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7일 금요일

[0504] 변모설화의 신학적 고찰 - 1960년 3월 17일

《신학연구 6집》 (1960년 3월 17일)

변모설화의 신학적 고찰- 한국신학대학 개학 강연


이 변모설화가 사도들의 케리그마(Kerygma)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역대 교부들이 이 기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명한 해석과 설교를 많이 남겼다. 오리겐은 그의 마태복음 주해에서 장황할 정도의 논문을 남겼으며, 터툴리안, 제롬, 바질,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 안셀무스, 크리소스톰 등이 이 설화를 진지한 설교 과제로 다루었다. 본문은 마가복음 9장 2~8절, 누가복음 9장 28~36절, 마태복음 17장 1~8절에 수록된 것을 비교 연구할 것이지만, 마가복음의 것을 가장 본래적인 것으로 치부하여도 좋을 것이다.

이 설화의 해석에서 자유주의 시대에는 이것을 별로 중요하달 것 없는, 섞여 들어온 이야기의 하나로 치부하고 어느 정도 합리적인 설명을 시도하는 데 그쳤으며, 벨하우젠, 루아지, 불트만, 고겔 등은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가 아니라 부활 이후(Post-Resurrection) 신화로 생각하였다. 기독교 신비주의의 대변자라고 할 수 있는 이블린 언더힐 여사는 예수의 격심한 내적인 신비 경험이 그 외모의 변화를 일으켰고, 그것이 제자들에게까지 영향을 준 것이라고 설명했으며, 양식 비판에서는 초대교회의 신학적 전통에 관련된 신화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설화의 역사성을 부인할 결정적인 이유를 발견하지 못할 뿐 아니라 반드시 부활 이후 그리스도 설화에 관련시켜야 할 이유도 없다고 본다. 부활 후 그리스도 형은, 사람들이 얼른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엠마오 도상의 제자의 경우)과 은현 자재하여 시간과 장소에 제한되지 않으셨다는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지만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든지 의복이 눈부시게 광채를 발했다든지 하는 종류의 암시는 없다. 우리와 동일한 육체를 가진 시절의 예수로서는 그 설화가 너무 환상적이어서 부활 후의 영원한 육체와 관련시켜 생각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 설화의 역사성을 부인한다는 것은 과도한 합리주의다.

이 설화는 예수의 생애에 있어서 분수령 상의 구실을 하고 있다. 예수는 그의 출생 설화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였다……”는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공생애의 시작에서 세례 받으실 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아버지의 증언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전도생활의 절정에서 다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 아버지의 증언을 받았다. 전도생활의 시초에는 그 증언이 성부로부터 성자 자신에 대한 그것으로 되어 있고, 전도생활의 말기, 특히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에는 성부로부터 제자들에게 주어진 증언으로 되어 있다. 예수님 자신의 생활로 본다면 세례를 뒤에 놓고, 십자가를 앞에 보는 공생활의 정상이 곧 이 산상에서의 변모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설화의 중요성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것이 신학적으로 무엇을 시사하는가를 약술하려 한다.

본문 어구에서 보는 신학적 점광

본문에 기록된 ‘높은 산’이 과연 예루살렘의 시릴(Cyril of Jerusalem)이 창도한 바와 같이 ‘타볼 산’이었는지, 또는 헤르몬 산의 세 고봉 중의 어느 하나였는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타볼 산상에 산성이 있어서 그리 격세의 감을 주지 못한다고 한다. 이것이 헤르몬 산의 일봉이라면 그것은 여름에 눈 쌓일 정도는 아니지만 9,000척이나 되는 높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올라가는 데 6시간을 요할 것이다. 그러나 산상에서의 광경은 놀라운 것이어서 고요하고 초연한데다가 가이사랴 빌립보가 발아래 보이고, 바다에서 다메섹까지, 레바논에서 모압의 구릉까지, 요단 계곡에서 사해와 그 남쪽까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과 유다 광야까지 한눈에 다 들어오는 고장이다. 만일 여기서 ‘변화산’이었다면 올라가는 데 한나절 걸리고 변화의 경험은 밤에 된 일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누가복음에는 “제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하는 구절이 있다. 그리고 그 이튿날 산에서 내려왔을 것이다.

