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23일 화요일

[범용기 제5권] (140) 輓章文記(만장문기) - 수난의 의거인

[범용기 제5권] (140) 輓章文記(만장문기) - 수난의 의거인

한국 역사는 한마디로 말해서 ‘수난’의 역사입니다. 중국, 러샤, 일본 등 소위 강국을 틈에 끼어서 그들 자신의 패권 경쟁에 제물이 돼왔습니다. 임진왜란이 그랬고, 병자호란이 그랬고, 일청ㆍ일로 전쟁이 그랬고, 한일합방이 그랬고, 1945년 8월 15일 해방에서는 38선이라는 미소경쟁거점으로 역시 수난자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수난’ - 다시 말해서 억울하게 남에게 고난받은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난자가 그 고난을 요리하는 태도 여하에 따라 다른 어느 강대국에서도 기대할 수 없는 드높은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는 건설적인 일면이 있습니다.

그 취하는 태도에는

① 참는다는 것이 있습니다. 고생하면서도 ‘참는 것’이 ‘맞서는 것’ 보다 안전하다는 태도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창조적이 아니고 해결책도 아닙니다. 오래가는 동안에는 잊어버리기도 하고 딴 세력에 통합되기도 합니다.

② 원한을 품고 저주하는 일입니다. “한”이 창조적이 못됩니다. “한풀이”가 있은 다음에사 맘이 열려서 뭔가 건설적이고 적극적인 의욕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 ‘한풀이’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는 광주 민주인사들의 ‘원한’을 내 맘 속에 느낍니다. 심각하달 수는 없겠습니다만, 그분들 편에 섰다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③ 옥사주의가 있습니다. 중국 사람의 교훈에 닭의 입은 될망정 소의 엉덩작은 되지 말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고려가 망할 때의 ‘포은 정몽주’ 선생, 두문동 72현, 이조 단종 때의 사6신, 생6신, 합방 때의 수많은 순사중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새 사람들 심리로서는 ‘자학’의 일종이라 하겠습니다. 해결보다는 체념을 가져오는 손실이 있습니다.

④ 폭력주의가 있습니다. 폭력은 폭력으로 대결한다는 것입니다. 저쪽이 총칼로 살해하면 이쪽 ‘수’의 인해(人海)로 밀어댄다는 것입니다. 저쪽이 백성을 ‘적’으로 치부하고 전쟁을 선포하면 이쪽도 ‘정부’를 적으로 반격하는 것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다…하는 식으로 진행시키는 일입니다. 그러나 폭력에 대한 무저항 불타협은 무서운 ‘저항’입니다.

⑤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일입니다. 적어도 광주학살 사건에 있어서는 우리가 호소하기 전에 세계가 솔선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만큼 전정권은 인기가 없어졌습니다. 고립되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이해관계에 따라 표현할 것입니다. 조건반사의 영역을 넘기 어려울 것입니다. 자신들이 직접 수난자로 된 것이 아닌 한, 결국 ‘대안의 화재’ 보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창조적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의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는 고난을 영광의 서곡으로 받았습니다. Violence로 고난에 맞서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는 ‘고난’을 ‘원한’으로 되새기며 ‘복수’를 위해 월왕구천처럼 와신상담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의 고난을 전인류 구원의 “속량사랑”으로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다시 살렸습니다. 그의 십자가는 인간에게서 죄와 죄벌과 죽음 자체의 세력까지도 말살하는 영광의 십자가로 변했습니다. 그 자신은 참 ‘구세주’ 메시아로 세워졌습니다.

요새는 ‘거짓 메시야’가 많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개인형으로도 나타나고 집단형으로도 나타납니다. “내가 재림주다” 하는 개인형도 있습니다. ‘아메리카니즘’이다. 공산주의 국가다. 원자탄 보유국이다. 초현대적 과학기술 사회다. 등등을 이유로 자기들 ‘집단’을 ‘메시야’로 등장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어느 하나도 자진하여 ‘인간사랑’ 때문에 고난을 영광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없습니다. 소수의 예외는 물론 여기에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예외’일 것뿐입니다.

국가 이익, 개인 이익, 단체 이익 등등 모두가 자기 이익본위입니다. 인간 구원을 위한 의식적인 속량사랑의 동기와 행동은 거의 없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나라의 수난 동지들을 기억합니다. 그 ‘심볼’이 광주 학생과 일부 시민 몰살사건입니다. 그들은 의를 사모하여 의를 말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말을 못하게 하니 글로 증거하려 했습니다. 글로 못하게 하니 ‘몸’으로 말하고자 하여 거리를 걸었습니다. 그들은 義 사모하기를 주리고 목마름 같이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의인은 절규였습니다.

그런데 그 의인들을 무더기로 학살했습니다. 그 배후에는 어떤 강대국의 손이 움직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진실을 말한다면, 광주의 수난의인들은 “우리 민족의 자유와 정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의 씨앗인 것과 같이 광주의 천여명 무덤은 더 큰 생명으로 폭발할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외롭지 않습니다. 전 세계 의인들이 한국의 의로운 역사 창조에 동참 전진합니다. 그러므로 (1) 우리는 의로운 우리 민주 동지들을 간데마다 자랑합니다. (2) 그리고 Lest we forget의 불망비를 세웁니다. 우리는 잘 잊어버리는 것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이번 광주양민 학살사건은 잊어버리기에는 너무 비참합니다. 너무 의롭습니다. ‘영구불망’일수록 의인의 창조력이 강해질, 민족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도 최후 만찬에서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고 당부했습니다.

(3) 우리는 새 역사를 창조하는 거점으로 광주수난의 ‘義’(의)를 선양해야 합니다. 전봉준 장군의 농민혁명운동, 일제 강점기의 광주 학생 혁명 궐기, 그리고 이번의 광주 의거 사건등은 더 크고, 더 바르고, 더 새로운 한국역사의 창조와 발전에 생명력이 됩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통일’ 없는, 교류마저 없는 ‘단절’의 민족적 괴로움이 있습니다. 남, 북 통일에 있어서도 이런 수난의인의 삶과 죽음이 그 Dynamics가 돼야 합니다. ‘의’를 제외한 통일은 밖에서의 불의와 탐욕을 안에 끌어들인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난의인은 죽지 않습니다. 그들은 무덤에 머물지 않습니다. 묘지 속의 ‘영민’이 아니라, 거리에서의 행군입니다.

우리 국민은 방관자가 아니라, 동참자입니다. 민족생명의 정화자, 변화자로서의 대열에서 탈락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건투를 빕니다.

1982년 5월 23일 토론토
광주사변 1주년 기념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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