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6일 화요일

[범용기 제6권] (1612) 한국 크리스찬의 Nation-Building

[범용기 제6권] (1612) 한국 크리스찬의 Nation-Building- 성명의 글 -

[1] 정치체제

(1) 우리는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임을 선언합니다. 이조말의 개화운동, 일제시대의 독립운동, 8ㆍ15 해방 후의 건국이념, 모두가 민주국가를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요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독재를 시도했었으나 4ㆍ19 혁명으로 제거 되었고, 5ㆍ16군사독재의 정부수반이 정보부와 정치보위부와 행정부를 한 손에 걸머쥐고 전능자같이 행동하는 속에서도 민주운동은 그 봉화를 높이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이북은 공산독재, 이남은 일인독재로 지속하는 것은 그만큼 한국역사에 역행하는 것이며 민족의사를 유린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일인독재란 것은 한 사람의 ‘인간악’에 3권이 독점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악성’의 만능을 허용하는 것이 됩니다. 가장 위험한 불장난입니다. “인간악”의 횡포를 권력분산으로 막고 “인간선”을 다수결로 선용하려는 것이 민주주의니 만큼 민주주의는 절대선일 수는 없다 하더라도 가능한 최선은 될 것이라 믿습니다.

이런 각도에서 민주주의는 사회나 국가의 ‘체제’기 전에 인간성 본연의 형태에 직결됩니다. 개인으로서의 자유사고, 자유비판, 자유결단, 자유행동이 법적으로 보장되지 못한 상태에서는 인간이 ‘인간’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회 생활에서 그 구성원의 정의감과, 법질서에 의한 Consensus 없이는 바른 사회생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자유와 사회정의가 동시에 기대될 수 있는 자유민주 체제가 현재로서는 가능한 최선이란 말입니다.

자유 민주주의는 인간을 비인간화하지 않으면서 바르게 잘 살 수 있는 인간화 운동이라 하겠습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하느님이 우리 민족에게 값없이 주신 은혜요 선물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 되게 하기 위한 ‘자유’의 허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은혜’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 가장 고귀한 유산으로 간직하며 발전시켜야할 의무를 하느님 앞에서 지는 엄숙한 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첫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이 해방의 권리를 자신의 독재 권리로 변질시켰습니다. 자기의 영구집권이 불가능하게 될 것을 눈치채자 부정선거를 추진시켰습니다. 이 부정선거를 공정선거로 시정함으로서 민주한국을 살려보려 한 것이 4ㆍ19 학생 혁명이었습니다.

4ㆍ19 혁명이 어느 정도 성공해서 자유 민주주의가 한국역사에 착근하려할 무렵에 박정희를 수반으로 한 군사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불효기습’ 작전으로 정부를 점령하고 폭력으로 이 ‘소년민주주의’를 살해했습니다. 국민에게서 주권을 훔쳐 군인 한 사람의 주권으로 변질시켰습니다.

국민은 그의 ‘전리품’이 되고 독재자 자신이 ‘나라’가 되고 ‘법’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국민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신성한 주권을 되찾으려고 열중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인 한 그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독재정치란 인간의 비인간화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2) 남북통일 :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에 늘상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 왔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5천년의 단일민족 국가를 보존해 왔다는 것과 독특한 민족문화를 창조해 왔다는 그 자체가 불멸의 정신적 유산이라 하겠습니다. 현재와 같은 남북분단이 장기화되면 한국민족은 완전 소멸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우국지사도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나는 그렇게까지 걱정하지는 않습니다. 옛날 ‘삼국시대’의 심각한 분열왕국도 신라와 고려와 이조의 통일에서 무난하게 한 나라로 뭉쳤습니다. 일제 36년의 물샐 틈 없는 소위 동화정책도 결국에는 우리 민족 피부에 묻은 ‘때’ 정도의 영향밖에 끼친 것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1945년 8ㆍ15 해방의 날에 역력히 드러났습니다. 목욕할 기회만 있으면 “때”는 쉽게 지는 것입니다. 지금도 불행하게 남북이 분단돼 있습니다. 이것은 2차대전 후에 등장한 강대국 두 진영이 우리 나라 38도선에서 맞부딪쳤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한국민족 자체는 꿈에도 상상 못할 ‘억지춘향’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것 역시 한반도의 지정학적 슬픈 유산의 한토막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상과 이념과 제도와 심지어는 ‘나라’까지 달리했다 셈 치더라도 그것 때문에 동일 민족으로서의 전통의식이 말살되기에는 우리 역사가 너무 끈덕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통일과 독립은 같은 범주에 소합니다. 우리는 분단 이전의 ‘우리 나라’를 조국의 본 모습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같은 혈관 속에 맥박치는 같은 피의 부르짖음이 한 몸을 들고 있습니다. 다만 병들고 상하고 마비된 부분이 아프고 부자유하다는 것 뿐입니다. 이 뜨거운 ‘민족사랑’이 분단을 극복할 ‘활력’입니다.

