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4일 화요일

장공과의 만남과 억지 제자의 변 / 박형규

장공과의 만남과 억지 제자의 변


박형규(증경총회장)

[1]

지금은 그 얼굴을 뵐 수도 없고 그 음성을 들을 수도 없는 김재준 목사님. 그러나 그 분의 인품과 사상의 일부가 지금도 나의 삶 속에 존재해 있고 나의 인간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설교 준비를 하면서 간간이 그분이 쓰신 글들을 다시 읽는다. 그때마다 내가 지금까지 해 온 설교와 강연들이 대부분 그분의 사상을 복사하고 부연한 것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고 놀랄 때가 있다. 나는 長空에게 사사한 적이 없었다. 한번도 그분의 강의를 들은 적이 없었다. 그분의 설교와 강연을 몇 번 들었을 뿐이다. 설교에 크게 감동하거나 강연에 매료되는 일도 없었다. 장공은 웅변술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는 어디서 長空을 배우고 감히 그분의 삶과 사상을 흉내 내려는 엄두를 냈을까?

내가 김재준 목사를 처음 만난 것은 1946년 겨울이었다고 기억된다. 서울역 맞은 편, 지금의 성남교회 자리에 한국신한대학의 전신인 조선신학원이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맏동서 김재한과 함께 김 목사님의 집을 찾아갔다. 김재한은 김재준 목사의 6촌 동생이었다. 신학원에 화재가 있었던 직후의 일이다. 김재한은 화재 소식을 듣고 문안차 찾아갔던 것이다. 내 나이 아직 스물 셋의 철부지였을 때다. 소개를 받고 촌놈답게 큰절을 하고 무릎을 꿇고 옆에 조용히 앉았다. 얼마 후에 밖에서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송창근 원장이 들어왔다. 나는 벌떡 일어나 그분에게도 절을 했다. 나를 김재한의 막내 동서라고 김재준 목사가 소개를 했다. 일제말기에 평양여자신학교를 졸업한 맏처형 조정교(趙貞嬌)는 송 목사님이 김천 황금정교회를 목회하실 때 전도사였다. 송 목사의 중매로 황금정교회에서 김재한과 결혼을 했다.

아래에 김재준 목사님이 자기의 가계에 대해 간접적으로 언급한 짧은 글을 삽입한다. 이 글은 김재한의 둘째 아들 김인용 목사가 독일로 유학갔다가 타계한지 2년 후인 1988년 2월에 그의 친구들이 펴낸 유고집에 기고한 서문이다. “재단의 번재물같이”라는 제목의 이 글은 아마 長空의 마지막 글일 것이다. 서문의 제목을 따서 『김인용 목사 유고집』에는 “제단의 번제물같이”라는 표제가 붙여졌다. 그 서문 일부를 옮겨본다.

“仁鏞은 金閼智 64代孫 敬順王36世孫, 金仁贊(開國一等功臣) 29世孫이다. 증조부님은 棟淑 씨고그분의 친형님 되시는 棟郁인데 나의 조부님이시고, 棟淑 씨는 나의 증조부님이신데 바로 옆에 분가해 사셨기 때문에 나는 큰댁에 가면 으레 아랫집 증조부님 댁에 들러 큰절하고 뒷 언덕에서 장난하며 하루 종일 즐겼던 것이다. 증조부님은 아들 세 형제를 두셨는데 枝炳, 時炳, 現炳이시고 現炳씨는 체구가 크고 잘 생긴 男性다운 분이었고, 경원 함향동 楊洲 黃大覯씨 따님과 결혼하여 在弘, 在信, 在翰의 세 아들을 두셨다. 귀낙동에서 살으셨기 때문에 집 호칭은 ‘귀낙집’이라 하였다 …
아오지 탄광이 발굴되면서 중세기 가족공동체는 무너졌다. 탄광 주인은 물론 일본 재벌이었는데, 땅 속을 다 파먹어서 우물물이 땅의 空洞 속에 빠져 흐르니 우물은 모두 말라버린다. 우리 가문은 두만강 건너 간도로, 훈춘 지방으로 이사하였다. 그리고 胡地땅에서 사라졌다. 공산 만주에서 어디로 落葉같이 흩어졌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런 중에서 타다 남은 부지깽이 같은 불 속에서 구출된 몇 사람이 있다. 하느님이 ‘남은 백성’(Remnant)을 ‘그루터기’로 하여 나라와 민족을 재건하는데 쓰시려는 섭리였다. ‘空’도 그 중에 하나라 하겠다. 在翰은 6ㆍ25때 서울서 억울하게 갔다. 단용과 인용은 지금도 서울에 사는데, 그것은 Exodus였다. 端宗 때에 端宗 편이었던 탓으로 해서, 당시 강원감사로 계시던 信寶씨께서 멀리 땅 끝이랄 수 있는 慶興에 자취를 감추어 우리 경흥 入北시조가 되셨다. 경흥 미나리 골에 石階境이 남아 있어 경흥 주거 자손 전원의 祭享을 받으신다.”

