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28일 월요일

[1248] 한국인과 한국 역사 (2) / 1980년 12월

한국인과 한국 역사 (2)


(1980년 12월)

– 문화와 습속

이른바 신라의 삼국통일이란, 외세에 빌붙어 동족을 뭉개고 스스로 소위 중원천자의 번신이 되는 길을 택한 것이었으니 자랑꺼리랄 수가 없다. 한국 민족의 역사는 고구려의 멸망에서 그 기백이 꺾였다. 고구려는 중국과 일대일로 맞서 자웅을 결단하는 대국(大國)의식에 살았으며, 대국답게 행동했다. 중국의 침략이 성공한 예가 없었다. 마감판에 당나라에 망한 것은 동족인 신라의 외세에 대한 아부와 그 앞잡이 구실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것이 ‘근인(近因)’이었음은 변명의 여지가 없겠다. 고려는 고구려의 후계자로 자부했다. 그래서 ‘만주’의 고토(故土)를 탈환한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고려 제6대 왕 성종 때 만주족이 들고 일어나 요양(遼陽), 유수(留守), 소손녕(蕭遜寧)이 고구려의 서북변을 침략, 창성 근방인 봉산군(鳳山那), 즉 평양 이북의 땅을 베어줄 작정으로 맘을 정했다. 그런데 그중에 단 한 사람, 내부시랑(지금으로 말한다면 부수상)인 서희(徐熙)만이 반대했다.

그때 요군(遙軍)은 안주에 있었다. 서희는 위풍 있는 몸가짐으로 적진에 뚜벅뚜벅 걸어들어가 그 총수인 소손녕 앞에 마주앉았다.

“고려가 신라 땅에서 일어나 우리가 이미 차지한 고구려의 옛 땅을 어째서 침식하며 또 우리가 국경과 서로 이어 있으면서 왜 국교를 맺지 않는고? 이제라도 땅을 떼어 주고 국교를 맺으면 무사할 수 있을 것이오.”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후신이기에 국호도 고려라 했고 서울도 고구려 서울인 평양에 있다(그때 평양을 서경이라 했는데, 그것은 서쪽 서울이란 뜻이다). 우리 국토로 말하더라도 당신네가 말하는 동경, 즉 ‘요양’도 우리나라의 옛 경내이다. 우리가 서북면의 토지를 경략하는 것을 어찌 ‘침식’이라 하는가? 서로 수교의 사절을 교환하지 못한 것은 중간에 여진족이 끼어 있어서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만일 여진을 쫓고 우리의 옛 땅을 회복하여 성채를 쌓고 도로가 통하게 된다면 친선사절을 교환할 것이다.”

이것은 강경하면서도 조리 있는 외교였기에 요주(遼主), 성종은 화친을 맺고 군사를 거둬갔다.(김화진, 『한국의 풍토와 인물』)

여기서 보는 대로 고려는 고구려의 후계로서 만주의 옛 땅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걸핏하면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한다’, ‘국토를 할양한다’ 하는 비겁한 인간들이 나라의 중신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는 문젯거리다. 그래도 고구려의 을지문덕, 고려의 강감찬, 이조의 이순신 등이 있어서 그만큼이라도 나라 목숨을 이어 왔다고 하겠다.

어쨌든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약소국, 약소민족의 계열에 가산되었다. 그래도 민족정기가 소진했달 수는 없겠고 나라 위한 민족항쟁은 진력나도록 끈덕지게 오늘까지도 뻗쳐 왔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 소기의 목적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좌절된 실패작이었다. 민중은 가난했다. 관공리는 탐관오리형이 대다수였다. 거기에 외세는 기회를 놓칠세라 덤벼든다. 그들의 침략 수단은 무제한이다. 무한전술이다. 고관 중신들은 나라를 팔아먹기나 했지만, 민중은 먹지도 못하고 먹을 것도 없이 망국한 노예가 된다. 그들에게는 생활보다도 생존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먹을 생각만 목구멍에 꿀떡인다. 그래서인지 우리에게는 ‘먹는다’는 말 이 유난스레 많다.

“밥 먹는다”, “물 먹는다(마신다고도 하지만)”, “욕 먹는다”, “돈 먹었다”, “팔아먹는다”, “사 먹는다”, “먹고 보자”, “제 놈에게 먹힐 줄 아나! 젖먹이”, “토지를 구겨먹었다”, “먹음직하다”, …….