‘변형하사’는 다만 그 외모만이 아니라 그 깊은 데까지, 다시 말하면 신자가 그 인간성 자체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 같은 데(롬 12:2; 고후 3:18 등) 사용되었다.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 마가는 엘리야를 모세보다 먼저 썼다. 메시아의 선구자로 엘리야가 온다는 예언이 그런 순서를 가지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여기서 신학적으로 중요한 점은 엘리야나 모세가 그들 자신의 과거를 가지고 나타났다는 그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와 대화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 구속사의 줄거리가 암시되었다고 본다. 엘리야는 예언자를 대표했고, 모세는 율법을 대표한다는 것에 우리는 얼른 착안할 수 있다. 그리고 율법과 선지자는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없이는 완성될 수 없음을 말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들이 다만 구약 계시의 두 줄거리를 대표했다는 데 그 의미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세나 엘리야나 다 함께 그들 영역의 한계를 넘어서 메시아 시대와 직접 관련된 인물이었다는 데 시사점이 있다. 모세는 메시아의 전형으로서 백성의 순종을 요청한 사람이며(신 18:15; 행 3:22), 엘리야는 메시아 강림에 앞서 다시 와서 그 길을 닦을 사람으로 예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 자신이 직접 그리스도의 지상생활에 연결되어 있느니만치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속죄 성취로 말미암아 그들의 과거의 임무가 완결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양기됨을 또한 의미한다. 말하자면 ‘대정봉환’에 흡사하다. 결국 그들은 퇴거하고 그리스도만이 남아 계실 때, 소리 있어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에게’ 들으라.”고 한 장면에서 이런 암시를 발견한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장막 셋을 지어……자기도 무슨 말 하는지 알지 못함이라.” 베드로는 산상의 초막 셋으로 그들의 임재를 영구화하려 하였다. 그는 그때 “하나님의 장막이 인간에 있다.”는 말씀을 연상하고 그러한 것이었을 줄 안다. 그러나 그의 잘못은 분명하다. 그것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임재만이 임마누엘임을 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 구름은 메시아 시대의 영광의 표징이다. 메시아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것은 그가 감추었던 영광을 드러내고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을 말함이다.

“너희는 그에게 들으라.” : 산 위나 장막이나 고장의 고요함이나 그런 것들이 문제인 것이 아니다. 다만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에게 듣는 것만이 메시아 시대의 내림과 그에 참예하는 키포인트임을 의미한다.

이상은 마가복음 기사를 중심으로 읽어 온 것이다. 이제 마태복음에 있는 동일 기사를 이에 대조해 보면,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상대로 쓴 것이니만치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율법을 받을 때의 광경과 일맥상통함을 보이고 있다. 구름 가운데서 율법을 받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내려올 때 얼굴이 빛났다 등과 공통되는 내용이다.

누가복음에는 ‘높은 산’이 아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늘 왕래 하던 어느 산임을 말했으며, 그리고 기도하러 올라가셨다고 했고, 이 사건은 ‘기도하는 중’에 생긴 경험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엘리야와 모세가 예수님과 대화한 주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하여 말했다는 것이다. 별세란 말은 요한복음 16장 28절에 “내가 아버지께로 부터 와서 세상 안에 있다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간다.”고 하신 말씀과 상통한다. 그리고 누가는 변모란 단어도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얼굴과 의복이 눈부시게 빛났다.”고 한 것뿐이다. 누가는 이 사건을 예수님과 제자들의 내적 경험에서 이해하려 한 것이라고 사유된다.

이 설화의 종말론적 이해

이 설화는 누가 보더라도 종말신앙과의 관련에서 이해해야 할 것임을 즉각 느낄 것이다.

우선은 1) 부활의 예표로 본다. 이 사건은 십자가 이전이지만 그것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로 하여금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이해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러나 부비어(Boobyer)가 비판한 대로, 제자들은 부활이 있었을 때 이 사건 때문에 부활에 대한 이해를 더 쉽게 이해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부활의 예표가 아니었다는 말은 아니다.

2) 이것을 그리스도의 재림, 즉 임재(Parousia)적 영광의 예표라고 한다. 키텔(kittel)의 말과 같이 이것은 그의 종말론의 예견이었다. 부활도 영광이지만, 재림에서만 죽은 자와 산 자, 구약과 신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영광에 참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3) 이것은 메시아 시대가 이미 실현되었다는 표적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곧 메시아다.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에 있다. 오리라는 시대가 지금 여기에 왔다는 표적이다. “많은 선지자와 왕들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것이 복이 있도다.”(눅 10:23, 24) 하였다. 마가의 복음서는 ‘하나님 아들의 복음’이니만치 미래의 영광뿐 아니라, 지금 여기서의 그의 임재가 그대로 이런 영광임을 생각지 않았을 리 없을 것 이다.