나는 맏동서 덕에 서울에서 신신학의 거두들을 한꺼번에 만난 셈이다. 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순교자와 옥중성도를 따르는 보수세력이 형성되어가고 있었고, 박형용과 박윤선이 초량교회의 한상동 목사의 비호아래 메이첸의 근본주의를 경남일대에 심고 있을 때였다. 중학교 시절부터 신앙과 이성의 문제로 고민에 빠지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신학 책과 철학 책을 읽으려고 애썼던 나로서는 근본주의자들이 그렇게도 매도하고 멸시하는 자유주의 신신학자를 만났던 것이 큰 사건이요 또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감히 신학적인 질문을 할 용기가 없었다. 또 그 자리에서의 대화는 신앙에 관한 것도 아니고 학문에 관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삶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부산에서 박윤선 박사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었고, 한상동 목사와 간혹 개인적으로 만나 대화를 나눈 일도 있었다. 그분들에게서 나는 목사라는 직업이 엄숙하기만 하고 신학이라는 학문이 비판과 회의의 여지를 주지 않는 요지부동의 신학자도 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나 자신을 그 세계에서 분리시켰었다. 그러나 나의 내면세계를 맴돌면서 나를 사로잡고 있는 문제는 神, 그리스도, 신앙, 이성, 과학, 이런 것들이었다. 나는 철학이 이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철학도가 될 것을 이미 마음속에 정해놓고 있었다.

그 무렵에 내가 김재준 목사를 만나고 송창근 박사와 김 목사 사이의 오가는 너무나 인간적이고 자유롭고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으면서도 내면에 깊은 신앙을 간직한 것 같은 대화를 엿들으면서 나는 목사와 신학자의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됐다. 그러나 그 두 분에게서 받은 강렬한 인상이 철학도가 되겠다는 나의 결심을 흔들지 않았다. 나는 이듬해, 신설된 국립부산대학에 들어가 철학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

서울에서 맏동서의 소개로 두 분을 만나기 전에 내게 신앙적으로 또 사상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지도를 해 주신 분은 강성갑 목사이다. 강 목사는 연희전문학교에서 최현배 선생에게서 국문학을 배웠고 일본 동지사 대학 신학부를 나온 후 일제 말기에 잠시 부산 초랑교회를 담임했었다. 해방이 되자 출옥한 한상동 목사가 초량교회로 돌아오고 강 목사는 김해군 진영교회로 청빙을 받았다. 강 목사를 청빙하는 데는 초량교회에서 진영교회로 교적을 옮긴 우리 집안이 한 몫을 했다. 신사참배 문제로 친일파로 낙인찍힌 지수왕 목사는 교회에서는 물러났으며 많은 일본인 토지와 가옥을 인수 관리하는 지방 유지가 됐다.

강 목사는 해방된 조국이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밭을 갈고 복음의 씨를 심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밭을 간다는 것은 민중을 교육한다는 말이다. 그는 덴마크의 그룬두비가 전개했던 농민교육운동을 진영을 중심으로 경남 일대에 확산시킬 생각이었다. 그는 유일수의 묘목을 농민들에게 보급했고, 흙벽돌을 만들어 농민들이 직접 학교를 짓는 자영의 교육방안을 제창하기도 했다. 진영에 있는 ‘한얼중고등학교’는 강 목사가 동지들과 함께 흙벽돌을 빚어 세웠던 많은 농민을 위한 학교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흔적이다.

강성갑 목사는 한얼학교를 세우는 전념하기 위해 교회를 사임하게 된다. 또 해방 후 처음 있었던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정치적 개혁 없이는 사회개혁이 불가능하다는 소신으로 진보당의 후보를 위해 선거유세를 하게 된다. 이때부터 강 목사는 사회주의자로 낙인찍히게 됐다. 드디어 6ㆍ25가 터지자 진영의 경찰지서장은 빨갱이를 소통한답시고 강 목사를 강변으로 끌고 가 총살했다. 후에 이 지서장은 양민학살 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됐다.