‘본다’는 말도 무던히 많다. 글은 양반만이 독점하고 서민은 문맹으로 암흑 속에 잠가 둔다. 어둠 속에서는 눈이 있으나마나다. 그래서 민중은 뭘 보고 싶어 못 견뎠던 것이 아닐까?

“배워보자”, “알아보자”, “가보자”, “읽어보자”, “걸어 보자”, “생각해 보 자”, “싸워 보자”, “적어 보자”, “그래 볼까?”, “건드려 본다”, “입혀 본다”, …….

‘본다’는 한문 글자에는 ‘볼 시(視)’자와 ‘볼 견(見)’자의 두 가지가 있다. 고전에 시이불견(視而不見)이란 구절이 있다. ‘보면서도 보지 못한다’는 말이다. ‘수박 겉핥기’라든지 ‘소경의 장 구경’이라든지 건성으로 보는 것, 생각 없이 보는 것은 보나마나다. 우리가 ‘본다’는 데는 그런 따위 천박함이 다분히 섞여 있지 않았을까?

‘본다’는 데는 ‘시험 삼아 해본다’는 뜻도 있다. 자기의 삶 전체를 걸고 드는 실존적인 진지성보다도 자기와 상대방과의 사이에 거리를 두고 건너다보는 ‘관조’, ‘관찰’로서의 ‘보는’ 기능을 말한다.

가령 ‘싸워 본다’고 할 때 죽자사자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싸워 본다, 시험 삼아 전쟁해 본다는 태도로 전장에 임한다면 동학 혁명군 토벌하러 내려오던 관군처럼 도중에서 다 새버리고 말 것이 아니겠나 싶다.

건축에 있어서(중국도 마찬가지지만)도 우리 건축에는 지하실이 없다. 어떤 이의 말에는 ‘하도 난리가 잦아서 힘들여 지어도 적이 내리밀면 뭉개지고 타고 우리가 올리밀면 쫓겨가는 적군이 심술로서도 불 질러놓고 달아난다. 그러니 일시 비바람이나 가리고 지낼 만하면 됐지, 뭘 억만년 살 궁리를 하겠나’ 한다. 그럴 듯도 하다마는, 서양 사람들도 전쟁은 무던히 좋아했고, 한번 전쟁이 났다 하면 10년이고 100년이고 끝장을 봤다. 그러니 그 바람에 집이 견뎌날 리가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허물어진 자리에 더 든든한 집을 세우려 든다. 지하실부터 판다. 건축 재료도 동양에서는 주로 목재다. 기둥과 들보가 그 건물을 지탱한다. 기둥도 나무요, 들보도 나무다. 그러니 단층집밖에 설계할 수가 없다.

지붕은 기와나 짚으로 인다. 지붕이 유난스레 무겁다. 여기저기 서 있는 나무기둥으로서는 떠받치고 서 있기가 너무 힘들 것 같아 불안스럽다. 초가집은 더욱 그렇다. 주춧돌도 없다. 서까래만한 통나무를 흙에 박고 흙벽을 둘렀다. 굴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여기서 지붕치레, 난간치레를 양반사회의 허세라 한다면, 알몸으로 그걸 떠받들고 서있는 기둥들은 민중일 것이다. 그걸 좁혀서 임금이 지붕이라면 신하들이 기둥과 들보랄 수도 있겠다.

동양에서도 일본은 양식이 좀 다르다. 집이 가볍고 개방적이다. 칸막이도 ‘쇼지’니 ‘후스마’니 ‘쪼이다데’니 하는 필요할 때 구분만 그었다가 때로는 자유스레 뜯어치우고 넓은 한 칸 ‘홀’로 만들 수도 있게끔 설계한다. 대륙형이라기보다는 필리핀이나 남양, 더운 지방의 집 구조에 가깝다.

한국에서는 온돌을 놓는다. 서울이나 남도에서는 방마다 온돌 아궁이가 있지만 서북 지방에서는 부엌방 한 아궁이에서 집 전체를 데우도록 돼 있다.

