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4일 화요일

장공론 / 김문환

장공론


김문환(서울대교수)

장공 김재준 목사 2주기 추모예배가 열린다는 기사가 신문에 보도되었다. 그분을 소개하는 간단한 글도 함께 싣고 있었다.

“고 김재준 목사는 한국신학대학 교수 및 학장을 지냈으며,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 국제 엠네스티 한국위원회 위원장, 삼선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김 목사는 1974년에 캐나다로 이주했으나 1983년 귀국, 생애의 마지막을 고국에서 보냈다.”

이렇게 짧은 기사를 읽고 무심하게 지나칠 사람들이 더 많겠으나, 필자의 뇌리에는 재작년 여름에 있었던 어느 작은 모임이 떠 올랐다. 바로 김재준 목사의 영향 아래 시작되어 지금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선린회’라는 단체의 하기 대회이다. 그 모임의 기록을 다시 꺼내 보니 거기에는 위에 간단히 적힌 약력보다는 좀더 길게 그의 의미를 되새겨 보려는 노력이 읽혀진다. 예컨대, “살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 장공의 숨겨진 이야기를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으로 자부하는 강원용 목사는 장공께서 돌아가시기 직전 11월, 그가 입원 중인 한양대 부속병원으로 문병하러 간 길에 이렇게 여쭈어 보았다고 술회한다.

“목사님!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실 텐데 그럴 경우 제자 된 도리로서 목사님의 이미지를 어디에다 초점을 두고 부각시킬까요?”

요컨대 선생에게 수식어처럼 따라다니던 신학자, 교육자, 종교개혁자, 문필가, 서예가, 사회운동가 중에서 어떤 것이 좋을 것인가를 여쭈어 본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랬더니 선생은 웃으시면서 “그 어느 것도 내게 맞는 건 없어”라고 말씀하시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제발 당신을 정치가로 부각시키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다고 전언한다.

그러나 강원용 목사를 비롯해서 그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은 장공 선생이 생애의 끝날까지 학문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개조해 간 한편, 자유를 가로막는 온갖 불의와 부정에 몸으로 저항하는 삶을 살아가셨던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 중 박영배 복사는 장공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구분해 보았다. 즉 1단계는 출생에서 기독교인이 되기까지, 2단계는 신학 순례기(1920-1932), 3단계는 유학에서 돌아온 후 자기 길 모색, 4단계는 신학 교육 치중기(1939-1961), 5단계는 현실 참여기(1961-임종)로 크게 다섯 단계의 구분이다.

이 모든 단계들에서 장공 선생이 구체적으로 어떤 생활을 살다 가셨는가를 여기에 옮겨 놓기란 불가능하다. 박영배 목사는 그가 살다 간 삶의 모습을 선생의 자서전 제목을 따라 “순례자의 길”이라고 그려 본다. 청빈, 순결, 복종으로 대변되는 중세 수도원적 자기 포기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다 간 삶이라는 뜻이다.

정치학을 전공한 이화수 교수도 그를 원칙의 사람, 예언자적 실천가로 부를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뜻은 장공의 행적이나 남긴 문서를 토대로 살필 때 그가 자유 민주주의의 신봉자요, 평등ㆍ평화 사상의 수호자요, 민권수호 투쟁가였다는 것이다. 그가 견지한 평화는 싸움을 안 하는 의미에서의 소극적 평화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짓밟는 건 악의 세력이라고 간주하고, 이와 맞서는 건 자유 민주주의의 옹호를 위해 필수적이라는 적극적 의미에서의 평화라고 부연 설명이 뒤따른다.

그런가 하면 당시 청주 감옥에 있던 문익환 목사는 장공을 큰 스승으로 부르며 이렇게 추모한다.

“스승이시여 / 우리의 큰 스승이시여 / 죽어서 사는 길을 몸으로 가르쳐 주신 스승이시여 / 우리를 죽음을 사는 길로 몰아 넣으시고 그 길을 앞장서 가신 / 지독한 스승이시여.”

문익환 목사의 추모시는 장공의 생애를 나름대로 정리하면서 그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 중 한 구절을 뽑아 보면 다음과 같다.

“당신은 그 고요한 침묵과 웅얼거림으로 / 역사의 새 장을 여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역사의 실체가 되셨습니다 / 위선과 독선으로 독기를 뿜는 / 살인과 전쟁으로 피비린내 나는 / 오만불손한 기독교의 역사를 당신은 툭 꺾어 / 민족사 속으로 겸손하게 끌어들이는 / 만용을 부리신 겝니다 / 드디어 두 역사는 소리치며 하나로 / 어울려 도도히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 마침내는 분단의 찌꺼기를 깡그리 쓸어 내고 통일의 대해(大海)에 이른 것입니다.”

위대한 예술 작품이란 여러 사람이 제각기 그로부터 자신에게 절실한 감흥과 의미를 발견해 낼 수 있는 그런 작품이라고 말한다면, 위대한 인간 역시 그러하리라 생각된다. 장공 선생은 그런 의미에서도 분명 위대한 인격이다.

필자 역시 그분에 대해 나름대로의 감회를 가지고 있다. 그 짜증스럽던 시절에 사회 명사들에게 시국을 설명한다고 해서 별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오시던 날, 그 분은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그 왜 최은희라는 여배우 있지? 야, 이쁘더라!”