6ㆍ25의 비극 속에서 너무나 아까운 사람들이 무지하고 무도한 반공 친일세력들에 의해 억울하게 살해당한 일이 속출했었다. 그리고 강성갑 목사의 죽음은 기독교 사회운동의 맥을 끊는 중대한 역사적 손실이었다. 강 목사는 내가 아는 목사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기독교 사회운동가였다. 그는 실로 이론과 실천이 하나가 된 사람이었다. 6ㆍ25 얼마 전 나는 봄방학을 맞아 진영으로 내려갔다. 강 목사는 흙벽돌로 지은 학교건물과 합숙소를 보여주었다. 방학 때면 서울서 연희대학과 한국신학대학의 학생들이 내려와 보충교사로 가르치기도 하고 학교 짓는 일을 돕기도 했다. 가족이 딸린 전임 교사들도 식사만은 모두 함께 한다는 것이다. 즉 한국식 키브츠가 형성되어가고 있었다. 과학적 사회주의자들이 낭만적 사회주의라고 비꼬는 공동체생활이 실천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살해된 후 조향록 목사가 한얼학교 교장으로 부임하고 그때 이규호 한신동문이 교사로 있었다는 사실은 한국신학대학과 강성갑 목사의 밀접한 관계를 말해준다. 강성갑 목사는 자기의 생각과 계획과 일을 서울에 있는 선배와 동지들에게 소상히 보고하고 지원을 받았다. 우선은 당시 문교부 편수국에서 교과서 편수작업을 지도하고 계셨던 최현배 선생의 동의와 지원을 받았고, 다음으로 연희대학의 백낙준 박사, 그리고 한국신학대학의 송창근, 김재준 두 신학자의 격려와 성원을 받았던 것이다.

강 목사가 서울을 다녀올 때면 꼭 부산에 있는 제집에 들러 이 분들을 만난 일들을 자랑스럽게 얘기했었다. 나는 아득히 높은 곳에 계시는 그분들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 흥분했고 그 중에 송창근, 김재준 두 분은 나도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이 대단한 비밀처럼 여겨졌었다. 그러나 진영에 있는 내 몫의 재산을 한얼학교재단에 기증하는 일은 부친의 반대로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6ㆍ25는 나를 동경에 있는 UN군사령부로 옮겨 놓았고 강 목사는 순교자가 되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채 시작하기도 전에 하늘나라로 옮겨졌다.

[3]

내가 김재준 목사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그로부터 10여년 후의 일이다. 해방 후 신사참배 문제로 장로교는 먼저 고려신학교파가 분립했다. 우리 집안은 당연히 고려파에 속했다. 그러나 평양에서 최덕지ㆍ김창인 등이 월남하자 다시 재건파를 형성했다. 우리는 다시 재건파 교인이 됐다. 한참 지적인 탐구에 몰두할 나이에 해방 후의 사회적 혼란과 교회분열의 와중에 휘말려 아무런 주체적 결단 없이 가족과 함께 교파를 옮겨야 했던 나는 6ㆍ25 전쟁이 발발한 직후 가족을 떠나 단신 일본 동경으로 갔다. 교회 분열에 진저리가 난 나는 한동안 교회의 굴레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만끽했다.

그러나 나는 교회를 떠나 살 수 없는 인간으로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무교회주의자들의 집회와 적암영(赤岩榮)의 교회 등 여기저기를 방황하다가 재일 대한기독교 동경교회에 정착을 하고 1955년 동경신학대학 학부 4년에 편입을 했다. 58년 봄에 석사과정을 수료했으나 논문이 완성되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58년에 東京에서 기독교 교육 세계대회라는 에큐메니칼 국제회의가 개최됐다. 거기에서 나는 처음으로 기독교장로회라는 교단에 속한 김재준 목사의 제자 두 분을 만났다. 강원용 목사와 김관석 목사, 이 두 분을 만난 것이 내가 ‘기장인’이 된 직접적 계시가 됐고 김재준 목사와의 인간 관계가 형성되는 첩경이었다.

마포 공덕교회 부목사로 최윤관 목사를 보필하고 있을 때 나는 가끔 김재준 학장실에 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김 목사님을 좀더 쉽게, 좀더 가까이 모실 수 있었던 것은 학장직을 그만두신 후부터이다. 65년 나는 초동교회 부 목사로 있으면서 홍동근, 지명관 등과 함께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개신교 지도자들의 성명을 준비하고 대대적인 서명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때 맨 먼저 찾아가 의논 한 분이 김재준 목사였다. 김 목사님도 자신이 이 일에 앞장설 뿐만 아니라 백낙준, 한경직 등도 설득해 보겠다고 약속하셨다.