어쨌든 온돌은 한국 특수의 난방장치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기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의자가 없어 졌다. 엉덩이가 따스하면 다음으로는 온몸을 뜨시게 하고 싶어진다. 자리를 깔고 굽는다. 그렇게 되면 좀처럼 일어나지지가 않는다. 앉은자리에서 남을 시킨다.

서민들 보기에는 팔자가 늘어진 호강이어서 부럽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비활동적이고 자기 방어적이고 비창조적인 습성이 일반화한다. 서민층에서는 노동을 하지만 그건 어찌 못해 짜증내며 하는 일이고, 노동이 신성하다거나 보람 있는 가치 창조라든가 하는 의미에서 하는 것은 아니었다. 발바닥에 흙 안 묻히고 사는 사람이 상팔자였다.

일본 집은 온돌이 없다. 추우면 ‘이오리’니 ‘고다츠’니 하는, 말하자면 방 한가운데 우둥불 같은 것을 피우고 식구들이 거기 둘러앉아 몸을 녹이는 일, 잠자리 속에 주먹만한 분탄덩이를 재에 묻은 ‘고다츠’를 끼고 체온을 보존하는 일 등이다. 그 대신 아침저녁 ‘오후로’라는 더운 물 목욕탕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몸을 담가 몸을 덥히는 습성이 발달됐다. 한국 사회에서는 생소한 풍습이다. 우리나라의 농촌 사람, 특히 소작농민들은 쉴 새 없이 일한다. 그걸 보고 외국인들은 부지런하다고 칭찬한다. 그 번거로운 주인집 일을 맡아 심부름하려니 쉴 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건 종의 부지런함이다.

한국 사람은 유난히 보수적이고 전통적이었다. 특히 농촌은 더하다. 선조대대 그렇게 살아왔으니 자손인 우리도 그렇게 산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 선조의 유풍(遺風)을 고치는 것은 불효다.

효도는 모든 덕행의 근본이라 한다. 이 효도와 제사제도가 서로 어울렸다. 사실 유교에는 종교적인 요소가 너무 메말라서 인간성에 샘터가 없어져 갔다. 그것을 제사제도로서 어느 정도 때우는 셈이었다.

병풍 두르고 위패 모시고 큼직한 제사상 위에 푸짐하게 음식을 차려 드리고 그 앞에서 분향하고 고축(告祝)하고 헌작(獻爵)하고 절하고 하는 등의 의례는 종교적인 흐뭇함을 나누게 한다. 그리고서 모두가 즐겁게 음식을 나눠 먹고 술도 한두 잔씩 돌린다. ‘예배’와 ‘친교’랄 수 있겠다.

효도는 또한 풍수설과도 어울렸다. 조상의 뼈를 ‘명당’ 자리에 모신다 는 것이다. 명당에 모시면 뼈가 사그라지지 않고 오래오래 보존되고 썩잖을뿐더러 기름기 돌아 ‘백골’이 ‘황골’로 된다고 한다.

그리하면 조상도 혼령이 즐거워 자손들을 축복한다는 것이다. 그 축복의 내용이 뭐냐 하면, 그것은 현세에서의 ‘기복사상’이다. 수, 부, 귀, 다남자다. 오래 살고, 가산이 넉넉하고, 높은 벼슬하고 아들이 많다는 것이 더 할 수 없는 ‘복’이라는 것이다. 이 기준에서 ‘양반’을 본다면 그들이야말로 복 받은 사람들일 것이다. ‘선음(先陰)’의 덕이라고 한다. 저절로 운명론이 된다. 사주팔자를 캐고, 풍수설을 믿고, 점 치고, 하찮은 여행에도 일진을 본다. 혼인에는 남녀사랑이니 뭐니는 아예 생각도 못하고, 신분과 궁합(宮合) 따위를 본다.

어떤 가문의 선영(先塋), 즉 그 가문의 집단 묘소에 어떤 다른 가문이 접근하여 ‘묘’를 암장이라도 했다가는 큰일 난다. 가문과 가문의 편싸움이 벌어진다.