우리는 이상에서 부활과 미래에 있으리라는 종말과 실현된 종말이 한 설화 안에 다 관련되어 있음을 본다. 이렇게 세 가지 이론이 각기 주장될 수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벌써 그것을 자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대하여 생각할 때 십자가까지의 그의 몸과 부활 후의 그의 몸을 구분한다. 그러나 그것이 분리된 딴 것은 아님을 말하고 있다.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영으로, 영원하신 성자로 보좌에 앉으신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 그가 성육신하셔서 인간이 되셨을 때의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일단 영과 육이 분리되어 육은 무덤에, 영은 음부에 내려가셨던 그리스도, 삼일 후에 다시 무덤의 육체와 연합하여 그 육체를 영의 몸으로 변화시켜 영화롭게 하신 부활의 그리스도, 그리고 그 몸으로 승천하시고 다시 나타나실 그리스도, 여기에는 구분은 있으면서도 분리시킬 수 없는 일련의 한 생명체로서의 진행이 보여 진다.

그러므로 깊음이 깊음에 서로 응한다는 것과 같이 처음에서 나중까지 서로 응하는 줄거리가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 설화에서 보여진 그리스도론

우리는 예수가 참하나님임과 동시에 참사람이라고 믿어 왔다. 그런 의미에서 삼위일체 신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반을 형성한다. 이 설화에 서의 예수의 영광은 그의 신성의 드러남이요, 그의 겸허(humility)는 그 감추임이라고 한다. 그의 병 고치는 이적 기사, 물위로 걸었다는 것, 말씀으로 물결을 잔잔케 했다는 것, 그리고 그의 변모, 부활, 승천, 재림 등이 다 그가 인간 이상의 신성을 가진 증거라고 말해 왔다.

그러나 내가 이 설화에서 흥미를 느낀 점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참인간 성, 그리고 결국은 그것이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어야 할 참인간성의 점광을 보았다는 그것이다.

우리가 예수의 인성을 말할 때 그것을 너무 우리의 그것과 일치시키는 버릇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하여 한때 논쟁이 격심했지만, 하여튼 인간을 동물과 구분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주어졌다는 그 점에 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상실 상태에 있으며, 그것이 그리스도 신앙에서 회복된다 할지라도 종말을 바라보며 소망 중에 생성되어 가는 그런 불완전한 것인 데 반하여,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 자체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죄 없는 인간성, 이지러짐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바르트도 이것을 말했다.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우리의 그것과 일치되어 있지 않다. 진실로 그것은 우리와 함께 나누는 인간성이기는 하지만 그의 경우에는 하나님과 직접 관계되어 있고, 우리의 경우에는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하나님과 관계하는 간접적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죄로 물들어 있지 않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서는 그것이 계시되어 있지만, 우리에게서는 가려져 있다.”(D. G., Ⅲ/2, 235)

그리스도의 인간성이 죄 없는 그것이라 할 때, 우리는 그것을 낙원에 갖다 대조하든지 종말에 갖다 대조하든지 간에, 그것은 지금의 우리의 그것과는 같으면서도 무척 다른 것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죄 없는 인간성인 경우, 인간과 하나님과의 교제가 막힐 리 없을 것이며, 죄 없는 인간에게 죽음의 선포가 있을 수 없다. 다만 창조주와 피조자라는 것만이 구별된다. 그리스도는 창조주시면서 피조자로 되셨다는 데서 우리와 같이 되신 것뿐이다. 그리스도 자신으로 볼 때, 그는 인간성을 가졌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죽어야 한다는 경우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죽은 것은 오직 속량을 위하여, 우리 죄인과 죄인의 받을 결과를 대신한 온전히 자의적인 희생 행위였다. 죄 없는 인간성인 경우 자연이 그에게 순종한다는 것은 창세기 1장의 창조설화에서나 로마서 8장의 종말적 속량 완성의 전망에서나 당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적으로 예수의 ‘신성’을 입증하려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그것은 죄 없는 인간성인 경우에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죄에 물들지 않은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조’한다. ‘성자의 후광’이란 것도 그럴 법한 이야기다. 변화산상에서의 예수와 변모—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인 온전한 인간성을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도 가능하다. 그는 재세시, 시종 죄인의 친구, 죄인과의 일치를 염원하시는 의미에서 그 당연한 영광을 감추시고 십자가의 치욕에까지 복종하신 것이었다.(빌 2:6~11)

그리고 죄 없는 인간성이란 의미에서 죽음과의 인연이 끊어진 경우, 번식하는 인간들의 현세에서의 개인적인 종말을 이런 육체의 영화로 해결 할 수 있을 것을 우리는 또한 여기서 엿볼 수 있다. 바울이 말한 ‘영체 (Spiritual Body)’가 범죄한 인간의 종말적인 구원에서 이루어질 인간성의 완성이라면, 그것이 범죄 이전의 인간성과 상통할 것이며, 그리스도의 부활체는 그 처음 익은 열매라 하겠다.

