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목요일

[1228] 그리스도와 함께 50년 (5)

그리스도와 함께 50년 (5)


한국교회와 교회성

초창기 한국교회는 사도교회같이 자랑스러웠다. 신교보다 약 100년 먼저, 금고령이 한참이던 때에 목숨 걸고 믿던 카톨릭의 수난과 영광은 더 말할 것도 없겠지만, 금고령이 풀린 다음에 들어온 신교도 여러 가지 사회적 문화적 악조건과 싸워야 했던 것이다. 카톨릭은 “학”을 통하여 학자 지성인 양반 고위층에 뿌리를 내렸지만, 신교는 주로 천민 기민 등 밑바닥 피압박 민중 속에 뿌리를 뻗쳤다. 일종의 분업인 양 잘된 선교분담이었다.

1885년 신교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들어올 무렵은 한국역사에 있어서 “곡식 익어 거둘 때”였다.

(1) 국교인 유교는 활력이 죄진해서 허례 허식으로 노쇄했고 불교는 산간의 승려종교로 소외당하고 있었다. 나라는 일인 손에 통채로 팔려 넘어가는 판이었으니 국교인 유교에 대한 불신은 말없이 민중의 맘속에 배어 퍼졌다. 더군다나 유교란, 종교적 “샘터” 없는, 있대도 하나의 씸볼 정도 밖에 안되는, 윤리적 교훈의 집성(集成)이었으므로 대다수의 무식한 서민층에는 활력이 돼주지 못했다.

(2) 이 공백(vacum)에 도전하는 회오리 바람이 있었는데 그것은 개화 운동자들의 서양문물 도입이었다. 바로 이 무렵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우선 서양문화를 소개했다. 그와 함께 기독교 복음을 전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 마시듯 서구문명과 함께 기독교도 쉽게 받아주는 것이었다.

(3) 기독교는 천민, 기민을 아무 차별없이 받아들여 꼭 같은 인간으로 대접했다. 그것은 예의나 술책에서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행동이었다. 예수의 정신이 원래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앞에서는 사, 농, 공, 상 네 사회 계층이 소리없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우락부락 혁명이라도 한다면 “토벌”이라도 해 버릴텐데 이건 봄볕에 눈녹듯 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바로 전호인 본지 속간 제36호에 소개한 교회의 네 가지 구성요소, 즉 사도전승을 이어받은, 하나로서의 거룩한 공회(公會)라는 것과 그 밑바닥 전반에 통한 혈맥인 “성도의 교제” 즉 “신자의 친교” 란 것을 되새기면서 한국교회의 시초를 살펴보기로 한다. “신자의 친교”란 것은 신자간의 생동하는 사랑을 의미한다. 한국교회가 어떻게 생성 또는 어떠한 형태로 구조화 했는가에 대하여는 지명관(池明觀) 저 “한국현대사와 교회사”(日文壯 1975. 5월 東京新敎出版社발행)에서 밝고 바른 시사(示唆)와 비판을 얻을 줄 믿기 때문에 일독을 권하기로 하고 나 자신의 1907년 Rerival 운동 직후의 인상을 소개한다면, 그 당시의 “부흥운동”은 결코 요새 흔히 보는 “타락한” 부흥운동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우선 “영의 감동”이 사도시대의 그것과 유(類)를 같이 한 순수한 것이었고 스스로 “거룩”을 의식하기 전에 벌써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신실 등등(갈라디아 5 : 22-23) 도덕적 내용을 배태하게 되는 것이었다. 개인생활이나 사회생활에 있어서 “믿는 사람은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이 불신자를 포함한 일반인의 정평이었다.

그러니까 “성도의 교제” 즉 “신자의 친교”가 교회와 사회에 고요한, 그러나 생명적인 “다이나믹스”로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역사적 환경적인 요소가 “옥토”(沃土) 노릇을 했다는 것도 사실이겠지만, 환경이란 것은 “인간”이 다루기에 달렸다는 것도 사실이다. 박토(薄土) 같은 어려운 환경에서 놀라운 기백과 활력을 발휘한 민족들도 얼마든지 있는 대신에, 놀구서도 먹고 살 수 있는 환경에서 인간이 원시형으로 남는 경우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화”에 있어서 환경의 역할이란, 이렇게도 저렇게도 될 수 있는 조건일 수는 있어도 결정론적일 수는 없는 것이라 하겠다.