우리는 통일을 위하여 무력침략을 강행하거나 외국세력에 붙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착잡미묘한 국제관계를 아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외세의존의 통일은 또 다시 ‘예속’으로 악순환될 것을 우려하기 때문에 그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의식’이 든든하게 우리 역사에 뿌리 내린다면 우리가 외세를 조정할 수도 있고 이용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예속’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남북한 민족 대표들이 성실하고 참을성 있는 대화를 계속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정부 대 정부의 협상도 계속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 편이 다른 한 편을 ‘전패국’ 같이 취급하여 자기 중심의 ‘강화조약’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안하기만 못한 결과를 가져올 우려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원점’에서 재출발하다는 심정으로 조급한 결렬은 억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비정치적인 가능한 합의사항을 모색하여 그것부터 실천에 옮기는 지혜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가령 분단된 가족 만나기, ‘스포츠’ 교류, 편지왕래, 견학단 관공여행교류, 물자교류, 무역 교환 등등 피차 유익한 일부터 실행하면서 정치회담도 동시에 진행시켜 보자는 것입니다. “믿져야 본전”이니 말입니다.

우리 크리스찬으로서는 남북분단을 다만 민족의 비극이라는 부정적인 태도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더 높은 미래를 위한 시련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를 正과 反으로 보고 거기서 제3의 더 높은 종합된 과제를 창조하는 운동이 곧 통일운동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선 이북이 공산독재라면 이남은 자유민주라는 또렷한 대조이념이, 명백해야 하겠습니다. 이북이 폐쇄사회라면 이남은 개방사회라는 원칙이 확립돼야 하겠습니다.

이북이 종교 말살 정책이라면, 이남은 종교 자유 정책을 엄수해야 할 것입니다.

이북에서 이념과 제도를 앞세워더 나은 건설에 성공했다 셈 치더라도 그것을 위한 개인자유의 말살은 곧 인간 말살이라는 것이 실정이면서 이남에서 그것을 보충할 장점이란 것은 “우리에게는 자유하는 인간이 있다” 하는 그것일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을 위한 더 나은 나라로서의 “통일한국”(고려라 해도 좋다) 건설의 ‘비전’이어야 하겠습니다.

공산독재 대 일인독재 체제는 ‘통일’에 아무 의미도 성과도 제공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남한의 민주화는 남북통일을 위한 심정의 첫 고동이요 혈액순환의 첫 맥박이 된다 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박’ 정권의 자유민주 말살정책과 그에 대체시킨 일인독재 체제에서는 우리의 남북통일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특히 남한에서의 ‘반공법’은 통일운동에 ‘암’세포를 부식시키는 것이 아닐까 우려됩니다.

[2] 경제

(1) 우리는 자유경제의 원칙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경제제일주의’를 배격합니다. 그리고 ‘인간을 위한 경제’라는 각도에서 ‘경제를 위한 인간’이 아님을 늘상 주장해 왔고 금후에도 그럴 것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주격’이요 ‘수단’이 아닙니다.

(2) 우리는 외자의존 경제에서 자립경제에로 육성될 정신적 결의를 고취하며 경제인들의 비인간적 탐욕행위를 규탄합니다.

(3) 한국 경제에서는 농업 본위의 전통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사ㆍ농ㆍ공ㆍ상의 균형적인 발전과 성장을 계획해야 하겠습니다.

사막에 구멍을 파고 객토를 실어다 넣고 거기에 한 그루 한 그루 과수를 심고, 수십척 밑, 지하수를 빨아 올려 채소를 푸르게 하는 이스라엘 청년들의 모습을 상상한다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개발될 여지가 얼마든지 남아 있다고 하겠습니다. ‘홀랜드’는 바다보다 낮은 습지를 국토로 갖고 있으면서도 남못잖게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강압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 아닙니다. 제각기 자기 살림의 행복과 창조의 즐거움에서 추진되는, 선한 의욕의 실현이어야 할 것입니다. 정부에서는 “잘한다” 칭찬해주고, 어려울 때 손 봐주고, 관헌이 수탈하지 못하게 하면 됩니다.

외자도입 정책에서 박 정권이 일본 자본가에 대한 무방비적 개방과, 소수 독점경제인들의 독과점 행위와, 대중 수탈의 경제불의에 대하여 우리는 항거합니다.

(4) 우리는 경제과실이 국민에게 균점되어 빈부의 격차가 완화되고 분배정의가 수립되기를 요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근로대중과 빈민과 약자와 수난자를 대변하며 그들의 친구가 되고 봉사자가 되기를 기약합니다.

정부가 이런 정의 운동을 탄압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공산화를 촉진시키는 어리석음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1) 우리는 학원과 언론과 신앙의 자유가 확보된 사회를 건설하려 합니다.