의복은 흰 것을 입는다. 흰 것은 빛이 아니라 빛 이전의 모든 빛깔을 가능케 하는 바탕이다. 거기에 칠하는 빛깔에 따라 작품이 달라진다. 울긋불긋한 빛깔은 잡되고 ‘야’해서 점잖지 못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소복(素服)은 슬픔을 상징한다는 데는 동의하고 있다. 갓 시집온 새댁이라도 상인이나 복인이 되면 소복차림으로 삼년상을 치러야 한다. 그렇다면 흰 옷은 정결성과 아울러 비애를 머금고 있는 빛깔이라 하겠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민족은 슬픔을 향락하는 버릇이었다. ‘한(恨)’이 많고 ‘정(情)’이 많아 그렇다지만 한이란 슬픔을 오래오래 되새기는 데서 생기는 감정이고, 그 ‘한’이 슬픔을 북돋우는 것이다. 정이란 남의 한을 알아주고 그걸 나누는 감정이니만큼 아름다운 슬픔의 사랑이랄까? 어쨌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적극적, 투쟁적, 건설적인 면은 덜하다.

한국 민요를 모아 놓고 보면 거의 예외 없이 애수를 노래한다. ‘낙양성 십리하에 크고 작은 저 무덤아’로부터 시작하여 ‘아니 놀고 어이하리’로 끝맺는 ‘육자배기’는 죽음의 불가피성에서 퇴폐로의 길을 변호하고 있다. 젊은 남이 장군의 기개 같은 것은 아예 밑바닥에 말라버린 것 같다.

“백두산 돌은 칼 가는 숫돌, 두만강 물은 말 먹여도 넉넉잖다. 사내자식 스무 살에 나라 평정 못한다면 후세에 뉘라서 대장부라 할쏘냐?”

남이 장군은 17세에 무과장원으로 뽑혀 세조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다. 그는 함북 종성에서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20대 청년으로 이를 토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위의 시를 지었다 한다. 그런데 남이가 28세(1468년)에 병조판서로 있을 무렵, 간신 유자광이 위의 시 둘째 구절의 ‘미평국 (未平國)’을 ‘미득국(未得國)’으로 고쳐서 항간에 유포시키고 그를 역적으로 몰아 죽여버렸다. 나라를 얻는다(得)는 말은 임금 된다는 뜻이기에 역적으로 몰 구실이 되었던 것이다.

이조 500년은 유교가 전매특허를 맡은 사회였다. 유교 가운데서도 주자학파가 판을 쳤고 조금이라도 다른 학설이 나오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극형으로 죽였다. 학문의 자유 없는 문화가 얼마나 장하게 무성할 수 있겠는가?서울 거리의 가로수나 화부의 소나무 정도일 것이다. 성리학에서 퇴계와 율곡을 자랑하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통틀어 볼 때, 서양 중세기의 스콜라 철학을 연상시킨다는 것도 이유 없달 수 없겠다. 율곡의 10만 양병설이라든지 국토개발에서의 치산치수와 식림 설계 둥은 탁월한 실학의 무늬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지만, 고루하고 안일한 우물 안 개구리 유학자들의 반발과 음모로 일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또 하나 이조사의 비극이었다. 이런 실화가 있다. 어떤 양반 재상이 신혼인 어린 며느리를 데리고 한강나루를 건넌다. 배는 머슴이 저었다. 배가 기우뚱하며 어린 며느리가 물에 빠졌다. 머슴은 덥석 그 며느님 손목을 잡아 끌어올리려 했다. 그 순간 양반 시아버지의 불같은 호통소리 “이 놈! 그 손목이 어떤 손목인데 네 놈이 감히 손댄단 말이냐.” 얼떨결에 머슴은 손목을 놓았다.

그때 예수가 거기 있었더라면 아마도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 아닐까.

“예절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예절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 살리기 위해 예절을 좀 어기면 어쨌단 말이냐.”

스포츠가 없어졌다. 민간에는 단오명절 같은 때에, 남자의 씨름, 여자의 그네뛰기, 설 명절에 널뛰기 아이들의 연 싸움 같은 운동이 있었지만 그건 일반 민간에서나 하는 일이요, 양반집 자녀가 그런데 구경이나 해준 다면 큰 생색이었다.구한말 친러파가 득세했을 때 ‘크자(러시아 황제)’ 생일 축하사절로 황태자 일행이 러시아 수도에 갔다. 러시아 귀족들이 축하 프로의 하나로 ‘스포츠 팀’을 짜가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뛰고 있었다. 우리 황태자는 일행에게 묻더라는 것이다.