어쨌든, 한국교회 개신교는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첫 정식 선교사로 들어오기 전 1876년에 만주에서 첫 세례교인 네 분이 생겼고 1882년에 역시 만주에서 누가복음서와 요한복음서의 일부가 한국인에 의하여 한국말로 번역되었으니 1883년에 일본에서 이수정이 세례받고 마가복음의 일부를 번역했고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라는 이미 번역된 한국말 성경을 들고 들어왔으니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그들이 원초적인 창설자랄 수는 없겠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개신교는 처음부터 자주적이요 자치적이며 자립의 토양에 심어진 하늘 씨앗이었다. 선교사의 또는 숭배(?) 심리는 퇴화된 훗날 얘기랄까?

한국교회의 교회성에 있어서 “하나”다 하는 의식이 정립돼야 하겠다. 한국사람들은 기독교가 그렇게 갈라져 있는 줄을 몰랐다. 알았어도 “하나” 같이 생각했다. 신자는 “예수쟁이”로 통칭됐고 어느 교파 예수쟁이란 것을 따지지 않았다.

그런데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여러 나라의 여러 교파가 제작기 자기들 선교사를 보내서 자기 교파 신자를 따로 만드는 것 때문에 혼선이 생겼다. 그래서 각기 선교지역을 나눴다. 말하자면 “분할점령” 비슷한 것이었다. 평양을 미국 남장로교가 경상남북도는 미국 북장로 왕국, 부산 동래지방은 호주장로교, 강원도는 미국 감리교 왕국이었다. 서울은 요새 백림(Berlin) 비슷하게 공유된 특수 구역으로 남았다.

그리고 나서는 선교사 전제 아래서 소위 네비어스 선교방법을 “청사진”으로, 교인의 머리수 늘리기에 혈안이 되어 “부흥회”가 성행되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요새 흔히 보는 “협잡성”있는 부흥회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건전하고 자유로운 신학적 비판이 따라야 하고, 비판적이면서 건실한 성서연구와, 사회생활에서의 그리스도인적 의무와, 역사의식 등등이 겸행되어야 할 것이었는데 그 변에서는 맹점이 너무 많았다.

요컨대 한국교회는 사도교회와 같이 (1) “하나”로서의 교회로 선교되었어야 할 것인데, 또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했을 텐데, 분할 선교라는 선교사들 방침이 분파적인 한국교회를 형성했다. 이제라도 우리는 “하나의 교회”로 재연합돼야 한다. “통합”이라기보다 “연합”이다. 사람의 몸에 손과 발이 둘씩 있어서 민활한 활동이 가능한 것과 같이 서로의 “지체 의식”(技體意識)만 제대로 정립되었다면 선교와 봉사에 있어서 더욱 효능적이었을 것이다. 여기서도 성도의 교제, 즉 신자의 친교가 기본활력 구실을 맡는다.

(2) 한국교회는 거룩한 교회로 자처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룩”이란 것을 “분리”(separation), “성별”, “성결” 등등의 의미로만 받아들였기 때문에 거룩을 위하여 자신의 마음문을 닫아 “폐쇄교회”가 “순수교회”라는 인상을 길렀다. 사실 한국교회는 스스로의 “거룩” 때문에 “세상”(world)을 향하여 문을 닫고, 타종교를 향하여 문을 닫고, 몇 천 년 토착된 관습과 풍토를 향하여 문을 닫았다. 변천하는 자기 나라 역사(history)을 향해서도 문을 닫았다. 선교사들이 서구문명을 도입하고, 3ㆍ1 운동과 그 후의 해외 해내 독립운동에 기독교인이 공헌한 것을 부정하는 바가 아니지만, 그것은 한국민족으로서의 “불문률” 때문이었고 신학적인 논거에서가 아니었다. 신학은 여전히 정통 보수신학이어서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에 요약된 타계주의였으므로 현실 역사는 “세속”이란 범주에 들어 의례적(依例的)으로 몰려나게(Shut out) 되어 있었다. 다만 개별적인 영혼구원을 위한 “낚시터”로서 인정받을 뿐이었다.