예수가 죽음에 매여 있을 분이 아니라는 것은 그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가 죄 없으신 참인간이기 때문이라는 말도 동시에 성립될 것이다. 변모설화도 이 줄거리에서 볼 때, 이것이 어떤 교훈을 위한 방편이었다든지, 메시아 사업의 한 표지였다든지로 해석하는 것보다도 그리스도의 존재하심(Being) 그대로의 본 모습을 잠깐 보여주신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하나님-사람’으로서의 인격의 심연의 뚜껑을 잠시 들어 보여주신 것이라 하겠다. 엘리야와 모세의 출현 설화도 그리스도의 경우에서 유추하여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죄 없는 인간성일 경우와 변모 설화를 관련시켜 웨스트콧(Westcott)은 그의 저서 『The Historical Faith』(256)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변모는 지상 생명의 가능한 영성(potential spirituality)이 그 최고의 외적 양식으로 계시된 것이다. 이런 사건, 부활의 교훈과는 유사하면서도 구별된 이 사건은 종래에 받아오던 것보다도 더 많은 종교적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인자로서의 주님은 인간성의 가능한 분량을 보여주셨으며 그와 연합한 자들이 도달할 지점을 가리킨 것이다…….”

1931년 《Theology》 4월호에서 E. L. Wascall은 자연계에서의 인간생명의 완성 단계가 이런 것이라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Incarnation and the Philosophy of Organism”)

이 설화와 Organism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도들은 이 설화를 케리그마의 주제로 삼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의 본질의 종합한 초점에서 빛나는 진리의 불꽃임을 우리는 볼 수 있다.

1) 구약과 신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됨과 동시에 구약은 더 큰 경륜에서, 독립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한 증언자로 봉사한다는 것을 나타냈다.

2) 세상 떠난 자와 그리스도 안에서 한 교제에 들어감을 보여주었다. 세상 떠난 자도 그리스도와의 대화에서, 산 자도 그리스도와의 대화에서 서로 만나는 것을 볼 수 있다.

3) 수난과 영광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되어 있음을 본다. 고난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으로 화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 관계에서의 고난이 그대로 영광임을 보여준다.

4) 육신과 영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율배반의 괴리를 극복하고 결국에는 영의 질서로 화함을 보여준다. 죄가 없어졌을 때, 육신은 더 높고 더 자유하는 영의 질서에 섭취 변화하여 영광을 나타낸다.

5) 이 모든 것은 참하나님임과 동시에 참사람인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 이며, 그와의 연락, 그 안에 거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변모’의 사건은 복음의 종합적인 표징임과 동시에 그리스도교 신학의 집결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설화와 그리스도교 윤리

우리는 토인비(Arnold Toynbee)가 역사의 위기, 문명의 붕괴에 직면한 인간들의 대책 경향을 네 가지로 분류한 것을 하나의 상식같이 말하고 있다.

그것은 1) Archaism(회고주의) : 과거의 황금시대로 돌아가자는 운동, 2) Futurism(미래주의) : 미래의 유토피아를 지향하며, 현재나 과거를 무시하고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그 유일한 의미인 미래만을 위해 매진하자는 운동, 3) Detachment(도피주의) :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냉소에 붙이 고 스스로 초연하려는 태도. 4) Transfiguration(변질주의) : 현재에 참여하 여 그것을 더 넓고 높은 콘텍스트(Context)로 만드는 운동이라 했다. 리처드 니버(Richard Niebuhr)가 그의 저서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주장한 것 같이 이 네 번째의 태도가 올바른 그리스도교 윤리의 태도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변모에서 또한 현재 크리스찬 윤리의 표징을 본다.

오늘부터 긴 방학이 끝나고 이 산 위 숲속 임마누엘 동산이 개강한다. 여러 학생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기로 작정한 엄숙한 서약을 과거에 두고 실전의 마당인 선교와 목회의 전선을 미래에 보면서 이 산상에 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며, 여기 있는 것이 장차 올 예루살렘, 골고다, 무덤, 부활, 그리고 오순절 등에서 낙오되지 않으려는 준엄한 결단적 생활의 계속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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