(2) 우리는 사회생활에 있어서 사리보다 공익, 권력행위보다 자발적인 봉사, 이익보다 정의를 앞세우는 정신에서 자유민주적인 원칙과 방법을 우리 일상생활의 양식으로 채택하려 합니다. 자유를 기독교적으로 ‘선용’하자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박 정권의 학원통제, 학생탄압, 언론의 공보화, 교회사찰, 정보부 강화 등에 의한 ‘경찰국가’ 수립을 반대합니다.

(3) 우리는 한국 고유의 문화를 존중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향적, 배타적인 자족감에 농성하는 국수주의적 경향을 조장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세계적인 테두리 안에서 자기의 소재를 발견해야 하겠습니다. 세계적인 평가에서 자기의 가치를 계정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문화 창작은 세계적인 공헌을 목표로 추진돼야 하겠습니다.

일상생활의 의ㆍ식ㆍ주 문화에 있어서도 세계적이면서 한국적인, 실용적이면서 미술적인, 과학적이면서 문화적인 고안을 원형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박정권의 폐쇄적이고 일률적인 통제정책에 항거합시다. 이 폐쇄적인, 일률적인 일인독재(일당독재?)에 있어서는 이북이 이남보다 더 심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남북 다 함께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서는 안되겠단 말입니다.

모든 문화의 어용화는 문화의 자살행위인 것입니다.

[3] 교육

(1) 교육은 전국민이 평생을 통하여 주고 받을 과제입니다. 학교교육의 완료가 교육의 종지부인 것 같이 생각하는 한국인의 심리는 시정되어야 하겠습니다.

(2) 교육의 목적은 자유하면서 바르게 잘 살 수 있는 ‘인간’을 형성하는 데 있습니다.

국민교육, 기술교육 등등은 이 줄거리에 붙은 가지나 잎사귀나 같습니다.

우리는 박정권의 관제교육, 집권자의 도구로서만 사용가치가 인정되는 통제교육을 반대합니다.

[4] 권위의 소재

(1) 우리는 군ㆍ관ㆍ민이 귀ㆍ천ㆍ고ㆍ하의 어떤 계층의식에서 평가되는 것을 경계합니다.

나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각기 주권자에 의하여 부여된 분야에서 국민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 뿐입니다.

권력은 봉사를 위한 것이고 지배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권력 행사는 책임을 수반합니다. 책임은 심판대 앞에 섭니다.

그러므로 3권분립에 의하여 권력의 편재를 막으며 서로 사찰하고 견제함으로써 권력의 정상적인 운용을 시도하는 민주주의가 절대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최고 권위는 창조주 하느님에게만 있습니다. 그가 심판할 것입니다.

[5] 결언

모든 역사는 인간 자유를 위한 투쟁의 기록입니다. 독재정치는 이 자유를 말살하는 가장 노골적인 폭력정치 행위라 하겠습니다.

1945년 8월 15일에 하느님으로부터 3천만 한국 민족에게 주어진 해방과 자유가 일개 일본식 장교에게 유린되고 3천만 인간이 죄수같이 되었습니다. 양단된 국토는 남북을 막론하고한 거대한 감옥으로 화했습니다. 자유인의 긍지는 사라지고 모두가 도망병같이 불안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실에 처한 우리는 국민해방의 신성한 의무에서 이탈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인의 자유제단에 젊은 피를 쏟은 UN. 16개국 젊은이들에게 부끄러움을 돌릴 수도 없습니다.

한국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은 한국의 자유ㆍ해방ㆍ독립을 위한 한국민의 신성한 의무일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인간회복과, 미래를 향한 더 높은 차원의 구원 운동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출사표”는 던져졌습니다. 출전을 기다립니다.

1974년 12월 서독에서

댓글 1개:

  1. 장공 김재준 목사의 글을 읽어보면, 크리스찬은 역사에 발을 딛고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하고... 신앙의 양심을 올바르게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 같다.

    특별히 지금으로부터 30년도 훨씬 이전의 글이지만, 그 당시에 역사의 현실 속에서 어쩌면 누구에게는 공허한 메아리로 들릴지도 모르는 그의 메시지가 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생명력이 강하게 전해지는 것은, 개인의 부귀영화나 인기에 영합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오로지 신앙의 양심을 지키면서 '당면한 역사 현실'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역사의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부르짖은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본다.

    김재준 목사는 분단의 시대를 살면서... (물론 그 당시는 남과 북이 독재로 강하게 뭉쳐 있었던 시대)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그 시대의 언어와 그 시대의 생각으로 풀어냈고, 조언하고 있다.

    부끄러운 것은 30년이 훨씬 지난 오늘에도 이 조언이 여전히 유효하고, 이 조언대로 하지 못했던 지나온 역사의 흐름을 돌아보면서 수차례 정파적인 주장과 훼방 속에서 제자리걸음을 걸어왔던 모습이다.

    이제는 정말로 '불가역적'(!)... 돌이킬 수 없는 평화의 과정을 향해 나아가야 할 때이다. 지금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방해를 했던 세력은 역사의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고... 그 시대를 살아간 우리 역시 후손들에게 여전히 분단 속에서의 갈등을 넘겨주는 부끄러움을 안고 살아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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