기독교는 마음을 여는 데 그 특색이 있다. 하느님이 인간구원을 위해 그 아드님을 통하여 자신의 마음문을 열었다. 우리도 그를 향하여 마음을 열어 그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가 죄인과 세리와 버린 백성들에게 마음문을 여신 것 같이 신자도 그러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거룩을 지키기 위해서 문을 닫는다. 그 결과는 폐쇄된 교회주의다. 세상은 하느님의 세상이고 세상정치는 하느님의 정치권 안에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세상은 부정(不淨)하다, 정치는 불결하다 하여 아예 손대지 말라고 한다. 그래야 교회가 거룩하고 순수하고 교언이 깨끗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라는 왜 만들었으며 민족은 왜 있으며, 인권이나 주권의식은 왜 주장하는가? 3ㆍ1 독립운동은 왜 자랑하는가?

거룩은 진선미(眞ㆍ善ㆍ美)의 종합이요. 그런 것과의 분리가 아니다. “하느님이 거룩하니 우리도 거룩하다”(레위기 11:45, 19:2 등). 세계는 하느님이 지으신, 하느님의 세계니 거룩하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이니 거룩하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 담겨 있는 책이니 거룩하다. 교회는 하느님을 예배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느님 나라 건설에 동참하니 거룩하다. 교직자는 하느님의 전속 일꾼이니 거룩하다 등등이요 그 자체가 완전하고 거룩해서 거룩하다는 것이 아니다. 한국교회가 거룩하다고 자부하려면 그만큼 스스로의 거룩을 의식하는 것보다도 겨우 불속으로 끄집어냄을 받은 타다 남은 부지깽이로서의 은혜에의 감격에 겸손해야 할 것이다.

(4) 보편성(Catholica)에 있어서도, 한국교회는 자기교회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세계 교회로서의 자각과 의무와 긍지를 높여 세계 교회로서의 보편 의식에 뜨거워져야 한다. 개교회 유지에 너무 급급해서 다른 동료교회에 관심할 여유가 없다는 것은 이기적인 변명이다. 단 한두푼이라도 타교파의 어려움에 동참하며 이웃교회나 사회에 봉사하는 기쁨을 자랑해야 한다. 사회관심, 역사참여 없이 “보편성”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도 절실하게 되새겨야 할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의 소수 민족적 예언자들의 용감한 수난이 어떻게 전세계 양심인사들에게 역사적인 봉화로 빛나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명심해야 할 것이고 좌절이나 후퇴가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5) 사도 전승적이라는 데 있어서도 한국교회는 반성해야 한다. 사도전승의 본류는 성경기록이다. 성경이 “성경”된 것은 그것이 사도들의 그리스도 증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도들 자신, 그들의 생동하는 “인간”으로서의 심정이 이해되어야 할 것이요 그들 “기록”이 우상적으로 객체화돼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도 살아계신 그리스도 자신과의 사랑의 친교, 성령의 감동과 내주, 그리스도의 “언어”로서의 성경진실의 파악, 그 진리가 우리 현실에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지금”의 예언으로서의 성경이어야 한다. 그것이 지금의 Locus에 오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어떻게 파악되느냐를 기도와 성실과 고난에의 동참에서 체득해야 할 것이다. 성경에 대한 해석학적 비진실과, 역사적 비판을 통과하지 않은 성경의 자가류 해석, 특히 자기 또는 자기교파 이익에의 이용, 또는 남용, 오용 등등이 한국교회의 일부에서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사도전승적인 성서에의 모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위에서 제창된, 같은 원칙 아래서 우리가 서로 헐뜯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수준의 신학적 지식과, 세계역사의 테두리에서의 우리의 역사의식 계발, 우리 역사의 특수성 안에서의 그리스도 “이미지” 발견, 다시 말해서 자유, 정의, 민주, 민중적 민족국가 건설 등등의 민족적 공통요청에 부응한다는 우리의 특수한, 그러나 역시 세계 연대적인,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로 되게 하는, 역사변혁의 그리스도 운동에 사도전승적인 정열을 태워야 할 것이 아닐까? 사도시대의 “카타콤”이 지상의 로마를 그리스도에게 화신(化身-Incarnation과는 다른 의미에서) 시킬 수 있었다면 한국에서도 “사도전승”을 새 역사에의 전기로 행군할 수 있을 것이 아닐까? 한국교회가 이 점에서 새 세기를 향한 전예(前銳)부대로 뽑혔다는 자랑에 실망이 와서는 안될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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