“귀족들이 저렇게 점잖지 못하게 뛰고 넘어지고 할 수가 있나! 부하들을 시키고 높은 데 앉아 구경이나 할 것이지, 쯧쯧쯧.”

그러니까 한국에서 스포츠가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천대받은 것은 사실이다.

한국 정부에서도 말로는 문무백관이라 하고, 문(文)과 무(武) 두 반열의 권력자를 ‘두 반’, 즉 ‘양반’이라 했다. 그러나 언제나 문관이 우위요, 무관은 다음으로 처우됐다. 활 쏘고 말 달리고 병서 읽고 진법 배우고 하는 것이 무관의 소양이지만, 시 쓰고 국정을 논하고 과거에 장원 급제하고 암행어사가 되는 등의 통쾌한 출세는 모두 문관의 무대였다. 그때의 ‘글’이라면 ‘한문’이었으니 문학을 한다면 으레 중국 문학의 거두들 문집을 교과서처럼 배우고 읽고 익히고 본떠야 했다. 그러는 동안에 ‘명문’은 모두 중국글 뿐이고, 우리나라 글은 비록 같은 한문이라도 이류에 속한다고 자모(自侮)하게 됐다. 특히 훈고학의 영향 아래서는 아무리 명구(名句)가 나왔대도 그 출처가 어느 중국 고전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닌 경우에는 완전히 무시되고 말았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시했지만 그건 무식한 부녀자의 ‘언문’이요, 국문은 역시 한문밖에 없다고 유학자들은 뻐겼다.한문이 ‘진서(眞書)’, 즉 ‘참 글’이라는 것이었다. 한글은 표음운자고, 한문은 표상문자니만큼 한문이 갖는 ‘힌터랜드’가 더 광대하고 그 내린 뿌리가 더 깊고 그 뻗은 지역이 더 무성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다. 그러나 그만큼 배우기 어렵고 그 글을 자유로 구사한다는 것은 한학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어서 저절로 민중은 자기 긍지를 잃고 멸시 천대를 운명처럼 감수하게 된다. 벼슬아치는 하늘에 별같이 높아 보이고 따라서 그들이 행패를 해도 맞서 싸울 용기는 좀처럼 솟구치지 않는다. 수탈이 너무 심하면 민중이 사발통문을 돌려 민란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그것이 ‘혁명’ 운동에까지 발전하지는 못 한다. 동학혁명은 예외였다 하겠지만 그것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은 아니었다.

몇백 년을 이렇게 눌려 뺏기며 지낸 민중은 나약해졌다. 자존심이 증발 된다. 스스로를 경멸하니 남들도 경멸한다. 특히 관공리들 앞에서는 비굴할 정도로 쩔쩔맨다.

이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 수백 년 찌든 습속이다. 관존민비 습성 위에 자유민주주의를 세우기는 어렵다. 속으로는 싫어도 우선 위에서 시키는 일이니 해놓고 보자 한다. 관에서 따지면 겁이 난다. 겁내는 걸 본 관원들은 겁나게 군다. 공연히 두들겨 반쯤 죽여 내팽개쳐도 피해자는 살아난 게 다행이라고 자위한다. 그중에서 좀 더 용감한 사람은 불의에 항거한다. 항거는 하지만 개죽음은 싫다. 그래서 항거하면서도 죽지는 않을 전략을 세운다. ‘적응하면서 항거한다’는 양면작전이다. 나쁘게 말한다면 표리부동이다, 가면극이다. 그것이 아주 능숙해지면 어느 편이 진짠지 모르게 된다. 그래서 이중간첩 혐의까지 받는다. 그러므로 평소의 주장과 대답은 똑똑히 해야 한다.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 오’ 해야 한다. 그 다음에 올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맘을 편하게 가져야 한다.