이후로 나는 교회의 사회참여 문제에 관해 장공의 뜻을 받드는데 주저하는 일이 없었다. 67년 박정희 정권이 삼선개헌을 추진하려고 여론을 부추기고 있을 때였다. 그때 나는 「기독교사상」의 주간으로 있었다. 많은 지식인들이 이 문제에 대해 감히 입을 열려고 하지 않을 때였다.

하루는 장공이 내 사무실로 찾아왔다. 김 목사님이 직접 사무실로 찾아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기에 나는 약간 당황했다. 장공은 “박정희가 아무래도 삼선개헌을 해서 영구집권을 도모하는 것 같다. 지금 이를 저지하지 않으면 우리는 얼마나 오래 군부 독재하에서 살아야 할지 모른다”고 하시면서 나더러 잡지를 통해 개헌 반대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푸념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오랫동안 제자를 길렀는데 막상 이런 위기상황에 처해서는 자기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없더라는 것이었다. 나는 묵묵히 듣기만 하다가 어딘가 약간의 비애가 감도는 장공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네 잘 알겠습니다. 힘 자라는 데로 해보겠습니다”고 대답하는 내 말을 듣고 장공은 입가에 그분 특유의 잔잔한 미소를 지으시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나는 다음 달의 「기독교사상」을 “개헌론”이라는 특집으로 꾸몄고, YMCA시민논단에서 김동리 씨와 맞서서 개헌반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로써 나는 장공이 국내에 계시는 동안 그 분의 하수인 노릇을 했다. ‘민주수호국민회의’를 결성할 때는 기독교방송의 방송담당 상무로서 기자들을 끌고가 이 행사에 적극 참여했다. 장공이 「제3일」이라는 잡지를 낼 때도 그 일에 참여했다. 그리고 장공이 캐나다로 떠난 후에는 그야말로 그분의 공백을 메우느라고 허둥지둥 반독재투쟁에 나섰는지 모른다.

장공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가족들에게 “박형규 목사가 내 참 제자다”라는 말씀을 남겼다고 들었다. 그리고 내게는 ‘수주’(水洲)라는 아호를 주셨다. 장공이 돌아가신 후부터 정말 장공의 제자가 되어 볼 양으로 그분의 좌우명 십 조를 수첩에 적어 실천해 보려고 애쓰고 있다. 어림도 없는 일을 해보겠다고 나선 내가 가소롭다.


억지 제자의 변*


* 이 글은 장공 김재준 목사 14주기 추모예배 ‘추모사’로서 “장공의 座右銘”이 처음으로 소개되어 있다.

“자고로 참 스승을 찾는 제자는 인간이 만든 선입견과 장벽을 넘나드는 법이고, 또 제자가 될 만한 후학을 만난 스승은 억지로라도 그를 자기의 길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스스로 장공이 억지로 만든, 많이 모자란 제자임을 자랑으로 또 행복으로 알고 있습니다.”

올해 2001년은 장공 김재준 목사님의 탄신(誕辰) 100주년이 되는 해로 기념사업회와 한국신학대학원에서는 목사님의 탄신일을 기해 뜻있는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중요한 해에 서거(逝去) 14주기를 맞아 추모예배를 드리면서 제가 추모의 말씀을 올린다는 것이 제게는 한없는 영광이지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실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장공의 업적 중 으뜸은 그가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으로 그의 제자로 인정받을 만한 인연이 없었습니다. 8ㆍ15 해방 직후 저의 맏동서 김재한이 장공의 친척이라 그를 따라가서 어른에게 인사를 드리는 정도의 지면(知面)이 있었을 뿐 저는 장공을 스승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 후에 저도 책을 통해 장공을 알고 그의 가르침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넓은 의미로 제자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저는 1987년 1월 27일 오후 8시 51분, 장공께서 운명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제부터 나는 장공의 제자로서 살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31일 장례를 끝마치고 돌아와 아직도 장공의 향기가 감돌고 있는 거실에서 유품을 정리하던 중 자그마한 액자에 붓으로 적은 “나의 좌우명”(座右銘)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그것을 내 수첩에 적어 넣고 그 순간부터 그의 좌우명을 나의 좌우명으로 삼았습니다. 그 내용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나의 좌우명 : 바로 살려는 노력

1)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2) 대인관계에서 의리와 약속을 지킨다.
3) 최저 생활비 이외에는 소유하지 않는다.
4) 버린 물건 버려진 인간에게서 쓸모를 찾는다.
5) 그리스도의 교훈을 기준을 ‘예’와 ‘아니오’를 똑똑하게 말한다. 그 다음에 생기는 일은 하나님께 맡긴다.
6) 평생 학도로 산다.
7) 시작한 일은 좀처럼 중단하지 않는다.
8) 사건 처리에는 반드시 건설적, 민주적 질서를 밟는다.
9) 산하(山下)와 모든 생명을 존중하여 다룬다.
10) 모든 피조물을 사랑으로 배려한다.
(젊은 시절부터 나는 이 열 가지를 정하여 바로 살려고 노력하였다.)

