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4일 화요일

국민주택 문밖의 모습 잊을 수 없어라 / 황성규

국민주택 문밖의 모습 잊을 수 없어라


황 성 규(한신대 명예교수)

언제 들었는지 그 시점은 불명하지만, 들은 내용이 분명한 이야기부터 쓴다. 그것은 작고한 은명기 목사님이 신학지망을 하고 입학면접 때의 장공 스토리다. 신학지망 동기에 대한 장공의 질문에 그는 ‘인생이 무엇인지’를 알려는 것이라 했다는 것이고, 목사 되는 것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는 요지의 대답을 올렸다. 장공은 그러면 신학교보다는 서울대의 종교학과에 가는 곳이 좋겠다는 제안을 하셨고, 그 신학지망자는 목사 되거나 안 되는 것은 신학공부를 하고 난 후에 결정할 수 있다고 대답을 했다 한다.

장공의 품은 그를 감싸안을 만큼 넓었다. 그의 판단도 옳았다. 은명기는 졸업이 한참 늦은 학생이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기말 시험지에 답을 쓰지 않은 경우들이 종종 있었는데 문제의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자기의 생각과 신념에 맞지 않으면 답 쓰기를 포기하여서다. 그렇게 고집 센 은명기의 됨 됨을 장공은 얼마나 속속들이 아셨는지 알 수 없으나, 목회자 은명기 님은 그의 생전에 장공을 따르고 존경하고 그의 신학적 사유를 실천적으로 살아낸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장공을 존경하였는지를 짐작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나는 그 은명기 목사님이 최초로 목회 하신 전주 서신교회에서 그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결국 신학의 순례를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장공을 처음 뵌 것은 1954년, 동자동 옛 교사시절이다. 6ㆍ25 동란, 1ㆍ4 후퇴 등의 언어가 함의하는 비극의 흔적이 현저했던 동자동에서다. 한국신학대학의 입학시험은 2차였고 나는 한신에서 신학 한다는 일념을 지키려는 순정(?)에서 대학의 1차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으니, 한신의 입학시험 날을 학수고대한 편이었다. 짧은 머리에 고교 교복에다 목이 긴 검은 군화로 무장하고 입성은 하였으나 모든 것이 낯설고 어설펐다. 명륜동에서 통학하는 것으로 첫 학기를 시작하였으나 장공의 강의는 새내기 몫으로는 배정이 안되었기에 채플에서 뵙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첫 만남의 사연은 ‘울면’으로 엉켜 있다. 시골에서 상경한 사람 치고 ‘터키탕’ 간판을 보고 음식을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많지 않던 시절이다. 나는 터키탕을 갈비탕 같은 음식으로 여길 정도로 음식점에서 매식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음식 종류인들 알 까닭이 없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중국집에 고향 선후배들이 모임인 듯한데 거기 장공이 자리를 함께 하셨다. 음식 주문을 받는데 장공이 ‘울면’이라 하니, 나 덩달아 처음 들어 보는 ‘울면’을 주문하였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먹을 수 없었고 그 상황을 적당하게 마무리하느라 혼났다. 그 후 나는 남 따라 음식을 청하지 않지만, 나의 장공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엉뚱하게도 울면 먹기 실패로 시작한다.

흔히 장공은 노트 보느라 아래보고 다음에 천장을 보는 스타일의 강의를 하신다고 회상하는데,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어른은 구약에서 기독교 윤리학 등 폭 넓게 신학을 커버하였는데, 우리 54학번이 기독교 윤리학을 수강할 때의 일이다. 장공께서 강의 중에 미국에서는 남녀가 교제하다 헤어지게 되면, 그 동안 주고받은 선물을 되돌려 주는 경향이라 하였을 때, 짓궂은 수강자 하나 ‘그 동안 키스 한 것은 어떻게 하나요?’ 했겠다. 장공은 검은 테 안경을 아래로 내려 까시더니, 그 학생을 조용히 내려보실 뿐 더 말씀을 잇지 않았다.

어느 강의 시간이었던가! 흔히 신학강의실 또 교회에서 수 백년 질의되곤 했던 질문이 장공에게 제기되었다. “그리스도의 복음 이전의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수강자들은 큰 기대로 장공의 설명을 기다렸다. 의외로 대답은 짧았으나 명확했다. “그게 학생의 관심이어야 하는가?” 아마도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에 관심해야 하지 않는가의 뜻인 듯 했다. 정확한지 모르나 어느 사람이 “하느님은 천지창조 이전에 무엇을 하셨는가?”는 질문을 받은 칼뱅이 “하나님은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을 위해서 지옥을 만들고 계셨다”고 전해지는데, 장공이 위와 같이 답변을 하신 것은 그 당시보다 신학에 철이 좀 들고서야 알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장공에게 죄송한 것이 있다. 명륜동 그리고 돈암동에서 통학하느라 기숙사생 보다는 시간이 좀 모자란 학창시절이라서 리포트를 잘 써내기란 쉽지 않았다. 아마 졸업 후의 목회전망에 관한 리포트였던 것 같다. 우리의 리포트는 원고지였다. 나는 졸업 후 이상적인 농촌 목회를 지향하는 내용으로 원고지를 메웠던 것 같은데, 장공의 평가가 예의 달필로 눈에 띄었다. 칭찬의 말씀과 함께 앞으로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고. 평점이 좋았다. 그런데 나는 선생의 바람대로 살지 못한 생이어서 왠지 죄송한 마음이었다.