혹시 결례가 될지 모르나, 필자는 그때 그분의 눈가에 흐르던 잔잔한 미소를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분은 적어도 이 정도의 여유를 지니고 계셨다. 그러기에 필자가 독일 유학 시절 그분께서 정성스럽게 써서 보내주신 편지 한 장을 받아들고 그 여유있는 웃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글에서 장공은 자신의 근황을 이렇게 알려 주셨다.

“지금 팔십 고개를 넘었기에 모든 운동이나 단체의 전선에서는 은퇴했고, 호혹시 어디 회합에 나가도 침묵의 무게 구실이나 하는 것이고 하니 남은 날들은 서재에서 하늘로 통하는 길이나 찾아 올라갈까 합니다. 요새 동양 도가(道家)들의 사상과 당송명원(唐宋明元) 등 세기에 빛나는 중국 시인들의 시를 읽으면서 때때로 글도 쓰곤 합니다. 유유자적이랄까, 옹(翁)의 숨은 즐거움이외다.”

1981년 5월 11일자 서한의 한 구절이다. 그날 필자는 왜 그분이 자신의 호를 길 장(長), 빌 공(空)으로 쓰셨을까, 깨달은 듯싶어 이런 글을 초해 보았다. “긴 하늘에 한 줄기 빛이 흐르는 밤이면 – 장공론(1)”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훨씬 커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늘만큼 솟아
공연한 일로 죽이고 다툼질하다
이윽고 흙덩이로 스러져 가는
그 모습은 내려다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훨씬 알차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늘만큼 참아
억울한 일로 꿇리고 당근질받다
이윽고 씨알로 영글어 가는
그 보람을 맺고 싶었는지 모른다.

훨씬 너르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늘만큼 비워
어둠에 묻혀 씨알들이 이윽고 눈을 떠
끝간 데 없이 퍼져 나갈
그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제법 깊은 여울 앞에서 망설이는 아낙네를 등에 업어 건네다 주고 인사도 듣는 둥 마는 둥 내쳐 걷는데
같이 가던 돌중이 아낙의 몸을 만졌다고 시미하면 “나는 벌써 잊었는데 자네는 아직도 그 아낙을 생각하는가” 대답하는 그런 허허로움으로
모든 잘난 것들을 허깨비로 만든
영원을 향한 기나긴 비움
유일한 하늘 빛의 창구

긴 하늘에 한줄기 빛이 흐르는 밤이면
빛나는 당송(唐宋)의 노래를 노장(老莊)과 읊으며
“하늘에 통하는 길을 찾아 올라가는”
키 작은 신선이 내 손을 잡는다.

이 구절에서 보이는 “유일한 하늘 빛의 창구”란 장공깨서 캐나다에 거주하시면서 속간하던 「제3일」이라는 잡지(통권 104호)에 쓰신 “예언자의 성격과 사명”이라는 글에서 그리스도를 그렇게 표현하셨던 것이 기억나서 적어 본 것인데, 이는 비단 그리스도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길을 은유하기도 한다. 장공 자신이 바로 그 구체화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인용해 본 것이다. 이 잡지는 그 해 9월 21일에 휴간한 채 다시는 뒤를 잇지 못했지만, 필자는 그분에 대한 생각이 날 때마다 변변치 못하지만 이 글을 편지와 함께 다시 들춰보곤 한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잠시 기운을 회복하신 사이에 그 어른께서는 손자뻘도 더 되는 필자를 형이라 부르시며 두 편의 휘호를 보내 주셨다. 하나는 (아마도 필자가 노래를 좋아하고 예술을 공부하는 까닭이라고 생각되는데) 시편에서 고르셨고, 다른 하나는 히브리 교회에 보낸 바울 사도의 서신 중 한 구절에서 고르셨다. 1986년 9월 중양(9일)으로 날짜를 기록하신 한문 휘횐데, 시국에 휩쓸려 갈 듯한 어린 제자의 모습이 안타까우셨던 것이 아닌가 하여 못내 송구스럽기만 하다. 그 족자를 대할 때마다 스승의 따뜻한 미소 중에 느껴지는 준엄함이 오늘 새삼스레 사무치게 그립다.(「열매」, 1989년 2월호)

후기 :

스승을 사모하는 심정으로 쓴 졸작 두 편을 마저 적어 본다.

그리며 산다
- 장공론(2)

어디를 둘러보나 산등성이 하늘을 만지는
고향을 그리며,
팔순이 넘어도 그 앞에선 영원히 어린애일 수밖에
없는 어머니를 그리며,
새벽을 불러올 단 하나의 샛별인 양 드높여 주던
누님들을 그리며,
낯선 동네 천한 머슴을 꿈꾸면서 야스나야 폴리야나
시골역 대합실에서 숨이 하늘에 닿은
톨스토이를 그리며,
한가닥 연기로 피어난
김영구들을, 아니
그들이 누리는 약속의 생명을 그리며 산다.

‘과격한 청년’과의 만남을, 신비를 진주처럼 감추지
못한 탓일까.
더 좋은 것이 제일 좋은 것으로 하여 원수되고
정든 불완전들이 완전으로 하여 떠나야 하는
아픔이 파도처럼 두개골을 부딪지만,
풀솜마냥 떠날다가 아무 데나 닿아
까마귀 물어다 주는 빵조각을 고마워하지만,
발톱 감추고 날개펴 하늘 떠돌며
숲속의 토끼를 노리는 독수리를 그리며 산다(1982. 2. 20).

* 여기에 그려진 대부분의 묘사는 장공 자신이 그의 『범용기』에서 구사한 것들이다. 속히 병상에서 일어서시기를 비는 마음으로 엮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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