그 사람의 양면성이 본심인지 전략인지를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다. 알쏭달쏭한 어려운 문제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그런 행동을 취하기 전에 동지들 그룹, 적어도 그 핵심 분자하고는 토의 결정하고 합의를 얻어 진행 시켜야 할 것이다. 물론 그럴 여유도 없는 특별한 위기상황도 고려해야 하겠지만 그것은 사건 후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크리스찬에게 비폭력ㆍ비타협이란 전통이 있다. 그래서 투쟁, 데모, 폭력 사용, 정치 혁명 따위를 피하려 한다. 정치 개입 자체를 혐오한다. 그러나 그런 도피 행위에는 위선과 가면이 앞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폭력ㆍ비타협은 전술이지 절대적인 원리가 아니다. 모든 크리스찬에게는 예외 없이 ‘의’를 사모하고 정의를 증거하고 스스로 그것을 고백하고 남에게 증언하고 사회와 정부에 고발할 의무가 있다. 그건 크리스찬의 원형이지 ‘전략’이 아니다. 그걸 안 하면 스스로 불의에 가담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집권자는 그런 항거운동을 원치 않기 때문에 그런 크리스찬은 핍박과 수난을 각오할 뿐 아니라, 그것을 영광으로 여겨야 하며 그 자체가 영광임을 확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 자신의 행적이었으며 제각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도 예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만민대속의 십자가이지만, 제자들의 십자가는 대속의 은총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십자가라 하겠다. 전자가 종교적인 동기였다면, 후자는 윤리적인 응답의 동기라 하겠다.

비폭력이 수단에 속한다는 것은 웬 소리냐 한다. 우리는 정의를 말로 증명한다. 말해도 마이동풍이니 글로 써낸다. 선언문, 성명서 등이 그것이다. 그래도 듣는 체하지 않으니 데모를 한다. 데모는 몸으로 하는 ‘말’이다. 잡혀간다. 그것은 고난으로 증거하는 것이며, 그러다 죽으면 그것은 진짜 예수의 명령대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정의 구현을 위한 수단이요, 그 자체가 정의는 아니다.

의로운 이는 하나님 아들 예수님뿐이다. 우리는 그의 주위를 돌며 그의 빛을 반사하는 빛 없는 위성들일 뿐이다. 수난자는 자랑스럽다. 그러나 수난자 자신은 어디까지나 겸허해야 한다.

인도의 독립을 위해서 간디는 비폭력ㆍ비타협으로 싸웠다. 워싱턴은 미국 독립을 위하여 전쟁을 걸어 이김으로 해서 목적을 이루었다. 그러니 ‘독립’이라는, 같은 목적을 위해 둘이 같지 않은 수단을 택한 것이었지만 결과는 같았다. 목적을 위해 폭력이 필요하다면 그걸 쓰는 것이다. 독립을 위해 폭력을 쓰지 않아도 된다면 구태여 폭력을 남발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전두환 같은 악당은 말로도, 글로도, 데모로도 어쩔 수 없는 돌대가리 악당이다. 그 한 무지한 권력자 때문에 3,000만이 개인적으로 병신 되고 사회적으로 종이 된다. 그런 경우에 폭력으로 악을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다. 본회퍼의 경우가 그랬다.

그런데 현재 한국 민중은, 아니 전 한국 국민은 그렇게 용감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전두환의 그 무지한 학정 밑에서 본다면 용감하지 못하다고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어쨌든 자기 양심의 타오르는 불꽃을 일시적 안일, 도피, 초연, 심하면 굴종, 협력, 앞잡이, 스파이 등으로 덮어 그 거룩한 불길을 질식시킨다는 것은 치욕이 아닐 수 없겠다. 지금 전두환은 박정희를 죽인 김재규를 죽이고 다음으로는 박정희가 죽이려고 별별 수단을 꾸몄지만 끝내 죽이지 못하고 제가 먼저 죽은 김대중을 죽이고야 만다는 앙심에 이를 갈고 있다. 전남 광주의 학생과 시민 수천 명을 자기가 학살하고서 그걸 김대중에게 뒤집어씌우려 한다. 로마시에 붙박아 놓고 서 크리스찬이 방화했다고 뒤집어씌워 로마의 기독교도들을 전멸시키려던 폭군 네로를 연출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그 인물로 보아 전두환은 네로의 발바닥 되기도 감당 못할 위인이다. 그건 광주사변에서 그의 인간적 역량이 어느 정도란 것이 폭로되었다. 잘 되든 못 되든 지금은 인권의 시대인데, 그런 건 만행을 저지르고서 전 세계의 규탄을 예측하지 못했다면 그건 ‘석두’임에 틀림없을 것이고, 그러고서도 밀고 나갈 수 있다고 자신 한다면 그건 정치가 무언지 전혀 모르는 ‘돌통령’일 것이다. 또 하나, 그런 악한 나무에서 선한 열매를 기대하는 국민이 있다면, 그건 돌보다도 ‘돈’ 머리의 소유자일지 모른다. 지금 습해와 냉해로 농사는 흉년이고, 민심은 흉흉하고, 경제는 뒤틀리고, 기름은 한 방울도 안 나는데 기름값은 날마다 올라가고, 후견자 격이던 미국은 민간 여론의 전면적인 반전두환 무드 때문에 원조며 수입을 삭감할 것이 뻔하다고 하니, 위정자의 악행이 백성의 원한을 낳고, 그 원한이 사무쳐 신의 진노를 부르고, 신의 축복에서 소외된 자연과 인간은 심판 위에 대상이 된다는 ‘신학’이 살아 일하는 것 같다.