사적으로 장공에게 감사할 것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신학교 1학년 봄 학기를 제외하면 계속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는데, 장공의 깊은 배려가 있어서였을 것이기에 감사할 일이나 무엇보다 준목고시와 관련된 일화에서 장공의 깊은 배려에 더 없이 감사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준목 학과시험이 통과된 후 면접시험이 성남교회 유치부실에서 있었다. 문동환 박사도 응시한 고시였으니 오래 전 일이다. 고시위원들이 소명감에 대하여 물으시는데, 질문의 정답을 나도 알았지만, 내 딴에는 진지하게 대답한 것이 화근이었다. 화근이란 나 때문에 다른 응시자에게도 소명감 질의가 심각해진 것이다.

후에 생각하면 내가 좀 어리석었다는 자책밖에 남지 않았지만, 당시로서는 그랬다. 고시위원 앞에서 묻지도 않은 질문을 스스로 만들고 대답한 것이었다. “6ㆍ25와 같은 동란이 일어나 공산당에게 잡혀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순교의 자리에 있게 된다고 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저는 순교할 자신이 없습니다. 다만 노력할 것이라는 것이 제 대답입니다.” 비슷한 말을 계속하였고 결과는 낙방이었다. 다음해 같은 자리에서 같은 질문 즉 ‘소명감’을 밝히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작년에 한 대답과 같습니다”고 하였으니 결과는 또 낙방이었다.

그런데 후에 들려온 것은 고시위원회에 참석하신 장공이 “내가 황군의 성격을 잘 아니 면접에 합격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장공의 조언으로 준목 면접이 통과된 까닭에 동일한 대답을 몇 년 계속하리라는 오기 찬 나의 속생각은 빛 바랬지만, 나의 성격을 파악하시고 제자의 처지를 돌보시는 스승의 배려와 깊은 관심을 깊은 감사로써 기억하는 기쁨이 있다. 스승은 불경하게 말해서 어물어물하시지만 사람들의 속까지를 보시고, 알아차리며, 어루만지시는 혜안과 따뜻함을 소유하신 것이다.

나도 스승의 모습 중에서 한 모습만이라도 닮아 보려고 노력한 게 있다. 국민주택에 사실 때(물론 학교를 떠나신 후다), 어쩌다 찾아뵙곤 하면 잔잔한 말씀으로 강의시간 이상의 배움을 주셨지만, 내가 닮아 보려는 모습은 제자를 배웅하는 일관된 모습이다. 방문 열고 작별인사 받으면 그만인 것을 굳이 그리고 꼭 대문밖에 까지 나오셔서 배웅하시는데, 그 낮음의 자리를 펴고서 잘 가라고 배웅하시는 그 모습 말이다. 내가 반포 아파트에 찾아 온 제자들을 아파트 문 열고 잘 가라고 하려다 후닥닥 속으로 놀라서 아래 현관까지 내려가 배웅하는 것은 스승의 모습이 떠올라서다. 적어도 그 모습이 내게는 인간관계 그리고 사제간의 원형 같기 때문이다.

국민주택이라면 쌍문동에 위치한 작은 집을 말한다. 유신시절의 정치는 철권정치였다. 긴급조치라는 괴상망측한 것이 법 노릇을 하고 요즘도 정치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김종필 씨가 총리노릇을 하던 시절일 것이다. 한신인들의 고향 수유리는 한국사회에서 일고 있는 유신반대 운동의 한 산실이었다. 해서 겹겹 쌓인 수난의 역사가 강제 제적당한 학생들의 가슴속에, 옥중의 사람들 삶에 새겨지던 시절, 우리 교수들이 전해들은 말은 신선한 것이었고 힘을 돋아 주는 것이었다. 한 나라의 총리가 장공 선생을 만나겠다는 전갈을 받았다는데 장공은 이를 거절하셨다는 것이다. 빼앗길 것이 전혀 없는 성빈(聖貧)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갈(一喝)을 장공이 하신 것이라 우리는 그렇게 믿었다. 기득권을 지키려면 본의 아니게 뜻을 굽힐 수도 있지만, 장공은 그러한 기득권도 없으셨다. 설령 있다 해도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하셨을 것을 쉽게 상정할 수 있는 삶을 살아 내신 것이다.