그때 87년도 수첩 끝장에 적어 넣은 이 좌우명을 해마다 연초에 새 수첩의 맨 앞장에 옮겨 적는 것으로 저는 한 해를 시작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설날이면 자녀손들의 세배를 받고 선물로 주는 요긴한 말씀들 중 하나로 이 좌우명을 적어 주면서 장공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꼭 이대로가 아니라도 각자가 좌우명을 가지도록 하라고 권했습니다.

저는 장공의 강의를 들은 적이 없고, 설교는 몇 번 들었으나 제가 서울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할 때 “목사는 강단에서 죽어야 한다”는 설교 말씀을 빼고는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제가 장공을 인간적으로 가까이 하고 좀더 깊이 그를 이해하게 된 것은 그분이 신학대학 학장직에서 물러나신 직후부터입니다. 저는 그때 기장 여신도회 전국연합회가 설립한 베다니학원에서 “평신도지도자훈련”에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공은 평신도 훈련 프로그램에 단골 강사님이셨습니다. 아마 66년이나 67년(?) 겨울일 겁니다. 방학을 기해 수유리 한신 기숙사를 빌려 졸업을 앞둔 남녀 대학생 평신도를 훈련하는 합숙 프로그램에 장공께서 하루를 완전히 학생들과 함께 지내는 강사로 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인간 김재준의 진면목을 보았고 스승으로서의 장공의 후덕에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내가 진정 스승으로 모실 분이 바로 이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심전심, 장공도 저를 제자처럼 대해 주셨고 무슨 일을 하실 때는 저를 불러 의논도 하시고 지시도 하셨습니다. 「제3일」이라는 잡지를 시작하실 때도 그랬고 “민주회복 국민운동”을 전개하실 때도 기독교방송 상무인 저에게 기자들을 대동하고 회의에 참석하라고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그러니 당시의 정권은 저를 장공의 하수인으로 지목하고 제거대상 인물로 분류했겠죠. 사실 박정희의 삼선개헌론이 머리를 들기 시작한 무렵 저는 이미 장공의 하수인으로 찍혀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기독교사상」 주간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예고 없이 사무실로 찾아오신 장공은 침울한 표정으로 할 얘기가 있다며 다방으로 내려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자리에 앉자마자 “「기독교사상」이 뭐하는 잡지냐? 군부독재정권이 삼선개헌을 하고 영구집권을 획책하고 있어! 다른 언론은 겁나서 말 못해도 「기독교사상」은 ‘아니오’라고 소리쳐야지!” 호통을 치시고는 찻잔에 손도 대지 않으시고 일어나 가버리셨습니다.

저는 벼락을 맞고 정신나간 사람처럼 한참 앉아 차를 마시면서 장공의 뜻을 받드는 방책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선 「기독교사상」을 “개헌론” 특집으로 꾸미는 것을 편집위원회에서 결정하고 당시 대한기독교서회 총무였던 조선출 목사의 양해를 얻어냈습니다. 또 서울 YMCA 「시민논단」에서 “개헌찬반토론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찬성쪽으로 김동리(金東里) 선생을 초청하는 한편 반대론을 맡을 사람이 없어 제가 맡기로 일을 진행시켰습니다. 그 시절 KBS 흑백 TV가 방영된 지 얼마 안 된 때라 처음으로 “개헌론” 공개토론이 녹화방송된다고 사람들이 많은 기대를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몇 초 동안 방영된 것은 찬성발언을 하는 김동리 선생의 모습뿐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장공의 신복(信服) 제자로 사람들 눈에 비치게 되고, 고향이 함경도 어디쯤이냐, 한신은 언제 졸업했느냐 묻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특히 저를 조사하는 수사관들 중에는 어째서 경상도 태생의 고신파 출신 목사가 자유주의 반체제의 온상인 한신(韓神)과 김재준의 추종자가 될 수 있었나 의아해 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고로 참 스승을 찾는 제자는 인간이 만든 선입견과 장벽을 넘나드는 법이고, 또 제자가 될 만한 후학을 만난 스승은 억지로라도 그를 자기의 길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스스로 장공이 억지로 만든, 많이 모자란 제자임을 자랑으로 또 행복으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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