나는 한국인의 문화와 습성을 얘기할 작정이었는데, 붓이 너무 빗나간 것 같다. 문제 아닌 것이 없지만, 당장 눈앞에 다가온 위기는 ‘김대중’ 처형 문제다. 김대중은 자유 한국의 상징이다. 그를 살리는 일이 급선무다. 12월 5일이 대법원 판결 날이라는 소문이 전해진다. 아마도 전두환은 종잡기 어려운 이런저런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그 연막이 걷히기 전에 슬쩍 없애려는 흉계를 품고 있을지 모른다. 김대중을 죽이라는 관제데모 같은 것을 설계하고 있다 한다. 이런 악마적인 음모는 사전에 전 세계가 폭로 고발, 견제해야 할 것인데, 이 점에 있어서는 미국 당국에서 강대국다운 지도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국내 반독재 민주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태세를 확립해야 하겠다. 응원자의 위치에서 참여자의 위치로 일체화해야 하겠다. 그 전략도 좀 더 높고 넓은 차원에서 세워야 할 것 같다. 이 점에 있어서 미국이 이승만 박사에게 한일관계 급속 정상화를 강요했을 때, 이승만 박사가 말 했다는 한 구절이 연상된다.

“일본이 한국 침략에 재등장한다면 나는 이북과 합세하여 일본과 싸우겠다.”

역시 그의 배짱은 졸개들의 추종을 불허한다. 지금 일본은 남한에 경제 침략의 뿌리를 깊숙하게 박았다. 물론 미국과의 합작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대안의 화제가 아니다.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다.

나는 한국 민족의 해외 이민을 극구 권장한다. 그건 이민이라기보다도 해외 발전이다. 세계 무대에 나서는 세계적인 민족이 되는 길이다. 이런 각도에서도 내가 위에서 적은 우리의 문화와 습성을 세계적인 시야에서 재정리해야 할 것 같다.

우리의 문화를 논하는 학자와 학도들이 많아졌다. 어떤 이는 한국은 동양 또는 세계에서 ‘문화의 종주국’이 돼야 한다고도 한다. 그만큼 문화에는 자신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역시 자화자찬이 적잖이 섞였다고 본다.

우리의 문화는 스케일이 작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스핑크스, 로마의 바티칸과 원형극장, 프랑스의 베르사유, 영국의 버밍엄, 독일의 쾰른 성당 등을 보고서 우리 문화재를 본다면 거울 앞에 선 제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워싱턴, 뉴욕 등지를 본다면 전두환도 무슨 생각이 싹트지 않을까? 하기야 진짜 돌대가리라면 개가 바위에 갔다 온 셈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지금 전두환은 해외 인사들의 고국 방문을 적극 추진한다고 들었다. 이북정책을 악이용하려는 심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댓글 1개:

  1. 영토적인 것에 한정해서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평가하는 것은 자칫 역사의 본질을 간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우리나라의 역사를 살펴볼 때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은 신라의 삼국통일과 고구려의 멸망이라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것이나,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해서 올바르게 대처해야 하는 과제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장공 김재준 목사는... '한국인과 한국 역사'를 서술하면서 고구려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강대국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외교적으로 영토를 확장한 '서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대장부 20세에 큰 일을 꿈꾸었던 '남이 장군'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한국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그러한 역사 이해를 바탕으로...
    먼 훗날 오늘의 시대를 후손들이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를 바르게 인식하고... 두려움과 긴장을 갖고 역사의 현장에서 자주적으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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