그 어른의 학문의 세계의 깊이와 넓이는 주지하는 바라, 언급자체가 실보다 허를 들어낼 것이기에 삼가겠지만, 지금의 신학자들이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은 그의 신학에는 폭넓은 동양사상이 인카네이트 되었다는 것이다. 동서양의 사상세계를 넘나들면서 장공의 신학은 형성되고 또 심화되었다고 하겠다. 게다가 그의 글의 유려함과 산 듯함, 설득력과 다독거림은 실로 빼어난 것이다. 그 어른의 글이 대학교재에 실린 것으로 기억되지만 장공이 하신 말씀을 후학들에게도 전한 것이 있다. 그것은 ‘신학하는 사람은 철학보다는 문학에 더 관심을 갖는 것이 좋다’는 말씀이다. 철학이 중요하지 않아서 하신 말씀은 아닐 것이다. 설교하는 목사에게 문학의 유용성을 절실하게 일깨워 주시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작은 체구에 비하면 그 어른의 삶의 궤도는 긴 하늘(長空)같았다. 목사. 신학자, 교육자의 울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사회적 이슈에 침묵하지 않았다. 함석헌 옹과 더불어 3선 개헌반대 범 국민회의 공동의장직 등을 수행하신 것이 그 일례다. 한국교회사에서 장공 외에 저명한 신학자가 사회지도자로서 그렇게 우뚝 선 전례가 있었던가? 이 땅의 민주화, 인권의 신장 그리고 정의구현을 신학적 이슈로 삼고 행동으로 글로 말씀으로 사셨으니, 달려 갈 길을 완주하신 것이리라. 설날에 세배하려고 백운대 기슭의 자택에 가곤 했지만 마지막 병사에 계신 어른을 찾아뵙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아 내 몫이 되었다. 마지막 병상에서도 이 땅의 민주화(정권교체)와 통일을 갈망하셨다고 전해 들으니 그 바람 갸륵하다 하리라.

이렇게 살아오신 원동력이 무엇일까? 그것은 김익두 목사가 인도하는 부흥사경회에서 있었던 원초적 입신 신앙체험으로 소급될 것이다. 저 부흥회에서 체험한 신앙적 감동 그리고 성서 읽기에 빨려들어 발견한 성서의 세계가 우리가 회상하는 장공의 신앙과 신학의 뿌리라 할 것인데, 누가 감히 장공의 신학과 신앙으로 목회가 안 된다고 한다는 것인가? 어떤 목회를 지향하기에 그런 망 말을 한다는 것인가? 그러한 목소리가 간간 들린다는 것이 장공에게 죄송할 따름이지만, 내가 덧붙일 말은 장공의 신학과 신앙과 삶을 제대로 알고 말했으면 하는 것일 뿐이다.

회상하건대 이렇게 크신 스승과 잠자리를 했다는 사실이 내게는 향수요 소중하다. 54학번의 졸업여행 목적지는 여주로 거기에는 신륵사와 세종대왕의 묘가 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협궤기차를 타고 어느 지점(수원?)까지 간 것 같다. 일년 선배 53학번은 경주로 여행을 했는데 함태영 학장(당시 부통령)의 전용 기차를 타고 갔다. 지나치는 역마다 역장 등이 도열해서 경례를 하는 것을 학생들은 즐기면서 전무후무한 졸업여행을 했던 것인데, 이에 비해서 우리의 여행은 초라했지만 당시는 그것이 정상이었다. 여하간 우리를 인솔하신 분이 장공이다. 지금도 신학생들의 수학여행은 다른 대학생의 것에 비하면 영세하지만 그 당시도 그랬다. 시골의 여관이 좋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스승을 따로 모실 생각을 하지 못해서였는지, 돈이 모자라서인지는 모르나, 우리가 장공을 독방에 모시지 않았지만 그것이 내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나만의 소중한 추억거리가 되었다. 배정된 방에 나 외에 몇 급우가 더 있었지만 나는 장공에 바짝 붙어 한 밤을 보낸 것이다. 별 것 아닌 것 같다고 할지 모르나 내게는 그 때 그 후에도 소중하니 어떠랴! 소중하다는 것은 그의 체온을 느끼며 그 한 밤 잠을 이루었으니, 나의 삶에서 그의 신학과 삶이 어떤 형태로든지 묻어나기를 바라는 희망의 씨앗을 얻은 때문이라고 할까!

정년을 맞아 은퇴한 지금의 내가 여전히 그 스승이 그립고 그의 가르침과 삶이 우리의 교단과 한국교계 및 사회에 여전히 활 활 타는 횃불처럼 밝혀지기를 바라는 것은 그 어른이야말로 긴 하늘을 종횡무진으로 살아가신 큰 스승이시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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