실로 우연한 기회가 나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당시의 장 교장님은 나더러 사회를 맡으라고 해서 더욱 사제지간의 정리를 두텁게 할 기회가 마련되었다. 그 노트 하나 제대로 정리 할 줄 모르던 개구쟁이 제자가 의젓하게 서울 장안 일류 고교의 당당한 교사로 둔갑해 있었으니 너무나 흐뭇하였던 탓이리라. 연신 싱긋벙긋 웃으시기만 하시던 장공 선생님, 우린 종로 일가 한일관에서 마주 않자 불고기 삼인분씩 거뜬히 해 치웠다. 시종 말씀이 없으셨으나 식사를 아주 만족스럽게 드시었다. 마침내 택시에 올라타시어 나의 손을 힘있게 쥐시면서 “열심히 공부해요” 단 한마디.

(3) 그의 마지막 케리그마

「신한민보」(The New Korea Times, 1905 창간)는 도산 안창호 선생을 중심으로 했던 홍사단의 기관지였고 미주 유일한 교포 독립신문이었다. 이 신문의 공과 여부는 사계 전문가들에게 맡기거니와 다만 내가 이 신문의 주필로 잠시 몸을 담고 있었고 여기 또한 장공 선생님의 마지막 구국 선언문이 개재되었던 일을 새롭게 조명해 봐야 하리라고 본다. 지금은 이 신문이 아쉽게도 제삼 진영으로 아주 넘어가 버렸다. 그 이유는 박정권 말엽, 그 탄압이 너무 심해서 자의타의 반반, 급기야 그쪽으로 피신한다는 게 아주 좌경화 되고 말았다.

당시 나는 미주 「동아춘추」와 「신한민보」 양사에 논설위원 대우를 받고 있었다. 우연히도 장공은 여기 옛 망명 거물급 정치인들과 함께 “박정희 군사정권 물러가라! 박정희는 망한다!”라는 모토로 통매하였던 것이다. 여기 그 성명서를 게재할 수 없음이 아주 유감이다. 물론 장공이 초했던 그 명문 선언이 이곳 일간신문 전면 톱기사로 다루어졌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섬세하고 명석 삽상한 그 문체! 나는 지금 이를 병렬법으로 그 이미지를 벤쟈민 프랭크린의 모토와 포개어 본다.

1776년 미주 대륙이 영국 식민지로부터 독립을 선언할 때의 프랭클린의 유명한 모토는 “Rebellion to Tyrants is Obedience to God"(Carl V. Doran, Benjamin Franklin, 1938)이었다. 하는데 장공의 모토와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실로 장공의 마지막 케리그마도 조국에의 민주주의 복원을 위한 혼신의 태클(tackle)이었다.

나라와 겨레 위한 그의 진정한 케리그마적 클라이맥스가 장엄하게도 아메리카 대륙에서 그 막을 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왜냐하면 이 일이 있은 후 박정희의 암살이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4) 말을 맺으면서

마지막으로 채플 시간에 얻었던 여적(余滴)중 하나를 상기해 보면 요한복음 2장 1-11절에서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 관한 메시지였다. 즉 크리스찬 가정의 사명은 가정, 사회, 교회, 국가에 가장 좋은 것으로 공헌해야 한다고 역설하셨다. 세상 사람들과 달리 크리스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관성 있게 보다 더 좋은 것을 제공하므로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도록 하는 것이 크리스챤의 캐릭터라고 강조를 하셨다. 이렇듯 그는 분명히 최후의 순간까지 최선의 것으로 우리 교계와 학계는 물론 사회와 겨레 위해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공헌하셨다고 봐야 하겠다.

人生의 노트를 아직도 나는 꿰매지 못한 채 흔들리는 죄책감이 서리서리 날 감싸쥐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래도 이제는…’ 하고 안 간 힘을 다하여 유랑의 나그네 25유성상, 백발을 무릅쓰고 탕자의 Homeward Journey를!

흰 쪽지에 아주 선명하게 씌어졌던 장공 선생님의 책망, “노트를 꿰매지도 않고…”를 나는 나의 케케 묵은 서가에서 할 일 없이 다시 찾아본다. 이제는 어언 40년이 더 넘었다. 행여나 친히 육성으로 나의 고막에 가까이 대시고 다시 한 번 고즈넉히 타일러 주셨으면 하는 어리마친 영상에 사로 잡혀 설레는 가슴을 달래어 본다. 九萬里 長空의 長空님!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